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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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21장
시오릭 에반테온은 공작령에 위치한 영지의 영주였다. 그는 에반테온 가문의 원로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일부러 수도로 올라가지 않은 몇 안 되는 원로 중 하나였다.
그런 시오릭에게는 커다란 불만이 하나 있었다. 현 에반테온 공작이 자리에 오르면서 영지마다 격차가 심해진 것이었다. 시오릭은 한때 블레어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데다 제 아비와 달리 열정도 있어 보여서, 작위를 계승하면 이 문제를 해소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오릭의 기대와 달리, 블레어드는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제 안위를 지키기 위해 곧바로 제국을 뜨는 모습을 본 시오릭은 블레어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 후로 시오릭은 표면적으로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에 속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그는 내년 봄 무렵 총회가 열린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이 후계자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시오릭은 블레어드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카르한을 지지하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전쟁광이라 소문이 난 소공자에게 공작령을 맡길 수 없었다. 차라리 블레어드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이 분쟁 지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야만족과의 분쟁만 정리하고 돌아가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자꾸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이 귀에 들어왔다.
사고라도 쳤나 싶었는데, 전부 좋은 말뿐이었다. 거기다 구휼금을 부탁해왔던 마을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긴 시오릭이 알아보니, 상단이 대거 들어왔다고 했다.
시오릭은 오랜만에 마을로 향했고, 카르한과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그는 계속 품고 있던 불만을 전부 쏟아냈다. 무능한 공작 가문에 대한 화풀이였을지도 몰랐다.
“제가 떠난 후에도 이곳이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나 카르한은 시오릭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해왔다. 순간 흔들릴 뻔했지만, 시오릭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 말뿐인 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대했다가 또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한번 잘해보십시오.”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길로 자신의 영지에 돌아가려 했다. 현관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화려하진 않았으나, 이 근방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높은 사람이 온 건가 싶어 긴장하고 있는데, 환한 금발을 가진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카르한……!”
그녀가 카르한을 불렀다. 뒤늦게 나와 꼼짝없이 굳어져 있던 카르한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기에…….”
“보고 싶어서 왔어요.”
여인은 곧장 카르한에게 다가와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안긴 카르한이 여인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시오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내 무뚝뚝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무척 부드러워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을 끌어와 담아낸 것 같았다. 무척 인상적인 장면이라, 시오릭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쉬운 듯 몸을 떼어낸 카르한이 그녀에게 시오릭과 루벤투스를 소개해주었다.
“이분은 에반테온 원로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 마을의 관리인인 루벤투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시오릭과 루벤투스는 숨만 들이켰다. 시오릭이 아는 블로든은 하나뿐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부자이자, 거상 집안.
“블로든이라면 혹시 사업으로…….”
시오릭의 물음에 일리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저 소소하게 장사하는 것뿐이에요.”
시오릭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절대 소소한 장사라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블로든이 맞았다.
그는 곧바로 카르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도대체 블로든 영애와 무슨 사이인 것이지? 끌어안은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사이인 것은 분명했다.
시오릭은 미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때 일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혹시 식사하셨나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식사하고 가세요.”
시오릭이 거절하기도 전에 일리아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마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놀라서 눈만 깜빡이자, 일리아가 말했다.
“요리사를 데려왔거든요.”
그 후로 속전속결이었다. 시오릭은 얼떨결에 다시 저택 응접실에 앉게 되었다. 일리아가 데려온 이들은 순식간에 자기 할 일을 찾아 나섰다.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금세 낡고 칙칙한 저택을 바꾸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과 가까운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일리아는 자꾸 희한한 물건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관심 없는 척하던 시오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먼저 이게 뭐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공작령에 처박혀 있던 시오릭에게는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시오릭은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머쓱해졌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카르한에게 모진 소리를 쏟아냈던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다 혹시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러는 건가 싶어서, 시오릭은 다시 정신 차렸다.
“식사만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시오릭이 단호히 말했다. 때마침 고용인이 응접실을 찾아왔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좁고 허름하던 식당은 그사이 싹 바뀌어 있었다. 자수가 놓인 식탁보와 은촛대를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듯해 보였다.
음식이 담긴 접시가 하나씩 테이블에 놓이고,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
음식을 한 입 먹은 시오릭과 루벤투스는 그대로 굳어졌다. 혀가 황홀해지는 맛에 잠시 머리가 아찔해졌다. 분명 평범한 고기 요리처럼 보였는데, 부드러운 육즙이 혀끝에서 춤을 추었다.
과일을 갈아서 만든 소스는 고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이렇게나 맛있는 요리는 두 번째였다.
“……오래전에 황궁 만찬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생각납니다.”
시오릭의 말에 일리아가 대답했다.
“이번에 데려온 요리사가 황궁 요리장 출신이라 그런 걸까요?”
시오릭이 놀라서 포크를 떨어뜨렸다. 황궁 요리장 출신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데려온 것이지……. 그런 대단한 요리사를 전속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혀를 내두르던 시오릭은 다시 음식을 한 입 먹었다. 미소를 부르는 맛에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러자 일리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참, 식탁보와 냅킨은 전부 여기에 있는 걸 사용했어요.”
저택 관리인인 루벤투스가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까 마차를 타고 오면서 봤는데, 여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아 보이더라고요.”
문 앞에 달아둔 장식품을 봤다고 일리아가 말했다.
“공예품을 만들어 수도에서 판매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일리아의 의견에 시오릭은 잠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곳은 척박한 땅이라, 농사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다만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 다들 공예품을 만들곤 했다. 수요가 적긴 했지만, 근처 영지에서도 찾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긴 했다.
“하지만 수도까지 운송하는 비용이 더 들겠지요.”
아무리 질 좋은 상품이라 한들, 유통 단계에서 가격이 폭등하면 누가 사겠는가. 시오릭이 그것을 짚어주자, 일리아가 대답했다.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운송 업체를 설립했어요. 유통 단계가 많이 줄었고, 시간도 절반 이상 단축되었죠. 물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츰 지역을 늘려가는 중이지만요.”
시오릭은 쥐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일리아의 말이 실현된다면…… 공작마저 외면한 이 마을에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다줄지도 몰랐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영지에도 조금씩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일리아의 제안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희망론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일리아가 처음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시오릭은 다시 스푼을 들었다. 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시오릭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때였다.
시오릭이 현관을 나서자 모두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시오릭은 일리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일리아는 뭘요,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카르한이 정말 연인 하나는 잘 뒀구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 다음 루벤투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넨 시오릭은 마지막으로 카르한을 응시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찾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카르한의 깍듯한 태도에 시오릭은 흠, 하고 침음을 삼킨 후 뒤돌아섰다. 말에 올라탄 시오릭은 영지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활기찼다. 방문할 때 항상 느껴지던 음울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늘 근심걱정에 찌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작 몇 달 사이에 다른 마을이 된 것 같았다.
마을을 둘러보던 시오릭은 잠시 멈춰 섰다. 일리아가 말한 대로 집집마다 걸려 있는 장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장식품을 볼 때마다 잘 만들었다고 감탄했으나, 그걸 팔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시오릭은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들 웃는 얼굴로 카르한을 칭찬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카르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나, 반쯤은 성공한 듯했다. 시오릭이 보기에 마을 사람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는 자신의 영지로 가기 위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변화의 기회가 찾아온 걸지도 몰랐다.
***
시오릭이 가버리자, 모두들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루벤투스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벤투스마저 가버리고 카르한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가 제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말이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일리아의 손을 살짝 잡아 보았다.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로는 전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웠다. 카르한의 중얼거림에 일리아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아왔다.
“그래서 왔어요.”
그 한마디가 일리아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또다시 일리아를 끌어안고 싶어진 카르한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제 방으로 가겠습니까?”
“좋아요.”
두 사람은 카르한이 침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카르한이 잠깐 멈칫했다. 벽에 일리아의 초상화를 걸어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들어오기 전에 후다닥 뛰어가 초상화를 걷어냈다. 그러나 일리아는 이미 봤는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웬 초상화예요?”
“그게…….”
헤인리에게 받은 초상화를 손에 쥔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비화를 들은 일리아가 불쑥 물었다.
“그래도 실물이 더 좋죠?”
카르한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상화가 수백 점 있다 해도 역시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카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그저 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일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카르한이 속삭였다.
“오느라 힘들진 않았습니까.”
“즐거웠어요. 당신 보러 오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이어서 재밌었다며 일리아가 웃었다. 황무지에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에 카르한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등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떠날 때보다 살 빠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식사는 평소와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거울을 볼 때도 딱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르한은 본인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일리아의 변화는 알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좀 더 길어진 것이나, 이전보다 야윈 것까지 말이다.
그것이 안쓰러워서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제 손목의 반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일리아도 자신과 헤어진 후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한 팔을 거둬 일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카르한이 일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일리아, 고맙습니다.”
카르한의 품에 안겨 있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계속 신경 써주어서 여기서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만나러 와준 것도 고맙고…….”
심지어 오늘도 일리아의 도움을 받았다. 제게 까칠하게 굴던 원로의 태도가 한층 누그러진 것도 일리아 덕분이었다. 늘 그랬다. 일리아는 항상 카르한에게 부족하지 않게 나누어주고 베풀었다.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었다.
“매번 당신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카르한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속삭이자, 일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깐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도움을 받은 건 나예요.”
서서히 카르한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일리아가 눈을 똑바로 마주해왔다.
“당신이 날 구해줬으니까요.”
일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카르한이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일리아가 손을 뻗어, 카르한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나란히 침대에 앉게 되자 일리아가 입술을 한참 달싹였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께 들었는데, 당신 과거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해했지만, 카르한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한 번 있습니다.”
“장소는요?”
“정확한 장소는 기억나지 않지만……, 황궁 정원이었습니다.”
카르한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전쟁에 나가 있을 때였는데, 잠깐 수도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전장을 떠돌던 카르한은 공작의 호출을 받아 수도에 귀환했었다. 그때 공작 가문 사람들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러 갔었다. 황제는 카르한에게 관심을 주었고, 블레어드는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눈치를 살피던 카르한은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정원을 산책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빠진 소녀를 발견했다.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카르한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카르한의 대답에 일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얼굴은…… 봤어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볼 새도 없이 급하게 호수에서 건져냈다. 직접 의원에게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저를 찾아온 블레어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왔을 땐 사라진 후여서…….”
그 후로는 시간이 오래 흘러 잊고 있었다. 카르한이 과거를 더듬듯 대답해주자, 일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일리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눈동자에 물기가 장막처럼 차올랐다. 그것을 본 카르한은 자신이 혹시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일리아…….”
카르한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숨을 내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물에 빠진 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리하트 테르시안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나를 구해준 사람은, 내 운명은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카르한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일리아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카르한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작고 둥근 물건이 놓였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바라보다가 제 손에 쥐어진 것을 확인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단추였다.
“내 운명은 당신이었어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손을 감싸며 속삭였다.
“당신이 구해준 사람이 나라고요.”
확신에 가득 찬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걸 돌려주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지만……, 고마워요. 날 구해줘서.”
그제야 일리아가 하는 말이 전부 머릿속에 들어왔다. 자신이 일리아를 구해준 은인이라고……? 그 순간 거의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작은 소녀. 카르한은 곧장 그녀를 물 밖으로 끌고 나왔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소녀는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속눈썹 사이에 숨어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물에 젖어도 환히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이 생각났다. 일리아가 말하던 운명의 상대는 바로……. 카르한의 입술이 떨려왔다.
“제가…….”
카르한은 목이 메어서 한 번 숨을 삼킨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제가…… 당신을…….”
그러나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서 내쉬어지는 숨조차 흔들렸다.
카르한은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일리아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카르한은 리하트 테르시안이 그토록 부러웠다. 동시에 처음으로 질투라는 감정을 느꼈다.
자격조차 없으면서 질투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면서 한편으로 괴로웠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를 구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해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카르한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꼬리에는 희미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일리아 또한 카르한을 보며 활짝 웃었다. 웃고 있는데 계속 눈물이 나왔다. 기뻐서, 가슴이 벅차서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카르한은 두 팔을 벌려, 일리아를 와락 안았다. 안겨 있던 일리아가 카르한의 뺨을 감쌌다.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차오르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일리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받아들였다. 잠시 잊고 있던 감촉이지만, 금방 익숙하게 서로를 탐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부드러운 입술을 눌렀다가 가볍게 삼켰다. 제 감정을 일리아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환희에 가득 찬 심장소리가 가슴 밖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침대에 풀썩 눕게 되었다. 좀 더 깊어진 입맞춤과 함께, 거친 손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입꼬리까지 빗겨간 입술이 어느새 목덜미에 파묻혔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온몸에 키스할 듯 입을 맞추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가 조금 붉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눈부신 모습이었다. 카르한은 침대에 누운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한 번도, 과거의 제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귓불을 살짝 만졌다가 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저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늘 스스로에게 인색했던 카르한이었다. 아무리 봐도 칭찬할 구석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카르한은 아까 하다 만 감사 인사를 다시 이었다.
“무사해주어 고맙고, 저를 찾아줘서 고맙습니다.”
한참을 엇갈린 끝에 결국 다시 만났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카르한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