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580
상남자 580화
정다혜도 마찬가지인지 다소 들떠 있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유현 씨가 미국에 온다고 했을 때, 무척 반가웠어요.”
“저도요.”
“보고 싶었나 봐요.”
불쑥 내비친 그녀의 진심에, 유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역시 보고 싶었습니다.그래서 텍사스에 가려 했고요.”
“텍사스보단 샌프란시스코가 좋아요.유현 씨와의 추억이 있는 이곳에서 만나고 싶었어요.”
정다혜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던 건 애플 품평회가 있었던 때로, 벌써 3년 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이 강렬할 만큼 인상적인 일이 많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유현이 미소 지었다.
“그때 조금 다퉜던 거 같은데요?”
“그러게요.그땐 유현 씨가 참 이상하게만 느껴졌어요.”
“왜요?”
“너무 무모해 보였거든요.어떨 때는 터무니없이 태평해 보이기도 했고요.”
그때의 유현은 정다혜를 조롱하는 외국인과 시비가 붙었었고, 소매치기 당한 그녀의 핸드백을 되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벌인 행동이었지만, 그 모습에 정다혜가 무척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다.
“좀 거침없긴 했죠.”
유현이 순순히 답하자, 정다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전 늘 계획대로 행동했는데, 유현 씨는 달랐죠.마치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 같았어요.”
-전 실장님과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일을 시작했으면 일정 내에 반드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죠.기회를 주신 만큼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과거 정다혜는 유현을 같은 부류라고 했고, 지금의 정다혜는 다른 부류라고 했다.
유현의 변화가 기존의 관계를 뒤튼 셈이다.
변화된 상황 앞에서 유현이 대신 변명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모든 사람이 같은 건 아니니까요.”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했어요.그런 유현 씨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 우연이라 생각했거든요.”
“운이 좋았습니다.동료들이 많이 도와줬죠.”
“동료들 이야기도 그래요.당장 눈앞의 성과를 욕심내기에도 모자랄 판에 동료들은 어찌나 챙기는지, 전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랬군요.”
“근데 어쩌면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정다혜가 이런 생각을 한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그녀는 유현의 행보에 비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되돌아봤다.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할 때마다, 성과를 올리기 위해 욕심을 낼 때마다, 동료들을 경쟁에서 짓누를 때마다 유현을 떠올렸다.
그라면 어떻게 할까?
어느 순간부터 유현의 선택지가 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 하면 매니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왜요? 잘하고 계시잖아요.”
“아까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고 했죠? 진정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느냐고.”
“네.그랬었죠.”
“전,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원하는 일인 줄 알았어요.매니저가 되어 큰 프로젝트를 맡으면 꿈을 이룰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요?”
“그런데, 아니었어요.올라갈 곳은 여전히 높고, 제약도 많죠.제 목표를 위해 피해 입는 사람을 외면해야 했고, 부정에도 눈을 감았어요.”
“성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죠.”
유현이 했던 말처럼 정다혜는 성공을 위해 살았고, 또 그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은 발버둥 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얻은 성공은 마치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았다.
정다혜는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결론을 뱉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난 진정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어떤 일인데요?”
“한번 바꿔 보려고요.유현 씨처럼, 그렇게 어우러지며 살고 싶어요.물론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정다혜의 입에서 유현이 다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가졌던 인생관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 셈이다.
“아.”
잠시 넋을 놓은 유현을 보며 정다혜가 설핏 웃었다.
“둘 다 욕심내는 게 웃기죠?”
“아뇨.설마요.”
유현이 손사래를 치자, 정다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유현의 눈을 바라본 그녀는 꽁꽁 감춰 둔 결심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래서, 프로젝트가 끝나면 한국으로 갈까 해요.”
“정말요?”
“네.새롭게 시작하려고요.그리고 기왕이면…… 유현 씨랑 함께하고 싶어요.”
“…….”
너무 뜻밖의 말이어서일까?
유현은 말문이 막힌 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번뜩 정신을 차린 유현이 재빨리 대답했다.
“저 역시 다혜 씨랑 함께하고 싶습니다.”
“전에는 절 잡지 않으셨잖아요.”
“그건 다혜 씨 꿈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죠.”
애써 변명하는 유현을 보며 정다혜가 빙긋 미소 지었다.
“걸림돌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근데 이제 와서 보니 디딤돌이네요.”
“제가 도움이 된 건가요?”
“네.덕분에 진짜 꿈을 발견했으니까요.”
휘우웅.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두 사람의 애틋한 시선이 오고 갔다.
어느새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유현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정다혜를 떠나보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다음을 기약했기에, 돌아선 유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공항에서 나온 유현은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오늘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11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나도하가 있는 인스타그램이었다.
캘리포니아가 1601번지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에 인스타그램이 있었다.
정확히 하면 2층 전체는 JK통신이, 3층의 구석 블록을 인스타그램이 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목적지와 가까워질 때쯤, 현진건과 통화 연결이 됐다.
-도하한테 연락해 봤어?
“아직.네가 하지 말라며.”
-그래.연락하지 말고 직접 가서 만나 봐.같이 가 주려고 했는데, 내가 지금 테스트 업체에 잠시 나와서 시간이 안 되겠어.
현진건이 출장을 갔다는 걸 유현은 진작 알고 있었다.
출장 일정을 바꾸겠다는 녀석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유현, 본인이었다.
“그냥 데리러 가는 건데 함께 갈 게 뭐 있어.인스타그램으로 가면 되는 거지?”
-어.케빈한텐 내가 말해 놨으니까, 너 가면 알아서 모실 거야.
“날 왜 모셔?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는 건 난데?”
나도하에게 10일 동안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회사인 터라, 유현은 무척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런 유현에게 현진건이 또 의아한 소리를 뱉었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더라고.그리고…… 아니다.
“뭔데 그래?”
-네가 선택할 일이야.직접 가 보고 결정해.고민되면 연락하고.
결정?
더 물을 새도 없이 유현의 차가 건물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유현은 트렁크를 열고 음료 박스를 꺼냈다.
조촐하지만 감사의 선물이었다.
유현은 음료 박스를 들고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안내판을 따라 우측 복도로 제법 걷고 나서야 인스타그램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유리벽엔 카메라가 그려진 로고가 크게 붙어 있어, 속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면적만 봐도 안이 어떨지 짐작이 됐다.
끼이익.
유현은 살짝 열려 있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예상대로 협소했다.
미래기술TF의 사무실 정도 크기로, 회의실도 따로 없을 만큼 단출한 구조였다.
드문드문 책상이 놓인 게 다인 그곳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앉은키마저 큰 케빈 시스트롬의 목소리였다.
“젠장! 또 서버 키가 털렸어! 빨리 백업 자료 복구해야 해.아니면 서비스 중단이야!”
“AWS(아마존 웹 서비스)에 복구 문의 하고 올리고 있어.아니다.도하가 있지?”
마주하고 있던 안경 낀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트북을 든 그가 구석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유현의 시선도 그곳에 닿았다.
거기엔 며칠 밤을 새운 듯 퀭한 나도하가 있었다.
안경 낀 남자는 노트북 화면을 나도하에게 보이며 말했다.
“도하, 이거 복구할 수 있겠어? 시간이 없어서 바로 올려야 해.”
번역 어플을 사용하는지, 나도하는 휴대폰에 뜬 내용을 확인한 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오케이.”
그러곤 키보드를 눌러 빠르게 작업하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닥.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나도하의 키보드 소리가 울렸다.
‘그냥 거드는 정도인 줄만 알았더니.’
유현은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방 안에 있는 4명의 남자 중 누구도 유현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유현은 굳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대신 가만히 지켜봤다.
잠시 후, 케빈 시스트롬이 박수를 짝 쳤다.
“굿! 에휴.이제야 한시름 놨네.”
몸을 늘어뜨린 그는 그제야 유현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혹시…… 스티브?”
“네.도하를 데리러 왔습니다.감사 인사도 좀 하고요.”
유현이 바닥에 내려놓은 음료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꼭 아들 학교에 찾아간 학부모가 된 기분이다.
그때 뒤늦게 유현을 확인한 나도하가 소리쳤다.
“형!”
“도하야, 잘 있었어?”
유현이 손을 흔들자, 나도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도하와 유현을 번갈아 본 케빈 시스트롬이 난색을 표하며 검지를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도하 씨를 조금만 더 빌릴 수 있을까요? 딱 1시간만이요.”
케빈 시스트롬이 현진건과 약속한 나도하의 마지막 근무 시간은 낮 12시였다.
나름 10일간 총 근무 시간을 고려해서 짠 일정이었다.
유현이 입을 떼려는 순간, 나도하가 먼저 말했다.
“형, 저 조금만 더 하다 갈게요.여기 지금 보안 이슈가 크게 났거든요.”
“괜찮겠어? 얼굴 보니까 많이 상했는데.”
“괜찮아요.케빈, 아임 오케이.”
나도하는 유현의 질문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바로 승낙 사인을 보냈다.
얼굴은 푸석했지만, 눈빛만큼은 전보다 날카로웠다.
일손이 부족한 스타트업에서 문제가 터지면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다.
에어비앤비를 경험한 유현은 그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유현은 가만히 구경하는 대신, 점심을 거를 게 분명한 이들을 위해 샌드위치를 사 왔다.
“헉! 감사합니다.”
별것 아닌데 케빈 시스트롬은 무척 고마워했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위급 사태를 빨리 수습하려는 듯 모두 정신없이 일했다.
유현은 어깨 너머로 상황을 보며 대략적인 문제를 파악했다.
인스타그램은 500만 가입자를 넘길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였다.
예상보다 빠른 성장과 함께 트래픽이 폭증했다.
급작스럽게 서버를 확장하는 데 문제가 생겼고,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킹 시도가 더해졌다.
하필 오늘 서버 보안 담당자가 휴가였다.
나도하가 투입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게 지속 가능할까?
4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은 인력풀을 과감하게 늘릴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바로 투자 유치였다.
에어비앤비, JK통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유현은 그들의 일을 거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도하의 일이 끝났다.
3층 휴게실에서 유현과 마주한 케빈 시스트롬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약속 시간을 넘기고 너무 늦어 버렸네요.”
“아뇨.도하도 원한 건데요.”
유현이 영어로 답하며 옆에 있는 나도하를 바라봤다.
번역 어플의 음성 인식이 잘 안 되어서인지 나도하는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그런 나도하에게 케빈 시스트롬이 봉투를 건넸다.
“10일치 수당 1,200달러입니다.마지막 날 추가 근무로 200달러 더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봉투를 받아 든 나도하는 기쁜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