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4
상남자 84화
다음 날 회사에 간 유현은 곧바로 재직증명서를 뽑았다.
그러곤 곧장 오재환 팀장에게 갔다.
“팀장님.오늘도 휴가 쓰겠습니다.”
“뭐? 또 바쁜 일이야?”
“네.”
유현이 말하자 오재환 팀장은 어이가 없단 듯 코웃음을 쳤다.
이내 독이 오른 눈빛으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어 독설을 퍼부으려던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박승우 대리가 끼어들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팀장님, 제가 허락했습니다.”
“넌 또 뭐야.”
“이 녀석이 오늘까지 정말 중요한 일이 있더라고요.헤헤.”
두 손을 비비며 오재환 팀장의 시선을 끈 그는 유현에게 턱짓했다.
‘빨리 가.’
김현민 차장에 이어, 박승우 대리까지.
유현은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었다.
“오늘이면 끝납니다.다음부터는 꼭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더 정중히 오재환 팀장에게 인사했다.
곧바로 유현이 향한 곳은 은행이었다.
김현수에게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과거야 돈을 쌓아 둘 만큼 많았지만 지금은 은행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김현수에겐 힘든 일이더라도, 유현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유현에겐 한성전자라는 든든한 신용이 있었다.
딩동.
“128번 손님.”
유현은 번호가 불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마주하고 있는 은행원을 보았다.
둥근 뿔테 안경을 낀 빼빼 마른 남자였다.
-서울은행 은종호 행원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본 순간 유현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경이 없고 퉁퉁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마주하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과 겹쳐졌다.
과거 부사장 한유현을 전담했던 은종호 지점장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손님.”
“네.반갑습니다.”
유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과거 그와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떠오른 탓이다.
어린 은종호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대출요? 오우, 한성전자시네요.잠시만 기다리세요.”
유현의 신분증과 재직증명서를 받아 든 은종호 행원은 눈썹을 빠르게 들썩인 후 빙긋 웃었다.
특유의 거만함은 빠졌지만 친근한 말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얼마까지 원하세요?”
“여기요.”
“아, 벌써 작성해 놓으셨구나.빠르기도 하시지.”
능글맞은 부분도 여전하다.
그 성격 그 대로라면 이쯤에서 오지랖 한번 떨겠지.
“집을 사는 것도 아니면, 차? 혹시 어디에 쓰시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
역시나.
과거 부사장이던 유현에겐 입조심을 하더니, 눈앞에 있는 신입사원에게는 그의 성격을 확 드러낸다.
나열된 특징만 보면 거래 대상으로 낙제점에 가깝다.
물론 장점도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단 것이다.
그가 알려 준 고급 정보 덕분에 유현도 꽤 쏠쏠한 재미를 챙기곤 했었다.
잠시 돈과 성공에 취해 있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린 유현은 고개를 털었다.
“아, 그냥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아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대답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친구에게 돈 좀 빌려주려고요.”
“아…… 친구.친구가 돈이 급히 필요한가 보네요.”
말만 들으면 단지 되묻는 거 같지만, 그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의자까지 당겨 테이블 모서리에 가슴팍을 붙였다.
상체를 기울이며 유현을 보는 게 꼭 훈계라도 할 태세였다.
“네.매우 시급히요.”
“흠…… 제가 이런 말 할 건 아니긴 한데요.말해도 될까 모르겠네.”
“말씀하세요.”
“네.오지랖 좀 떨자면, 웬만하면 친구 간에 돈 거래는 안 하는 게 좋아요.그러다 친구 잃고 돈도 잃더라고요.”
“그래서 잃는다 생각하고 빌려주려고요.”
유현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그가 되물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많죠.친구가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요?”
“네.그럼요.”
유현이 빙긋 웃자, 은종호 행원이 한마디 더 하려다가 그냥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냥 저는 혹시 후회할까 봐 한 말이었습니다.”
“빌려주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그럴 수도 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유현은 그에게 굳이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의 인생이 있는 법이다.
대출 작업이 끝날 무렵 유현은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은종호 행원에게 내밀었다.
“대출 받은 돈은 바로 여기로 넣어 주세요.”
박영훈을 통해 알아낸 김현수의 계좌번호였다.
큰돈을 한 번에 보낸다고 하니, 유현의 말이 새삼 다시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는 유현을 한 번 쳐다보곤 되물었다.
“여기로요? 정말로요?”
“네.그렇게 해 주세요.”
“네.”
“나머지 돈은 여기로요.”
유현이 다시 알려준 건 박영훈에게 부탁해 거래를 튼 투자계좌였다.
물론 유현의 이름이었다.
“네, 잘 처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지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유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네.들어가세요.”
유현은 정중히 인사한 후 뒤돌아섰다.
유난히 유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실 김현수에게 빌려주면서 겸사겸사 자신도 투자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적어도 김현수에게 준 돈 만큼은 챙기고 싶었다.
최소한 빚은 지고 살고 싶진 않았다.
그저 최소한이다.
돈은 나중 문제였다.
그 놈의 돈 때문에 다 잃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란 판단이다.
서울은 평일 낮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유현이 발 닿는 대로 간 곳은 명동이었다.
유현은 골목 구석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딸랑.
나무문을 열 때마다 들리는 종소리는 1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전 이 종소리가 너무 좋더라고요.옛날 느낌이 나면서도 세련되기도 하고.
과거 누군가는 이곳 사장이 내려 준 커피를 그렇게 좋아했었다.
과거보다 젊은 사장에게 커피를 받은 유현은 그녀와 자주 앉았던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인테리어가 바뀌긴 했지만 배치는 그대로였다.
“아쉽네.”
너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야.
유현은 맞은편 빈 의자를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첫 데이트를 이곳에서 했지만 첫 다툼 역시 이곳에서 했다.
생각해 보면 커피처럼 쓰기도 한 기억이다.
그럼에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김현수에게 바뀐 선택을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와 틀어졌던 관계를 다시 되돌리고 싶다.
처음 약속했던 것처럼 말이다.
커피 잔이 거의 비워질 때까지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 커피전문점이 얼마나 많은데 여길 올까.
유현은 단지 그녀와의 추억 때문에 왔을 뿐이었다.
여기 말고는 특별히 생각나는 곳도 별로 없어서 그녀를 찾기 위해 따로 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다 식은 커피 잔을 또 입에 댈 때였다.
지이이잉.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전화기가 울었다.
김현수의 번호였다.
“어, 현수야.”
-유현아, 이건 아니지.
뭘 말하는지 뻔히 알지만 유현은 시치미를 뗐다.
“뭘?”
-뭐긴 뭐야.이 돈 말이야.
“아, 너 투자해서 갚는다며.그래서 미리 보낸 거야.”
-야! 그게 말이 돼?
잠시 수화기에서 귀를 뗐던 유현이 다시 핸드폰을 고쳐 잡고 말했다.
“말이 왜 안 돼.돈 떼먹을 생각이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그냥 받아.”
-왜? 내가 왜 받아? 네 계좌번호 불러 봐.
고지식한 자식.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지금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란 걸 알면서 이런 말을 했다.
유현은 더 강하게 나갔다.
“그럼 버리든지.”
-뭐?
“현수야, 네 맘 모르는 거 아닌데, 그냥 시치미 뚝 떼고 받아.너 돈 필요하잖아.난 필요 없는 돈인데 그거 잠깐 쓰는 게 뭐가 어떠냐.”
-그래도…… 이건 너무 많잖아.
유현이 전달한 돈은 3천만 원이었다.
큰 액수이긴 했지만 유현에겐 전혀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그냥 넣어 둬.정 그러면 갚으면 되잖아.일단 수술 잘 마무리하고, 현식이 맘 편히 공부시키고 그러면 될 거 아냐.”
-…….
“현수야, 나 그 돈 받을 거야.꼭 받아 낼 거야.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고맙다.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을게.
유현은 머쓱한 마음에 괜히 귀를 만졌다.
“자식.왜 귀 아프게 소리를 질러.”
-야, 그, 그건…….
“됐고.어머니 돌본다고 카센터도 닫았을 텐데 단골들한테는 미리 귀띔해 줘.”
-응?
“솔직하게 사정을 말해 주라고.”
유현의 말에 김현수가 우물쭈물거렸다.
-난 그냥 부담이 될까 봐…….
“알아.어머니 완쾌하시면 다시 일해야 할 거 아냐.”
-정말 고맙다.정말…….
“진짜 자꾸 그러면 끊는다.”
-아니, 난 너무 고마워서…….
유현은 그냥 툭 끊어 버렸다.
과거 유현의 어머니 장례식장에 와서 내내 빈소를 지키던 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늘 지고 있었던 마음의 빚이 이걸로 조금은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현수 어머니 수술만 잘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지이잉.지이잉.
역시나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유현은 안 받을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때 유현의 시야에 왼쪽 나무 벽이 들어왔다.
낙서가 가득 남겨져 있는 벽이었다.
-야, 그냥 끊으면 어떡해!
“잠시만.”
-야, 유현아.
유현은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굉장히 낯이 익은 필체가 눈에 띄었다.
-운명의 상대는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
필체를 떠나 문구가 뇌리를 사로잡았다.
몇 번씩이나 들었던 말이었다.
유현은 조금 더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좀 있다 전화할게.”
-유현아!
탁.
유현은 그대로 통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은 다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휘갈겨진 사인만이 그의 동공 안을 채우고 있었다.
“확실해.”
한자 다(多)를 하트 반쪽처럼 만든 사인.
큐피드 화살이 대각선으로 꽂힌 것까지 똑같았다.
-어릴 때 만든 사인이에요.바꾸려다가 그냥 정이 들어서.
그녀와의 첫 번째 데이트 날.
이 벽에 낙서를 하던 그녀가 사인을 남기며 한 말이었다.
유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며칠 후.
한성타워 1층 로비에 유현이 서 있었다.
언젠가부터 유현은 아침 파트회의가 끝날 때마다 로비로 내려갔다.
가자마자 안내데스크 옆 TV에 띄워진 회의실 예약 리스트를 확인했다.
심심해서 소일차 가는 건 절대 아니었다.
분명히 이유는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낯이 충분히 익은 안내데스크 여직원이 유현을 먼저 반겼다.
“또 오셨네요? 오늘은 기다리는 회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이제 찾아봐야죠.”
“꼭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인사한 유현은 옆에 서서 TV 화면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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