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585
상남자 585화
-데이터센터 체계를 망가뜨린 이후로 바로 세운 흔적은 없어요.오히려 있던 자료도 다 지워 버리고 있었습니다.솜씨를 보아하니 경험이 꽤 있는 사람인가 봐요.
이준일 실장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씨도 안 남기고 싹 정리한 후 사라졌다.
흔적을 안 남긴 데다 폭탄도 뻥뻥 터뜨려 댔으니, 쉽사리 찾긴 힘들지 않을까?
신경수라면 또 모르지만, 이젠 별반 상관없었다.
“알아서 하겠죠.”
-하긴, 우리가 신경 쓸 게 아니긴 하지.근데 참 신기해.
“뭐가요?”
-다른 건 몰라도 회장님이 이렇게 완강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신경수 이사도 전혀 몰랐으니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
박두식 차장의 물음을 듣는 순간 유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번쩍 든 생각 때문이다.
‘신경수가 회장의 동태를 왜 몰랐지?’
분명 이준일 실장을 통해서 체크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전화가 끊어지고, 차가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도 유현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 동부에 있는 신경수도 유현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준일이 아버지의 동태를 내게 숨긴 건가?”
“그럴 리 없습니다.원주 공장 파업 건 때도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마주앉은 남자의 말에 신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때까진 분명 특이점이 없었지.그럼 아버지가 몰래 꼼수를 부렸다는 거군.”
“무슨 꿍꿍이인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자넨 여기서 할 일이 있어.”
“혹시 엘리엇 후처리 때문입니까?”
“아니.그럴 필요 없어.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차갑게 답한 신경수는 조금 전 통화했던 신현호 회장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해외 자본으로 수작질하지 말고, 들어와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해.그게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다.
혹시나 했건만, 신현호 회장은 몰래 벌인 일까지 다 알고 있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뒷방 늙은이가 된 줄 알았더니.’
헛웃음을 지은 신경수가 남자에게 물었다.
“신화반도체 인수의향서가 나올 시점은?”
“회장님의 발언으로 인해 약 5개월 정도 미뤄질 거 같습니다.”
“5개월이라…….시기 맞춰서 본대를 꾸려.한국으로 간다.”
“네.알겠습니다.”
기합이 든 남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신경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라고?
“제대로 보여 주지.”
동시에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같은 시각, 신현호 회장은 그룹 운영 책임자 임혁수 부회장과 마주했다.
“이번 기회에 잘 정리했군.수고했어.”
“제가 한 게 없습니다.손 고문님이 신경을 써 주신 덕분이죠.”
“태범이 그 친구 역할이 크긴 했지.하지만 자네가 비밀스럽게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야.”
전 그룹 운영 책임자이자, 신현호 회장의 오랜 벗인 손태범 전 부회장은 모든 걸 내려놓고 물러났었다.
하지만 반전은 신경수에게 약점을 잡혔던 그가 자신의 치부를 밝히면서부터였다.
전말을 알게 된 신현호 회장은, 손태범 부회장이 했던 1차 개혁에 이어 2차 개혁을 준비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주회사로의 전환이었다.
덕분에 회사의 오랜 병폐였던 로열패밀리와 해외 자본 문제를 단번에 떨쳐 냈다.
이 모든 걸 뒤에서 주도해 온 임혁수 부회장이 물었다.
“감사합니다.그럼 이제 본격적인 후계자 선정 작업에 들어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혹시 경욱이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글쎄.녀석은 직원을 위한다지만, 밑바닥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반면, 경수는 문제가 많긴 해도 실력은 스스로 증명했지.”
신현호 회장의 냉정한 평가에, 임혁수 부회장이 핵심을 짚었다.
“결국 둘이 붙어 봐야 알 수 있다는 거군요.”
“그래.한성이란 큰 배를 이끄는 일이야.원한다면 힘으로 쟁취해 내야지.”
살아남는 호랑이는 누가 될까?
신현호 회장은 곧 있을 선택의 시간이 기다려졌다.
사무실 앞에 선 유현은 이제 의문을 떨쳐 내기로 했다.
신현호 회장이나 신경수보다 당장 동료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한 까닭이다.
약속대로 양손 두둑이 든 유현이 문을 벌컥 열었다.
벌컥.
안에 들어서자, 회의 테이블에 쪼르르 머리를 박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인기척도 못 느낀 모양이다.
“너희들, 뭐 하냐?”
“어? 유현아, 왔어?”
권세중 대리가 손을 들자, 옆에 있던 정현우가 크게 손짓했다.
“형, 우리 사보(사내 간행물)에 올라왔어요.빨리 와 보세요.”
“그게 벌써 나왔어?”
“네.다른 부서 거 밀어내고 바로 나왔나 봐요.”
정현우는 다가온 유현에게 자랑스레 책자를 펼쳐 보였다.
-화제의 부서, 미래기술TF.반도체 디스플레이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다!
큼지막한 타이틀 아래 동료들의 사진이 보였다.
권세중 대리를 중심으로 정현우와 장준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배경에 나와 있는 구글의 스마트 글라스와, 2쪽을 가득 메운 기사가 인상적이다.
정현우가 한쪽 구석에 있는 사진을 짚었다.
“형은 출장 중이라 프로필 사진으로 대체했어요.괜찮죠?”
“괜찮네.”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세중 대리가 볼멘소리를 냈다.
“나도 그냥 프로필 사진 낼 걸 그랬어.사진 너무 이상해.”
“뭘, 멋지게 잘 나왔구만.”
“웃는 모습이 어색하잖아.에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헛소리 말고 초콜릿이나 먹어라.”
유현이 큰 종이 가방을 올리자, 장준식이 잽싸게 내용물을 꺼냈다.
“감사합니다.잘 먹겠습니다.”
“오오, 비싼 초콜릿이네요.고마워요.”
반색한 정현우에 이어 권세중 대리가 손을 내밀었다.
“땡큐.다녀오느라 고생했다.”
“빨리도 말한다.”
피식 웃은 유현이 손을 맞잡았다.
주말까지 포함해 20일이 넘는 공백이 있었건만,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네 사람은 초콜릿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밀린 수다를 떨었다.
사보 촬영뿐만 아니라 그룹장 추가 포상 소식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사장님께서 사무실에 들러 칭찬도 해 주셨어요.회식비도 지원해 주셨고요.”
침을 튀기며 말하는 정현우에게 유현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그만큼 잘한 거야.”
“그래도요.일은 예전보다 훨씬 덜한 거 같은데 너무 좋은 일만 있으니까, 꿈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선배님, 꿈이 아닙니다.예전 레티나 프리미엄 할 땐 더 큰 것도 받았어요.”
“진짜요? 대박.우리 여기서 더 받을 수도 있는 거예요?”
장준식의 한마디에 정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그리 놀라울까?
회사에 준 이득에 비하면 받은 건 정말 푼돈에 불과했다.
유현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정현우에겐 아니었다.
늘 주목받지 못하는 부서에 있었던 그는 이 모든 게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유현은 굳이 사실관계를 말하는 대신, 정현우의 기분에 동조해 줬다.
“그래.앞으로 더 좋은 일 많을 거야.”
“네.그래야죠.아, 저희 세미전자에 출장도 갔었는데요.”
정현우는 신이 난 듯 출장 행보를 읊기 시작했다.
서포터가 아닌 주인공으로서 첫 출장이 인상적이었는지, 무척 들뜬 목소리였다.
“엔지니어분들이랑 미팅하고, 기획분들과 계획 논의도 했어요.그리고 김영길 과장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으며 듣고 있던 유현이 의외의 이름에 귀를 펄럭였다.
“김영길 과장님도 같이 갔어?”
“네.컬러폰 때 세미전자랑 같이 업무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긴 하지.”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한 마음이었다.
아무리 아끼는 후배들이라고 해도, 다른 부서 직원이 이렇게 나서는 건 쉽지 않다.
이런 유현의 속내를 알 리 없던 정현우는 그저 밝은 표정이었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덕분에 세미전자 사장님에게 밥도 얻어먹었어요.”
“신경을 많이 써 줬네.”
“네.업무 정리도 쫙 해 주셔서 엄청 편하더라고요.”
싱글벙글한 정현우에 이어, 권세중 대리가 부연 설명을 해 줬다.
“출장도 출장이지만, 울산에 있는 개발 담당 쪽 정리도 해 주셨어.확실히 개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도 잘 짚더라.”
“밥이라도 사야겠네.”
“오히려 고생 많다고 사 주셨습니다.이렇게 많이 노력했는지 몰랐다면서, 대단하다고 하셨습니다.”
장준식의 말까지 들어 보니, 김영길 과장은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는 유현이 부탁했던 대로 미래기술TF를 맡을 생각이다.
‘꽤 대담해졌네.’
조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헛발질이 될 수 있음에도 그는 유현에게 신뢰를 보여 줬다.
받을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인 이상, 유현도 시간을 늦출 이유는 없었다.
유현이 고민했던 부분을 언급하려 할 때였다.
유현의 표정을 살피던 권세중 대리가 불쑥 말했다.
“신화반도체 인수를 우리가 어떻게 서포트할지 김 과장님께 설명해 줬어.”
“벌써?”
“그래.그러려고 나한테 알아보라고 한 거 아니었어?”
떠보는 권세중 대리의 질문에 유현이 피식 웃었다.
“역시 내 동기.참 감 좋아.”
“칭찬받은 김에 한마디 더 할게.너…….”
권세중 대리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려 하자, 유현이 팔을 뻗어 멈춰 세웠다.
“잠시만.내가 먼저 말할게.”
“역시 맞구나.”
그 작은 행동만으로 권세중 대리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감 좋은 녀석이라 그런지, 단편적인 정보를 취합해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하지만 남은 두 사람은 아니다.
스윽.
유현은 고개를 돌려 멀뚱한 표정의 정현우와 장준식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러곤 다소 진지한 목소리를 뱉었다.
“다들 알다시피 짧은 기간 동안 우린 큰 성과를 냈어.고작 이 4명으로 말이야.”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인지, 정현우와 장준식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권세중 대리는 안 좋은 상황을 예감한 듯, 씁쓸한 미소와 함께 한숨을 쉬었다.
“에휴.”
유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덕분에 앞으로도 미래기술TF는 승승장구할 거야.이렇게 독립적인 공간에서 그룹장님, 사장님의 지원을 받으며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겠지.”
“네.우리 TF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래.준식아, 최고의 조직이지.그래서 미안한 소리를 좀 해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을 껌뻑이는 장준식을 보며, 권세중 대리가 손바닥으로 귀 막는 시늉을 했다.
“준식아, 듣지 마.너 충격 받는다.”
“네? 그게 무슨…….”
뜸을 들이는 장준식을 보며 권세중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벌써 유현이 홀로 가겠다고 했을 때 보일 장준식의 표정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때, 유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반전의 말을 내뱉었다.
“우리 다 같이 혁신전략실로 가자.”
“엥?”
“네?”
동시에 세 사람의 눈이 약속이나 한 듯 휘둥그레졌다.
유현은 다시금 확인 사살했다.
“난 신화반도체 인수를 지원하기 위해 혁신전략실에 갈 생각이야.너희들에게 미안하지만, 같이 가 줬으면 좋겠다.”
“…….”
정현우와 장준식은 도통 무슨 말인지 감을 못 잡은 듯 눈만 껌뻑였다.
그런 두 사람을 뒤로하고 권세중 대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혼자 갈 생각 아니었어?”
“혼자 왜 가.나 혼자 가서 무슨 쌩 고생을 하라고.너희들이 도와줘야지.”
“그게 무슨…….”
“같이 가자.여기만큼 편하진 않겠지만, 지원은 여기 못지않게 받게 해 줄게.일은 어려워도 그만큼 남는 게 있을 거야.”
유현이 홀로 떠나는 게 미안해서 같이 가자는 게 아니었다.
시야가 넓은 권세중 대리, 서포트에 최적화 된 정현우, 보고서 작성에 일가견이 있는 장준식.
짧지 않은 시간 호흡을 맞춘 이 3명의 동료는 유현에게 꼭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