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317
상남자 317화
모든 일정을 마친 후였다.
인사를 하고 나온 유현에게 박두식 차장이 말했다.
“들어 보니 오늘 일성전자 놈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군.”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요?”
“뭐, 안 그래도 성가셨을 놈들이라 더 통쾌하긴 하지.이런 게 소소한 재미 아니겠나.”
“다행입니다.”
유현이 웃자, 박두식 차장이 멈춰 섰다.
그가 유현의 눈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자네에게 큰 빚을 졌어.덕분에 내 체면도 섰고 말이야.”
“오늘 빚, 잊지 말아 주십시오.그거면 됩니다.”
“당연하지.”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제 울산으로 내려갈 건가?”
“아뇨.따로 가 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기왕 올라왔으니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게.”
박두식 차장의 말에 유현이 의미심장한 답을 중얼거렸다.
“즐거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송해하는 박두식 차장에게 유현이 눈을 찡긋하곤 돌아섰다.
이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갈 차례였다.
유현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체육관이었다.
체육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진 후였다.
파팡.파팡.
늦은 시간이건만 체육관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유현이 들어서자 샌드백을 치고 있던 박영훈이 유현을 반겼다.
“유현아.”
얼마나 움직였는지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내일이 시합인데, 전날 이렇게 무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형, 이렇게 하면 내일 못 일어나.”
“아냐.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다부진 목소리를 내뱉는 박영훈을 보며 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훈이 저놈은 안 될 놈이야.내가 그냥 쉬라고 해도 계속 저 지랄을 한다.”
“관장님, 조금만 더 하고 정말 끝낼게요.”
관장은 박영훈의 말을 무시하곤 유현에게 물었다.
“유현아, 넌 컨디션 어때?”
“저야 뭐 상관있나요.머릿수 채우는 건데요.”
“그래도 기왕이면 이기면 좋지.”
“아뇨.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유현이 딱 잘라 말했을 때였다.
얼마 전, 유현과 시합했던 이장우가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선배님.”
“어, 안녕.”
당황스러울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눈에는 유현에 대한 존경심이 그득했다.
부담스럽다.
정말 부담스럽다.
몇 번을 만났지만, 이장우 옆에만 서면 그런 기분이 들었다.
워낙 열혈파인 데다, 과할 정도로 깍듯한 성격 때문이다.
관장이 그런 이장우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장우야, 내일 유현이도 대회 나가는 거 알지?”
“네.알고 있습니다.”
“그래.많이 배워 둬.네 선배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이번에도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선배님.”
이장우가 다시금 꾸벅 허리를 숙였다.
관장이 유현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마치 이래도 안 이길 거냐는 눈빛이었다.
유현이 미소를 고스란히 돌려주며 말했다.
“관장님, 그래도 안 통해요.”
다음 날.
유현은 체육관 식구들과 함께 상암에 위치한 체육관을 찾았다.
승합차에서 내리자 체육관 앞에 크게 걸린 현수막이 보였다.
-제5회 연맹회장배 아마추어 격투기 대회
그 모습을 보며 강동식이 탄성을 뱉었다.
“크으.나를 위한 대회가 펼쳐지는구나.”
뒤따라 내린 유현이 황당한 듯 물었다.
“형도 그냥 머릿수 맞추러 왔다면서요.”
“아냐.그래도 상금이 눈앞에 있는데, 포기하면 남자가 아니지.”
그때 관장이 또 유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 이제 마음이 좀 바뀌지 않냐?”
“아닙니다.어서 가시죠.”
앞서가는 유현을 보며 관장이 피식 웃었다.
“자식.내숭은.”
넘버원 체육관의 참가 인원은 총 4명이었다.
한유현, 이장우, 박영훈, 강동식.
체육관 입구 앞에서 신분을 확인한 유현은 받은 명찰을 목에 메고 안으로 들어섰다.
드넓은 체육관 안에 커다란 링 2개가 보였다.
복싱 링처럼 꾸며진 이곳이 오늘 대전을 펼칠 장소였다.
유현 일행이 링 아래 안내원에게 다가가자, 명찰을 확인한 안내원이 탈의실로 안내했다.
“선수분들께서는 탈의실에서 환복한 후 나와 주시면 됩니다.”
탈의실 안에도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쉬식.쉬식.
웃통 벗고 몸을 푸는 사람들도 보였고, 긴장되는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추어 대회일 뿐이지만, 모두의 눈빛에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쳤다.
가장 눈빛이 강렬한 건 이장우였다.
유현이 자신의 벗은 상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장우야, 뭘 그렇게 봐?”
“선배님께선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뭘 살펴.몸은 네가 더 좋잖아.”
“아닙니다.전 선배님처럼 참 근육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작은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이장우의 몸은 마치 장갑차를 연상시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장우의 시선은 오로지 유현에게로 향했다.
뭐든 배우겠다는 의지가 넘쳐났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유현은 얼른 체육관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곤 손을 휘적거렸다.
“얼른 가자.”
“네, 선배님.”
언제나처럼 그의 대답이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후.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링 아래에서 조 추첨이 시작되었다.
참가 인원은 총 62명.
기존 신청 인원 64명 중 2명이 빠졌다.
게임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며,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눠 두 그룹의 우승자끼리 결승을 치르는 형태였다.
안내원이 네모난 박스를 들고 다니며 조 추첨을 진행했다.
유현이 공을 뽑은 순간이었다.
박영훈이 자신의 공을 내밀며 말했다.
“오, 유현이 넌 나랑 결승전에서 만나겠다.”
“놀고 있네.나랑 만나겠지.”
옆에 있던 강동식이 한마디 거들었다.
둘 다 의욕이 넘쳤다.
유현이 속한 그룹은 A로, 결승전이 아닌 이상 두 사람과 만날 일이 없었다.
문제는 이장우였다.
같은 A그룹이 걸린 이장우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말했다.
“선배님, 저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하게 답했다.
“그래.우승은 네 거다.”
“아닙니다.저는 선배님의 발끝에도 못 미칩니다.”
“무슨 소리야.너 잘해.”
“한참 부족합니다.그래도 정말 발전한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마냥 빼기엔 너무 의욕적이라 유현이 일단 둘러댔다.
“알았어.꼭 만나자.”
“네, 선배님.꼭 이기겠습니다.”
이장우가 크게 답했다.
그치지 않는 과잉 충성에 유현이 혀를 내둘렀다.
토너먼트 대진상 유현이 이장우와 만나려면 A그룹 4강전까지 올라야 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유현은 적당히 분위기만 즐기다 게임을 끝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악을 써서 이장우처럼 진지하게 프로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하필 유현의 첫 번째 상대가 미참석자였다.
유현은 자연스럽게 32명으로 편성된 A그룹 16강전에 올라갔다.
잠시 후, 안내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넘버원 체육관 한유현 선수, 경기장에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유현은 헤드기어와 두툼한 글러브를 착용하고 링 위로 올라갔다.
맞은편엔 아까 탈의실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있던 남자가 섰다.
꽤 단단한 체격이지만, 눈빛이 조금 약했다.
“조준현.파이팅.”
“힘내라.네가 우리 희망이다.”
객석에서 들려오는 응원을 들은 그가 손을 들었다.
“와아아아.”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제야 조준현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격투기를 향한 열정이 반짝반짝 빛났다.
꿈을 향해 전력 질주 하는 모양새다.
직장이 있고, 취미로 운동하는 유현과는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그래.네가 이기는 게 맞다.”
작게 중얼거린 유현은 다시금 다짐했다.
목표는 1라운드 패배.
분위기만 살짝 느껴 보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때, 링 아래에서 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아, 한번 보여 줘.”
피식 웃은 유현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관장이 보고 있는 마당인지라 하는 척은 해야 했다.
땡.
종소리와 함께 조준현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속도를 보니 기본기가 꽤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휘잉.
하지만 긴장해서인지 동작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
허공을 가르는 그의 주먹을 피하며 유현이 펀치를 날렸다.
유현답지 않게 큰 동작이었다.
게다가 주먹은 녀석의 머리가 아닌 그 옆을 노렸다.
헛주먹질로 밸런스를 스스로 무너뜨린 후, 다음 공격에 맞고 쓰러질 예정이었다.
이미 유현의 머릿속엔 시나리오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공격에 아차 한 조준현이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기괴한 자세에 그의 턱이 유현의 궤도로 삐죽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유현이 주먹의 궤도를 더 밖으로 빼려 했지만 늦었다.
유현의 주먹이 하필 그의 턱 끝을 스쳤다.
틱.
워낙 큰 동작이다 보니 유현의 주먹에 힘이 제법 실렸다.
그 주먹을 맞은 조준현은 마치 종이 인형처럼 픽 쓰러졌다.
쿠당탕.
당황한 유현이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야.일어나.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링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선수들이 수군댔다.
웅성웅성.
“야, 봤어? 크로스카운터 예술인데?”
“대박.진짜 프로급인가 봐.”
“저 녀석, 체크해 놓아야겠어.”
유현은 그야말로 황당했다.
그때, 관장이 크게 반색했다.
“유현아, 역시 넌 해낼 줄 알았다.”
관장의 격려를 받으며 내려온 유현은 조용히 지난 경기를 복기했다.
상대를 이장우나 김태수급으로 설정한 게 큰 오류였다.
아마추어 대회다 보니, 아직 실력을 피우지 못한 원석들도 많이 참석했다.
지려면 더 힘을 뺄 필요가 있었다.
유현은 말려 있던 주먹에 힘을 풀며 나지막이 다짐했다.
“그래.아예 나서질 말자.”
그렇게 다음 경기가 시작됐다.
유현은 굳은 마음으로 링 위에 올랐다.
A그룹 8강 상대는 이방학이었다.
꽤나 매서운 눈매가 일품인 남자였다.
객석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방학이 당연히 이기겠지.”
“그래.강력한 우승 후보잖아.”
“일본에서도 이름 좀 날렸다며?”
“근데 왜 이런 아마추어 경기에 나왔대?”
물론 유현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유현은 이방학의 실력을 좀 전에 만났던 조준현급으로 설정했다.
자신은 시작하자마자 헛발을 디딘 후 펀치를 맞고 쓰러질 예정이었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링 아래로 관장과 이장우가 보였다.
좀 전 경기에서 승리한 이장우는 이미 4강에 진출했다.
이번에 유현이 이기면 두 사람의 대진이 성사될 예정이었다.
“선배님, 파이팅입니다.”
이장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서 붙고 싶다는 의지가 넘쳐났다.
이장우에겐 미안하지만, 유현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었다.
그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진심으로 격투기에 임하는 상대와 맞붙을 필요가 있었다.
유현은 그런 마음으로 상대와 마주했다.
이방학은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눈을 부라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유현은 그저 못생겼다는 생각만 들 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상대의 공격적인 태도를 보니 이번엔 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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