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5
연록흔 – 5화
밤이 되면 달이 뜨고 해가 뜨면 낮이 되었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그리고 동장군이 찾아왔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니 변함없던 세상도 결국은 달라졌다. 폭군 가광이 죽고 황룡의 스무 번째 황제가 등극한 것이다. 마혜황후가 동궁 가륜의 가묘를 만든 후로 삼 년이 지났을 때였다.
젊은 황제가 주인이 된 이후, 황룡국은 전에 없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좀 떫은 소문도 있으나, 민초들은 새로운 황제를 성군이라 칭송했다. 바야흐로 묵은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목전에 도래하고 있었다.
곤아산 자락이 포근하게 감싸 안은 석암장에도 봄은 왔다. 햇발이 미처 녹이지 못한 잔설이 그늘진 곳에 희끗희끗하게 누워 있기는 하지만, 어린 생명들은 축축해진 땅을 뚫고 용감히 움을 틔었다. 연택의 풍광은 점차 아기 연둣빛으로 물들어 갔다.
가끔씩 노루며 사슴이 제집인 양 머물다가는 집은 담박하여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마당 한구석에서 새파란 봄나물이 상긋하게 마르고, 집 옆으로는 곤아산 꼭대기에서부터 발원한 옥수가 찰랑대며 흘렀다.
잘람잘람…….
봄의 여신이 내민 연초록빛 손가락에 밀려 동장군은 이미 북쪽으로 달아난 듯, 물가에도 봄물은 들어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오른 갯버들이 지천이었다. 그곳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참방.
깎은 밤처럼 준수하게 생긴 소년은 손끝으로 얼음 녹은 물속에 담긴 봄을 더듬었다. 손끝은 아릴만큼 차가우나 봄을 감지한 마음만큼은 다사했다. 소년은 갯버들을 한 손 가득 꺾어 바로 옆에 앉은 여인에게 내밀었다.
“산해 아가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소년의 물음에 여인은 봄님보다 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고운 얼굴은 앳되지만, 그녀는 곧 어미가 될 몸이었다. 여인은 잔뜩 부른 배를 봄볕 아래에 자랑스럽게 내밀고 앉아 소년을 향해서 눈부시게 웃었다.
“아이가 이젠 막 뛰놀아요. 록흔, 만져 볼래요?”
수박 하나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처럼 불쑥 튀어나온 배였다. 록흔은 다칠까 싶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안에 그의 동생이 들어 있었다. 이제 두어 달 뒤에는 세상 빛을 볼 터였다.
“가군은 언제 돌아오실까요? 이번 표물은 좀 까다로운 것 같던데……. 가군도 없는데 아이가 나올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걱정 마세요. 아버진 시간 맞춰 돌아오실 테니.”
왕산해는 록흔의 새어머니였다. 이제 막 열넷이 된 그보다 겨우 두 살이 많았다. 여러모로 누군가의 어미가 되기엔 어리나, 엄연히 그에겐 어머니였다.
줄줄줄…….
아직 록흔은 산해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존재가 고마운 것은 사실, 자식 하나 바라보고 죽은 아내의 그림자에 묻혀 살기엔 소년의 아비는 너무나 젊었다.
“어디쯤 오고 계실까? 봄이라고 해도 아직은 바람이 매서운데……. 록흔, 난 가군이 걱정돼요.”
“산해 아가씬 아버지가 그렇게 좋으세요?”
흰 눈자위가 푸르도록 맑은 눈으로 록흔이 묻자 산해가 볼을 붉히며 웃었다. 발개진 볼을 상냥한 봄바람이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나 아홉 살 때였나? 그때 가군을 처음 뵈었지요. 그 어린 나이에 뭘 알았느냐고 친정어머닌 놀리시지만 어린 눈에 가군처럼 장한 분이 없던걸요.”
록흔은 서모를 처음 만난 날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작년 겨울이었다. 사나운 눈보라가 석암장의 문이란 문은 죄다 후려치던 밤에 왕산해는 연문의 식구가 되었다.
‘후후…….’
아버지가 비단이불로 꽁꽁 싸매 들쳐 업고 온 처녀, 그녀가 산해 아가씨였다. 그러고 나서 석 달인가? 돌아보지도 살피지도 않았다. 어린 록흔이 보기에도 분명 정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윤지 아버진 그렇게 새 아내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어쩌면 사랑이 깊어 그리 심술을 부린 것인지도 몰랐다.
“난 가군이 너무 좋았어요. 록흔은 모르겠지만, 한 번씩 가군이 표국에 들르시면 그분 바라보는 눈이 너무 많았지요. 아홉 살 때부터 나도 그분을 바라봤으니까…….”
“그야말로 일편단심이었군요.”
록흔의 말에 산해가 방긋 웃었다. 쪽 고른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록흔이 좀 더 크면 내가 어떻게 가군을 얻게 되었는지 말해 줄게요.”
왕산해는 밝고 당돌했다. 금지옥엽 고명딸이라 구김 같은 건 바이없었다.
“이야, 어서 자라야겠는걸요.”
자초지종을 듣진 않았지만, 록흔 역시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버지보다 산해 아가씨가 한발 더 앞서 나갔던 거다. 제 나이의 갑절이나 되는 사내를 사로잡으려면 보통은 넘을 터. 그래서인지 어린 서모는 의붓딸을 항시 애 취급했다. 그러나 그로서도 그것엔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그나저나 가군 안 계실 때는 그 남복 좀 안 할 수 없어요?”
“왜요?”
“왜라니? 난 여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예쁜 여동생이 생기면 머리도 빗겨 주고 어여쁜 옷도 나눠 입고 그러고 싶었단 말이죠. 다행히도 록흔처럼 예쁜 딸이 생겼으니……. 가군께서 하시는 일은 다 따르겠지만 록흔한테 하는 처사는 이해할 수 없어요.”
자기 딴에도 쑥스러웠는지 딸이라는 말을 재빠르게 주워 삼키고 산해가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저도 그다지 불만이 없는걸요. 산해 아가씨가 입은 옷은 예쁘긴 하지만 그걸 입고 어떻게 산을 타고 무공을 연마하겠어요?”
록흔이 외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누가 가군 딸 아니랄까 봐, 두 사람 어찌 그렇게 닮았지요?”
산해가 어이없어 하며 탄식했다.
“아버지 딸이니 당연히 닮았지요.”
록흔이 빙글거리며 대꾸하자 산해가 곱게 눈을 흘겼다.
“어휴, 정말……. 부녀가 똑같이 뻣뻣하게 고집만 세 가지고.”
“그만 들어가세요. 봄바람이지만 아직은 차니 아가씨 감모(감기)라도 드시면 큰일이죠.”
“듣기 싫은 소리 하면 말 돌리는 것도 똑같아, 정말!”
“산해 아가씨, 벌써 이스라지 꽃이 피었네요. 이 녀석들도 봄볕이 고팠나 봐요.”
산해의 성화도 아랑곳하지 않고, 록흔은 몸을 돌려 꽃 하나를 땄다. 관목 숲에 숨은 듯 핀 것은 연홍빛이었다.
“이스라지?”
산해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꽃을 받아 들었다. 더 이상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테니 마음을 돌리는 게 나았다. 하얀 손바닥에 내려앉은 꽃은 무척이나 고왔다.
“사월은 되어야 피는 꽃인데, 정말 빨리도 왔죠?”
“이름이 특이해요.”
우산살 모양으로 사방으로 뻗은 꽃잎, 화순마다 연하게 번진 붉은 빛, 눈에 확 뜨이지는 않아도 은근히 예뻤다. 그러고 보니 이스라지는 장미를 닮았다. 톱니 같은 이파리가 여기저기 돋은 새로 꽃은 여러 송이 피어 있었다.
“이거 열매 맺으면 먹기도 해요. 빨간색인데, 좀 떫긴 해도 먹을 만하죠. 씨 안에 들은 알맹이는 약재로도 쓰이고……. 예쁘죠?”
“그러고 보니 록흔은 아는 게 참 많은 거 같아요.”
“많긴요, 산사에 있을 때 스님들께 이래저래 주워들은 거예요.”
“참, 록흔은 절에서 자랐다고 했죠? 그 얘기 좀 해 줘요.”
“별 재미없는데…….”
“해 줘요.”
“그러죠, 뭐.”
재잘대는 산새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새어머니였다. 록흔은 기꺼운 마음으로 대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하세요.”
구수하게 퍼지는 차향으로 보건대, 양씨 할멈이 쑥버무리라도 쪄 놓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자, 여기도 조심.”
록흔은 몸이 불편한 산해의 팔을 붙들고 조금은 높은 문턱을 넘어 석암장의 본채를 향해 걸었다. 그때, 두 사람을 발견한 양씨 할멈이 반색을 하며 부엌에서 나왔다.
“에구, 우리 아씨 봄볕은 많이 쬐셨나요?”
“할멈도 나가 봐요. 봄 냄새가 얼마나 좋은데요.”
애교 많은 안주인의 말에 양씨 할멈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마침 어제 캐 온 쑥이 너무 좋아서 쑥버무리를 좀 했어요. 차랑 같이 올릴 테니 록흔 아가씨하고 방으로 드세요.”
양씨 할멈은 하얀 쌀가루가 군데군데 묻은 손으로 이마에 돋은 땀을 스윽 훔쳐 냈다.
“할멈도 같이 들어요. 부엌에서 따로 먹지 말고.”
“예, 아씨.”
노파는 다과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가고, 두 사람은 본채 쪽으로 돌아섰다.
“악!”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산해가 제자리에 우뚝 서는가 싶더니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산해 아가씨?”
“어윽…….”
순식간의 일이었다. 산달도 아직 두 달이나 남았고 몸이 약하긴 해도 그동안 무탈하게 지내 와서 그리 걱정하지 않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 산해는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록흔, 나 배가…….”
“산해 아가씨, 많이 아파요?”
“아아악!”
일순, 록흔은 얼굴이 하얗게 바랬다.
“할멈, 할멈!”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양씨 할멈이 뛰어나왔다. 노파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대충 닦아 내고 산해부터 살폈다. 할멈은 축축하게 젖어 가는 산해의 치마를 한번 떠들러보고는 록흔을 돌아보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 큰일이네, 주인님도 안 계시는 마당에…….”
“할멈, 아기 받아 본 경험 많다고 했지요?”
“그런 건 이 늙은 것이 제대로 할 수 있지만, 아직 산달을 채우지 못한 게 걱정이네요.”
“내가 산 아래에 가서 의원을 모셔 올게요. 우선 아가씨를 방에다 눕혀야겠어요. 할멈, 좀 잡아 줘요.”
“예, 아가씨.”
록흔이 업다시피 하고 양씨 할멈은 뒤에서 받쳐 들고……. 셋은 한 몸인 듯 움직여 방으로 들어갔다. 산해를 업은 등이며 허리가 뜨거웠다. 뜨거운 액체가 계속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런, 모래집물이 터졌어요.”
양씨 할멈이 서둘러 이부자리를 펴며 그렇게 말했다.
“…….”
록흔은 산해에게 괜찮은 거냐는 말조차도 섣불리 묻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삿될 것 같아서 그저 입만 굳게 다물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아씨는 맘이 강하신 분이니 잘하실 거예요.”
록흔은 산해의 이마를 쓸었다. 앳된 새어머니, 그녀는 지금 온통 땀범벅이었다.
“혼자 괜찮겠어요, 할멈?”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의원께도 꼭 보여야 할 것 같으니…….”
“알았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록흔이 막 일어서려는데 산해가 그의 팔을 잡았다. 정신을 놓은 줄만 알았는데 아닌 모양, 아파하는 만큼 그 손아귀에 실린 힘이 강했다.
“록흔, 가군을…… 가군을 불러 주세요.”
금세 바짝 말라 버린 입술로 산해가 무한을 찾았다.
“알았어요. 아버지 모셔 올 테니 기운 빼지 말고 계세요.”
“가군…….”
산해는 정신없이 무한을 불러 댔다.
“로, 록흔…… 가군을…….”
호흡이 가쁘면서도 산해는 지아비만을 찾았다.
“아가씨, 잠시만.”
록흔은 잠시 넋을 놓고 보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를 모셔 올 방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공중을 향해 긴 휘파람을 불렀다.
“휘이익!”
음파가 퍼져나갔다. 록흔은 고개를 꺾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찾았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파란 하늘에 검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그것은 점점 커졌다.
빼애애액!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점점이 사그라지는 휘파람의 끝 언저리, 청회색 비금(날짐승)이 날개를 퍼덕거렸다.
“마영!”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맹금은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다 땅 아래로 급강하했다.
파앗!
록흔은 오른쪽 팔을 높이 쳐들었다. 날개를 접고 팔에 앉은 것은 매였다. 소년이 새끼였을 때부터 키운 놈으로 영리하고 그 행동이 몹시 민첩했다. 놈은 제 주인을 향해 눈을 반작였다.
“마영,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와! 알았지?”
록흔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건네자, 놈이 알아들었다는 듯 위를 보고 또 아래를 보았다.
“가라, 마영!”
마영이 날아올라 먼 하늘로 사라지자, 록흔도 길을 재촉했다. 창주성의 저자에 있는 의원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반나절은 걸릴 터. 그는 좁은 산길을 나는 듯이 타고 달렸다.
의원은 험한 산을 잘 타지 못했다. 일각이 삼추 같은데 늙은이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산을 올랐다. 그 느려터짐이 몹시도 못마땅하나, 나어린 록흔으로선 내놓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의원이라는 자가 제 몸보신은 허투루 하는지 하초가 몹시도 부실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보는 사람마저 불안케 했다.
“아직 멀었나?”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야 합니다.”
“산수도 좋지만 정말로 첩첩산중에 사누만. 앞장서시게. 부지런히 따라감세.”
“부탁드립니다.”
록흔은 앞서서 걷다가 의원이 한참 뒤처지는 것 같으면 되짚어 내려가 그 손을 잡아끌었다. 마음 같으면 달랑 들어서 업고 달렸으면 좋겠는데 아직 가진 내공이나 외공이 그럴 정도는 아니었다. 노인의 속도를 고려해서 걷다 보니 한참이 되어도 석암장은커녕 마연곡도 보이지 않았다.
“이보게, 포의수가 터졌다고 했던가?”
“저희 집 할멈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터졌으면 아이도 빨리 나와야 하는데……. 산모가 초산인가?”
“예.”
“어서 가세나.”
두 사람은 이제 말 한마디 없이 걸었다. 묵묵히 비탈진 산길을 오르고 또 내렸다. 그렇게 산을 오르다 보니 짧은 해는 벌써 산 너머로 꼴딱 넘어가고 없었다.
바삭바삭!
타닥타닥!
어둑한 산을 타다 보니 마침내 마연곡이 보이고 석암장도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비로소 집, 안심하는 마음이 크게 도드라졌다. 문 앞에서 열없이 앉았던 청지기 할아범이 록흔을 보고 잽싸게 달려왔다.
“도련님 오십니까?”
아수 할아범은 낯선 자를 흘끔 건너보고 록흔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주인의 신신당부와 아기씨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는 절대 주인 연문의 비밀을 발설치 않았다.
“산해 아가씨는요?”
“아직까지 계속 진통만 하고 계십니다.”
그때, 의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일순, 록흔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쁜 일이라도 생기는 걸까? 그도 의원처럼 얼굴을 구겼다.
“산모는 어디 계신가?”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의원이 방으로 들자, 록흔도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아버지도 안 계신 지금, 그가 석암장의 가장이었다. 어깨가 짐짓 무거웠다. 여하튼 지금으로썬 서모에게 아무 일없이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흐음…….”
맥을 짚어 보고, 이불을 떠들어 아래를 살펴보고……. 의원은 기본적인 진찰 후에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떻습니까, 의원 나리?”
양씨 할멈이 그 기색을 살피고 냉큼 물었다.
“자네가 경험이 많다하니 알겠지만 자궁 문이 채 열리지도 않았는데 파수가 되어 버렸네. 내 힘껏 손을 써볼 테니 자네가 거들게. 그리고 어린 도령은 나가 계시오.”
“아니, 난…….”
“그러세요. 도련님은 계시면 마음고생만 하시니까 밖에 계세요.”
“그러면…….”
록흔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열에 달떠 정신없이 신음하는 산해를 보자니 제 할 일이 딱히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히 예를 갖추고 록흔은 방을 나왔다. 그 기척에 아수 할아범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아아아악!”
“으으윽…….”
산해의 비명은 록흔의 피를 말렸다. 그렇게 길고도 지루한 밤은 시작됐다.
“아기씨.”
“왜 그래요, 할아범.”
“우리 아기씨 나시던 밤에도 아연 마님께서 저리 고생을 하셨더랬지요. 그때도 주인님은 안 계셨는데.”
아수는 유일하게 남은 연문의 노복이었다. 연가장이 불타던 그 밤, 심부름 차 이웃 고을에 가 있어 화를 면했다. 그는 참극 후에 이리저리 떠돌다 상전의 소식을 듣고 석암장으로 찾아왔다. 그게 벌써 오 년 전, 록흔은 그를 친할아버지처럼 따르고 의지했다.
“우리 아기씨 참 조그맣고 예쁘셨지요. 갓난아기 같지 않게 피부도 하얗고 그리 쪼글쪼글하지도 않았습니다요.”
소년은 모르는 예전 일이었다. 그래서 그저 웃기만 했다. 보얀 달빛이 앳된 얼굴에 곱다랗게 부서졌다.
‘어머니라…….’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 대해 묻는 건 스스로 정한 금기였다. 어미에 대한 언급만으로 비통해지는 아비라, 다슨 그늘이 없어 불쌍한 이는 그 자식보다는 지아비였다. 그래서 록흔은 스스로 입을 닫고, 깊은 그리움을 접었다.
“할아범, 우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참 고운 분이셨지요. 마음도 따듯하신 분이고. 주인님과 아연 마님은 정말 그림처럼 어울리는 분들이었습니다요. 마님께서 아기씨를 업고 월적요를 불러주시면 아기씨는 그 예쁜 눈을 까막거리다 잠이 들곤 하셨죠.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아기씨가 이렇게 장성하셨으니…….”
“그래요, 나 참 많이 컸지요?”
“마님께서 저 위에서 보고 계실 겁니다. 아주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아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이리 어여쁜 아기씨가 짠하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이 든든했다.
“이 할아범 눈에도 그러니까요.”
마주 보는 눈에도 정이 그득했다.
“할아범, 오래 살아요.”
“그러믄요, 아기씨.”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고통스런 신음 소리에 잠시 옛이야기를 주고받느라 풀린 마음들이 다시 찢겼다.
“아아악!”
“흐으으윽…….”
록흔은 산해 아가씨가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도 날 낳았을 때 저렇게 아프셨을 터. 소년은 자꾸만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
밤은 조금씩 깊어지고 달은 조금씩 사위어 갔다. 구름에 가린 달이 칙칙하게 보였다.
‘달도 아픈 걸까? 산해 아가씨만큼이나?’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록흔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디 가시게요?”
“마연곡 입구까지 내려갔다 올게요. 아버지 오시는 건 그 등성이에서 제일 잘 보일 테니까요.”
“달도 구름에 가리고 이렇게 어둑한데 그냥 예서 기다리시죠.”
“불안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요.”
“그럼 같이 가십시다. 아기씨 혼자는 못 보내 드립니다.”
“그러든지요.”
두 사람은 횃불을 들고 무한을 맞으러 마연곡으로 내려갔다.
기룩기룩!
밤새가 울었다.
“…….”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한 일도 없으니,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구름 뒤에 숨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해도 뉘 오는 기색은 없었다. 록흔은 슬슬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나뭇가지만 괜히 비틀었다.
따닥!
삭정이는 호되게 허리가 꺾여서 부러졌다.
빼애애액.
그때였다. 커다란 날짐승 하나가 월광을 날렵히 벴다.
“아기씨, 저기!”
“마영!”
록흔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귀 밝은 새는 주인의 음성을 좇아 곤두박질쳤다.
“록흔아.”
무한이었다. 록흔은 달을 등지고 선 커다란 그림자가 아버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버지!”
“주인님 오십니까?”
높고 험한 곤아산을 달려온 게 분명한데도, 무한은 호흡 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록흔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밤공기가 찬데 예까지 무엇하러 나왔느냐? 산해는…….”
“아직이요. 정말 다행이에요. 늦지 않게 오셔서…….”
“들어가자. 너도 할아범도 감모 걸리겠다.”
록흔은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삿되게 상상하던 것들이 이제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어깨가 전에 없이 넓어 보였다. 오래전, 아버지를 다시 만났던 날처럼 록흔은 기쁜 마음으로 쫓아갔다. 그들처럼 달님도 석암장에 찾아들었다.
“으으읍…….”
“하악, 하악!”
훤하게 불 밝힌 집에선 간간이 여인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진통은 밤새 계속되었다.
“으애애앵!”
곤아산 으뜸봉우리 사륜봉에 해가 제 얼굴을 내걸었을 때, 연서흔(蓮曙昕)이 태어났다. 그는 무한의 장자였다.
“으아앙!”
팔삭둥이 연서흔은 조그맣고 쪼글쪼글하고 벌건 핏덩이였다. 그러나 세상없이 예쁜 녀석이었다. 달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성급한 놈이지만 다행히도 건강했다.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체온을 제외하면 산해도 그다지 큰 이상은 없는 듯했다. 록흔은 산모와 아기 둘 다 무사한 것이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산해 아가씨, 그렇게도…….’
기진하여 잠이 들었건만 산해는 지아비의 손만은 꼭 쥐고 있었다. 함께 산고를 치러 무한 역시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벽에 기대앉은 참, 아무래도 얕은 잠에 빠진 듯했다.
“훗.”
정겨운 모습이라 입귀가 절로 들렸다. 록흔은 씩 웃다가 아우의 고사리 손을 살며시 쥐어 보았다. 아기는 고물거리고 따뜻하고 말랑했다. 그는 부모 대신 온전하게 차지하고서 오래도록 보듬었다.
“배고프구나, 너.”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 젖을 찾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줄 것이 없었다. 록흔이 미음이라도 쑤어서 먹여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데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들어온 이는 잠시 눈을 붙이겠다 자리를 떴던 의원이었다.
“어떠신가요, 좀 열이 내리셨나?”
의원은 염소수염을 바르르 떨며 좌정하고는 산해의 맥을 짚었다.
“이 열이 하루가 지나도 계속되면 안 될 터인데…….”
그 때 잠든 줄만 알았던 무한이 눈을 뜨고 인사치레를 했다.
“의원께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왕에 올라오신 길 하루 더 묵어 가셨으면 합니다만,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청하지 않으셔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찾아오기도 쉽지 않은 길인데 산모가 괜찮은 것을 보고 내려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말이오. 더군다나 열이 좀 높기도 하고……. 산욕열의 징후가 있소이다.”
머리맡에서 어떠한 염려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산해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맥을 놓은 것인지……. 잔약한 숨소리조차 없이 그녀는 깊이 잤다.
걱정하던 사태는 기어이 벌어져, 산해의 비정상적인 체온은 하루가 지나도 내려가지 않았다. 양씨 할멈이 해열에 좋다는 약재를 정성껏 달여 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산욕열이 틀림없는 것 같으오만…….”
의원은 산부의 맥을 짚고 열 오른 이마를 만져 보고는 혀를 찼다.
“산욕열이라면…….”
무한의 목소리 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산욕열이라 함은 분만 시에 생긴 상처로 독이 들어가 혈이 탁해지고 비장이 부어올라 오한 전율을 동반한 고열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지요. 중증이면 의식까지 혼탁해집니다.”
“집사람 상태가 그렇게 안 좋습니까?”
대답 대신 노의원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건 안심되는 미소였다.
“다행히 열이 내리면 좋겠지만……. 약은 잘 써 볼 테니 두고 봅시다. 산모가 젊으니 그리 걱정 안 하셔도 되오. 이 낫세 먹도록 사람 목숨에 장담해 본 적 없으나, 성심껏 치병하겠소.”
“부탁드리겠소.”
무한은 어린 아내를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예, 성심껏 하리다.”
곱다란 처녀는 그저 남의 꽃이었다. 그 또래에 사랑한 이를 겹쳐 보았을 뿐. 다가설 이유도 내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때 무한에겐 겨울의 칼바람만 있어 모든 것이 선득하기만 했다.
“부디…….”
자신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 잃은 아내에 대한 애틋함…… 그게 다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입으로써 표현하지 않았으되 분명 사랑이었다. 봄 나무 같은 어린 안해는 겨울 같은 지아비에 깃들어, 초토화된 그 심장에 새로운 나무를 돋게 했다.
“그렇게 비장한 눈 할 것까지야……. 바깥양반이 먼저 쓰러지겠소. 산모 간병 잘하려면 자기 조섭부터 잘 해야지. 이게 뭐요? 아내가 드러누웠다고 눈이 퀭해져서는……. 눈 좀 붙이시오.”
그도 그럴 것이, 무한은 꼬박 이틀을 자지 않고 산해 곁만 지키고 있었다.
“…….”
무한은 두려웠다. 두 번씩이나 아내를 잃을 순 없었다. 아연처럼 산해까지 허망하게 보내선 안 될 일. 그는 아무 말 없이 이만 사리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