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43
상남자 643화
권세중 대리는 유현이 인정할 정도로 넓은 시야를 보유했다.
감도 좋아서 현상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다.
그런 동기가 밑그림까지 제대로 이해한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내심 궁금했던 부분이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진 시기가 맞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녀석에게 전하긴 너무 큰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젠 더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현이 물었다.
“세중아, 아까 내가 출장 안 가고 남는 이유가 뻔히 다 보인다고 했지?”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서.말해 봐.그럼 내가 다 대답해 줄게.”
유현의 의도를 알 리 없는 권세중 대리가 귀를 쫑긋거렸다.
“솔직히?”
“어.솔직히.”
“이번에 남는 거, 신경수 이사 때문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복귀 임박이라고 뉴스에 떴었잖아.게다가 넌 예전부터 그 사람 신경 많이 쓰고 있었고.”
대번에 신경수의 복귀를 짚는 건 의외였으나, 이 정도는 예측 범위였다.
유현은 더 깊게 들어갔다.
“맞아.근데 내가 왜 신경을 쓰고 있을까?”
“부사장님과 후계자 대결을 한다며.그래서 그런 거 아냐?”
“후계자 대결은 어떻게 진행될 거 같은데?”
“그거야 혁신전략실은 하던 일을 계속할 테니까, 아마 신경수 이사 쪽이…….”
권세중 대리는 더듬더듬거리면서도 신설되는 조직의 구성을 짚어 냈다.
그 내용이 진행 상황과 꽤나 근접했다.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없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배경지식이 더해지면 더 멀리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또 한 단계 성장할 계기가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내심 미소 지은 유현이, 얼마 전 여태식 전무에게 들었던 바를 털어놓았다.
“네가 말한 조직 이름은 기획조정실이 될 거야.그리고…….”
후계자 대결 구도는 시작일 뿐이었다.
지주회사 체제에 대한 언급부터, 신경수의 복귀 시나리오까지.
유현이 아는 많은 것들을 공유했다.
물론 그냥 다 말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권세중 대리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었다.
그의 성장을 돕기 위함이다.
그사이 맥주잔이 세기 힘들 만큼 많이 비워졌다.
권세중 대리는 멍한 눈치였다.
“우리 손에 차기 회장 자리가 달린 거라고?”
“정확히 말하면 한성의 미래지.”
“그거나 그거나.유현이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해 왔냐?”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권세중 대리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유현은 잘못된 부분을 정정해 줬다.
“네가 오해한 모양인데, 난 하는 거 별로 없어.고생은 다른 사람들이 더 하고 있지.”
“그래도.신경수 이사 복귀할 때 남아 있잖아.”
“남아서 내가 할 일이 뭐 있겠어? 나서서 싸울 것도 아니고.”
“아깐 신경수 이사 때문에 남는다며.”
신경수가 온다고 해서 유현이 크게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이미 머릿속에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다 들어 있는데, 겁낼 이유가 없다.
그보다 유현에겐 다른 게 더 중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신경수 이사가 오고 난 이후지.그때, 통합 조직이 만들어질 거니까.”
“통합 조직? 그건 또 뭐야?”
“그게 뭐냐 하면…….”
이날, 유현은 권세중 대리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해 줬다.
친한 두 사람이 맥주잔을 사이에 두고 회사 이야기만 주구장창하는 놀라운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권세중 대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권세중 대리가 조금 변했다.
조금 더 차분해졌고, 눈빛은 진중해졌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나서서 하려고 애썼다.
유현은 오늘도 열심히 자료를 만들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세중아, 쉬엄쉬엄해.”
“안 돼.이번 스마트폰 성공시켜야지.”
“그래.의지가 좋긴 한데, 너 혼자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알아.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려고.”
마치 장준식 대리라도 된 듯 매사에 열심이었다.
늘 타박하던 김성득 차장이 놀랄 정도였다.
이걸 긍정적이라고 봐야 하나?
유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권세중 대리의 노력은 MWC 출장 당일까지 이어졌다.
전시회 참관 계획을 세밀하게 짰고, 국내에서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부분을 챙겼다.
혼자만 챙기는 게 아니라, 다른 두 대리의 내용까지 신경 써 줬다.
세부적인 업무까지 다 조율하다 보니, 유현이 딱히 나설 부분이 없었다.
유현은 대신 멀리 떠나는 동료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줄 생각이었다.
회사 앞 버스 정류장에 선 유현이 짐을 챙긴 3명의 동료를 눈에 담았다.
먼저, 이들을 이끌 권세중 대리에게 말했다.
“세중아, 넌 욱하는 성질만 조심하면 돼.”
“야, 그땐 잠깐 그런 거야.”
“어쨌든.괜히 거기 가서 일성 애들이랑 시비 붙지 말라고.”
“어이없네.누가 전시회 가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해.”
권세중의 말을 유현이 냉큼 받았다.
“누구긴, 김현민 상무님이지.”
“뭐?”
어이없어 하는 권세중 대리에게, 유현이 확실히 말해 줬다.
“김현민 상무님이 예전 유럽 전시회에서 일성 애들 보자마자 멱살 잡으려고 그랬어.”
“진짜? 말이 되냐?”
“사실이야.하여튼 너, 정신 나간 짓이랬지? 다 이를 거야.”
“야, 인마, 그게 아니잖아.”
당황한 권세중 대리를 뒤로하고, 유현은 장준식 대리를 바라봤다.
유현의 몫까지 다 해내겠다는 각오가 결의에 찬 눈빛에서 전해졌다.
“준식이 넌 내가 알려 준 관광지 기억하지?”
“네.다섯 곳 모두 조사해서 정리해 놨습니다.”
“그래.넌 거기 인증샷 다 찍고 와.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내가 알려 준 식당에서 밥도 꼭 먹고.”
“네? 그래도 전시회는…….”
“농담이 아니라, 의미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알겠습니다.꼭 해내겠습니다.”
잠시 당황했던 장준식 대리는 이내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이 또한 유현의 가르침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이기도 했다.
업무 외적으로 시야를 돌리는 시간이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미소 지어 준 유현이 이번엔 정현우 대리 앞에 섰다.
걱정되어 죽겠다던 녀석이 이제는 첫 해외 출장이라고 꽤 들뜬 모습이다.
캐리어를 손에 쥔 채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에게 유현이 덕담했다.
“꼭 신 과장이랑 2인 1실 써라.”
“형, 진짜 저한테 왜 그래요?”
“좋아서 그래, 좋아서.”
툭툭.
유현은 금세 울상이 된 정현우 대리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농담 삼아 말하긴 했지만, 신낙균 과장과 붙어 다니는 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터다.
신낙균 과장만큼 해외 업체를 많이 다뤄 본 사람이 몇 없다.
조언은 이게 끝이었다.
공항버스가 왔고, 동료들이 하나둘 올라탔다.
창밖으로 고개를 삐쭉 내민 장준식 대리가 크게 외쳤다.
“과장님, 매일 경과 보고드리겠습니다.”
“됐어, 인마.”
권세중 대리는 한술 더 떴다.
“유현아, 회사를 잘 부탁한다.”
“형, 외로우면 연락해요.받아 줄게요.”
정현우 대리의 말까지 들은 유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다들 돌아올 때쯤이면 어떤 모습일까?
유현은 부쩍 성장해 올 동료들의 모습이 기대됐다.
버스가 멀어진 순간, 타이밍 좋게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박두식 차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신경수 이사가 내일 입국할 거야.예정대로 공항에서 기자회견이 잡혔어.
내용을 확인한 유현은 무척 덤덤한 마음이었다.
내심 기다렸던 일인데 별 감흥도 들지 않았다.
그저 올 게 왔다는 생각뿐이다.
스윽.
휴대폰을 집어넣은 유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한성타워가 아니었다.
신경수의 입국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만남을 위해,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유현의 목적지는 체육관 건물 2층, 더블와이였다.
저벅저벅.
유현은 걸음을 옮기며 오전에 받았던 나도하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형,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언제 시간 되시면 꼭 들러 주세요.
대체 뭘 보여 주고 싶다는 걸까?
직감적으로 그게 지금껏 몰래 준비해 온 일이라는 걸 알았다.
너무도 궁금했지만 워낙 꽁꽁 숨기고 있던 터라 차마 묻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일부러 시간을 빼 빨리 온 이유였다.
건물에 도착한 유현은 북적이는 1층 김밥집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직원 채용을 하지 않아서인지, 사무실은 여전히 휑했다.
그래도 청소는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나도하의 할머니가 일을 마치고 올라와 정리해 준 덕분이다.
“청소 업체 직원이라도 고용해야겠네.”
작게 중얼거린 유현이 대표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예고 없는 방문이라서 그런지, 박영훈이 화들짝 놀랐다.
“뭐야, 네가 웬일로 이 시간에 다 오냐?”
“못 올 데 왔어?”
툭.
유현이 초코케이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자, 박영훈은 질색했다.
“넌 맨날 초코케이크냐? 다른 건 없어?”
“형 주려고 사 온 거 아냐.도하는?”
“글쎄다.자리에 없으면 잠깐 어디 나갔겠지.연락해 줘?”
“나도 휴대폰 있어.근데 뭐 해?”
휴대폰을 꺼낸 유현은 모니터 앞에 코를 박고 있는 박영훈을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달리 무척 집중한 박영훈이 중얼거렸다.
“투자 대회 참가 중.”
“그건 도하 프로그램이 알아서 한다며.”
“그렇지.그래도 이게 구경하는 맛이…….오오! 오른다.오른다.”
“꼭 경마장 온 아저씨 같네.”
들썩이는 박영훈을 보며 유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박영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박수 쳤다.
짝짝짝짝.
심지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수익률 1위 탈환! 하하하!”
“아이고, 좋겠어.아마추어 대회에서 1등 해서.”
“좋지.내가 이거 하려고 프로그램을 얼마나 손봤는데.이리 와 봐.”
“됐어.또 무슨 광을 팔려고.”
“이번에는 진짜라니까.어서.”
박영훈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지만, 유현은 거기에 응해 줬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관심이라도 가져 주자는 마음이었다.
다가온 유현에게 박영훈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봐 봐.진짜 난 손도 안 대고 프로그램이 다 자동으로 한 거야.여기 기록 남은 걸 보면 아까 15분봉이 팍 꺾였을 때, 칼 매도를 했다가 변곡점에서…….”
듣자하니 오늘은 조금 공격적인 매매 방식으로 바꿨나 보다.
기록지에 매수 매도 기록이 빼곡했다.
유현은 박영훈의 투자 이론보다, 세세한 기록까지 남긴 나도하의 프로그램이 더 신기했다.
대표가 원한다고 이런 걸 뚝딱 만들어 주는 직원이 대체 어디 있을까?
심지어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박영훈의 설명이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따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형, 제가 분명 서버에 있는 기록값 건드리지 말라고…….어? 유현이 형?”
“뭘 그렇게 놀라.이리 와 앉아.케이크 먹자.”
유현이 손짓하자, 나도하가 어리둥절했다.
“형이 이 시간에 왜…….”
“네가 오라며.”
“이렇게 일찍 올지 몰랐죠.아직 준비 안 됐는데.”
“나중에 하면 되지.”
유현의 제안에 정신을 번뜩 차린 나도하가 말했다.
“안 돼요.잠시만요.영훈이 형, 서버에 올라간 거 건드리지 말고, 컴퓨터에 깔린 걸로 해요.알았죠?”
“뭘?”
“주식 자동 매매 프로그램이요.형이 계속 만지니까 테스트가 안 되잖아요, 테스트가.”
빠르게 쏘아붙인 나도하는 뭐가 그리 급한지 다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