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263
상남자 263화
많은 고민을 했고, 그걸 이겨 냈기에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단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리바리했던 동기들이 이렇게 큰 걸 보니 대견하기도 했다.
물론 대견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심한 소리도 곧잘 했는데, 후배를 받은 사람들이 특히 더했다.
오민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부사수를 받았는데, 그 자식이 얼마나 띨띨하냐 하면…….”
강창석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옆 부서에 후배가 들어왔는데, 말을 너무 안 들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현은 웃음이 났다.
두 사람의 처음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더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보고 있던 최슬기가 태클을 걸었다.
“창석이 오빠보다 더한 후배는 없을 거예요.”
“슬기 넌 아까부터 왜 나한테만 그래?”
“전 한 놈만 패요.”
“크크크크.”
최슬기의 말에 다들 어깨를 들썩였다.
같이 웃던 유현이 문득 과거 자신의 부사수를 떠올렸다.
‘그 녀석은 이번에 입사했으려나?’
아주 오래전인데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후배였다.
유현은 혼자 술잔을 들었다.
술맛이 꽤나 쓰게 느껴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떠들고 있던 중이었다.
정다빈이 유현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오빠, 잠깐만.”
“그래.”
유현은 정다빈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곱창집 앞엔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있었다.
이렇게 옆으로 앉으니 예전에 거제에서 얘기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정다빈이 정다혜와 인연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정다혜를 만났던 황당한 순간을 떠올리며 유현이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정다빈이 툭 하고 물었다.
“오빠, 다혜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요?”
“조금은.”
“어떻게요?”
“그 회사 검색해 보면 알잖아.”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이 왜 연락을 안 한대?”
정다빈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유현이 웃으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냐.”
“그럼요?”
“그런 게 있어.”
“에이, 말해 줘 봐요.”
유현은 옆구리를 쿡 찌르는 정다빈에게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혹시 다혜 씨에게 내 번호 알려 줬어?”
“아뇨.걔가 물어볼 리가 없잖아요.”
“어쩌면 물어볼 수도 있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정다빈이 몸을 옆으로 돌려 앉으며 물을 때였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잔뜩 술에 취한 강창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한유현, 빨리 들어와.”
“어휴.저 양반은 눈치도 없어.”
정다빈이 대번에 한숨을 내쉬었다.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갈게요.가자, 다빈아.오늘을 즐겨야지.”
“뭐, 그러시죠.대신 길게 놀 겁니다.”
“좋아.”
정다빈의 말에 유현이 빙긋 웃었다.
그 시각.
뉴욕에 있는 스프릿 컴퍼니는 오전 일과 중이었다.
분주한 사무실 안으로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엔 한 동양인 여자가 있었다.
정신없이 자료를 만들고 있는 그녀에게 남자가 물었다.
“혹시 엘리스 정 맞나요?”
“네.그런데요.무슨 일이시죠?”
정다혜가 고개를 돌려 대답하자, 남자가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당신에게 온 선물입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거죠?”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 정다혜에게 남자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젝트 성공 기념으로 보내는 고객님의 마음입니다.”
“그 고객은 누군데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그럼 이만.”
정다혜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남자는 몸을 돌려 홀연히 사라졌다.
“…….”
얼떨떨한 상황에서 멍 때리는 건 정다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웅성대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대상은 방문자 신분을 확인하는 회사 보안 요원이었다.
몇 차례 전화를 돌린 끝에 그녀는 단서를 잡아냈다.
주문지는 한국, 주문자 이름은 스티브였다.
딱 짐작 가는 게 있는 터라 그녀가 코웃음 쳤다.
“온갖 남자다운 척은 다 하더니, 이게 뭐야.”
다음 날 오전.
하루 더 오민재의 집에 머문 유현이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타이밍 좋게 정다빈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빠 말이 맞았네요.다혜가 번호 묻더라고요.잘해 봐요.
궁금한 게 많았을 텐데, 새벽까지 노느라 피곤해서인지 내용은 단출했다.
-땡큐.동기가 최고다.
가볍게 답장을 보낸 유현은 근처 공원 벤치에 가 앉았다.
정다혜의 성격상 머뭇거리지 않고 전화를 할 것 같아서였다.
털썩.
이 시간에 정다빈에게 물어보는 것도 참 그녀다웠다.
밤에 전화하는 게 미안해서 한국 시간으로 아침이 되기까지 기다린 게 딱 보였다.
그것도 사촌에게 말이다.
유현이 피식 웃으며 과거의 추억을 회상할 때였다.
때르르.
예상대로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유현은 웃음기 뺀 얼굴로 진중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한유현입니다.”
-스티브 한이 당신 맞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나 쌀쌀맞았다.
잔뜩 벼르고 있었던 티가 팍팍 났다.
유현은 달려들려는 그녀에게 브레이크를 걸어 줬다.
“누구시죠? 다짜고짜 묻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습니다.”
-아,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저는 정다빈 사촌 정다혜입니다.
“아아, 지난번에 뵀던?”
-네.맞아요.
그러자 꾹 참으며 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다혜의 턱에 또 호두 주름이 잡혔을 게 뻔했다.
그 모습이 자꾸 떠올라 유현도 모르게 말에 웃음이 섞였다.
“하하.잘 지내시죠?”
-딴소리 말고요.장미는 왜 보내셨어요?
“장미요?”
-계속 발뺌하면 끊을 겁니다.
이쯤에서 한 발 뒤로 빠질 때였다.
유현은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어줬다.
“프로젝트 완료하셨다면서요? 축하 기념으로 보낸 겁니다.”
-스토커예요?
“우연히 홈페이지에서 봤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왜 보내는 건데요?
물론 그걸로 정다혜가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이해시킬 마음도 없었다.
지금 유현의 마음을 그녀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탓이다.
대신 유현은 뻔뻔하게 나섰다.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저흰 커피까지 마셨잖아요.”
-그래서 친히 미국에 장미를 보냈다고요?
“네.요새는 서비스가 좋아서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다혜가 발끈하자, 유현이 슬쩍 그녀의 진심을 떠보았다.
“꽃 한 송이 좋지 않나요?”
-전 꽃 별로 안 좋아합니다.
유현은 아닌 척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실장님, 이렇게 프로젝트 완료하고 나면 축하한다고 꽃 한 송이라도 주는 거예요.
-쓸 데도 없잖아.차라리 다른 게 낫지 않아?
-아니에요.꽃 한 송이면 충분해요.
-의외네.
-어릴 적 드라마 때문인가? 전 그게 그렇게 좋아 보이더라고요.
유현이 기억을 발판 삼아 장난스럽게 넘겨짚었다.
“그래요? 지금도 한 손엔 꽃 들고 있을 거 같은데.”
-아, 아니거든요.
순간 당황한 호흡이 들려왔다.
매사 철저한 그녀답지 않게 참 어설픈 대응이었다.
이런 면이 있었구나.
이럴 땐 모른 척해 주는 게 예의였다.
피식 웃은 유현이 말을 돌렸다.
“근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비밀이었는데.”
-그게 어떻게 비밀이에요?
“이름도 안 남겼잖아요.아, 혹시 제 생각 하고 계셨나 보다.”
유현이 짓궂게 묻자 정다혜가 버럭 했다.
-아니거든요.
“하하.그래도 이렇게 목소리 들으니 좋네요.”
-진짜, 지금 장난쳐요?
“아뇨.진심입니다.”
-…….
잠깐의 침묵 속에 정다혜의 거친 호흡이 섞였다.
유현이 잠시 틈을 주자 그녀가 목소리를 정비했다.
유현이 기억하던 과거의 정다혜처럼 침착했다.
-아무튼 다음부터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이런.또 기대하고 계신 거 아니죠?”
-진짜 끝까지 뻔뻔하게 이러기예요?
물론 그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현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금세 새로운 정다혜로 돌아왔다.
유현은 그 모습이 무척 정겹고 좋았다.
말속에 절로 웃음이 담겼다.
“하하.한국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갈 일 없습니다.
“언젠간 오시겠죠.아님 제가 갈 수도 있고요.”
-끊을게요.
화가 난 상황에서도 그녀는 먼저 전화를 끊는 법이 없었다.
늘 이렇게 끊는단 말을 했다.
까칠한 겉모습 속에 담겨 있는 배려심이었다.
유현은 미소 지며 말했다.
“네.들어가세요.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
달칵.
여운을 남긴 채 통화가 끝났다.
화면에 찍힌 시간을 보니 꽤나 오래 통화했다.
정다혜의 입장에선 유현에게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한 셈이다.
공짜로 받는 건 절대 싫단 그녀의 마음이 확 느껴졌다.
“여전하네.”
유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 밝고 선명한 날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회사에선 반가운 소식이 하나씩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시.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유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잉.
확인해 보니 고성철 선임이 보낸 단체 문자였다.
거기엔 패널 점등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양품 20개 확보했습니다.패널 글라인딩 완료 후, IC 본딩 작업에 인계하겠습니다.
딱딱한 문자 속에 고성철 선임이 함박웃음 짓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메시지를 확인한 유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고생 많았네.”
2파트뿐만이 아니었다.
OLED 라인에서 제작하는 이 패널을 만들기 위해 미래제품 연구소, CTO 소속 인원들까지 함께 고생했다.
양품 개수로 보면 수율은 많이 떨어져 보이지만, 첫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가장 일정이 많이 걸리는 부분이 원만하게 지나간 셈이다.
아주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좋게만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시각.
문자를 확인한 맹기용 선임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폭탄이 넘어왔네.”
그의 입장에선 차라리 패널이 안 되는 게 나았다.
나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
패널이 잘됐는데 모듈이 안 되면 덤터기를 쓸 수밖에 없다.
워낙 실험적인 기술이 많이 들어간 IC라 더 불안했다.
그는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아침, 출근한 유현이 맹기용 선임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맹 선임님, 패널 사진 보셨죠?”
“어…… 봤지.”
“이제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유현이 너, 죽을래?”
“에이, 겁내실 거 없습니다.자, IC 부착하러 가시죠.”
“하…….”
유현은 맹기용 선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지만, 두려워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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