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72
연록흔 – 72화
해 짧은 산촌이라 삼요당은 벌써 어슬녘이었다. 곧 묵천이 세상을 덮을 터. 록흔은 백련이 가득한 못을 바라보았다. 먹잠자리 한 놈이 뱅뱅 돌다 설백빛 꽃잎에서 깃을 접었다. 물에 잠긴 햇발이 유난스레 붉어, 연잎조차 본디 지닌 푸름을 잃었다. 선홍은 그녀의 연빛 눈동자에도 스몄다. 어느 순간, 산꼭대기를 타고 내려온 바람에 살쩍이 연하게 날았다.
“대답키 어렵거든.”
사늘한 음성에 높이 매달린 초상들이 다르르 떨었다. 그러나 가륜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파동도 없었다.
“대신 말해 주랴.”
이내, 사천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거듭 울며 루국이 보낸 자수만 쓸던 그였다. 록흔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서 낙조가 꼬리를 길게 끄셨다.
“잃은 좌수 때문이겠지.”
순간, 록흔은 보았다.
닥, 닥닥.
없어진 손 대신 덧댄 갈고리가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사천과는 무관했다. 놈은 저 혼자 파득대며 날뛰고 있었다. 록흔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목 아래가 없는 화사의 왼팔을 움켜잡았다. 심장이 불수의로 뛰듯, 그 팔 역시 되는대로 마구 팔딱였다.
“어디선가 멀쩡하군.”
“그…….”
사천은 부정치 못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정제되지 않은 공포였다. 쀼죽쀼죽 뾰족뾰족, 두려움은 실핏줄 도드라진 새로 날카롭게 꿰져 나왔다.
“언화사께서 예서 눈 감고 계신 새, 왼손은 몹시 번다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록흔은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훔켜쥔 손끝으로 맥이 느껴졌다. 그녀는 입귀를 우그리며 잡은 것을 바투 비틀었다. 그래도 놈은 또 다른 생명인 양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루국이 걱정한 건 없어진 왼손이군요.”
“누가 훔쳤나?”
“언화사는 왼손잡이일 테고.”
“수신법도 함께 앗겼군.”
둘이 번갈아 좨쳐 사천은 눈이 몹시 흔들렸다.
“네 놈이 우는 새,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긴다.”
록흔은 눈귀를 날카롭게 틀었다. 삼오당에 들기 전, 가륜이 분명 인신매매 비듬한 것이라 했었다. 뭔가 덩어리가 큰 것 같아 그녀로선 감이 좋잖았다.
“저, 저는…… 그때…….”
사천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절망보다도 원망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루국에게 상처를 주고픈……, 그래서 손목을 그렇게 모질게 잘랐습니다.”
일단 시작된 것은 거침이 없었다. 사천이 그간의 것을 품는 것을 가륜은 막지 않았다. 록흔 역시 잔잔한 눈으로 가만 서서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광기에 사로잡힌 그 순간, 사천에게는 원념만이 전부였다. 절단되자마자 왼손은 바닥을 뒹굴고 튀어 올랐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해 피는 질펀하게 흘렀으나, 통증 따윈 없었다. 루국에게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생각만 불뚝 돋아 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녀가 내쫓긴 뒤, 견습으로 부리던 녀석이 팔을 싸맸다. 하룻밤 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늦게 그가 깨어났을 때, 제자 놈은 달아나 없고 잘린 것 또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저릿하고 매양 아려, 왼손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발작하듯 예고 없이 왼팔이 지랄발광을 하고 나면, 무언가가 그의 화지에 남았다. 분명, 사천이 오른손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길 수십 차례, 방 하나가 그득 찼다.
“어딘가?”
사천이 비치적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뚝대는 발걸음을 가륜이 먼저 따라나섰다. 이내 문 하나가 크게 열리고, 그 안에서 소스치도록 차가운 기가 ‘새에’ 하고 빠져나왔다. 록흔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천장에 매달린 선남선녀들의 초상이었다. 그것들은 각각 안개라도 둘러 입은 듯 아슴아슴했다. 그리고 뒤이어 어느 수향의 풍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저건……, 놈이 그린 게 초상이었군요.”
정녕 놀라는 소리였다. 록흔은 눈 곁으로 사천을 힐긋 보았다. 암흑의 칠 년이란 꾸밈없는 진실이었다.
“벽의 산수는?”
“꿈에서 보아 그렸습니다.”
큼직한 방 안, 높다란 천장까지 네 벽이 모두 그림이었다. 아득하게 안개 걸린 운하부터 아취 있게 쌓아 올린 누각까지, 심지어는 뱃전의 장사치 하나마저도 몹시 세세했다.
“풍물로 보아 한주 같습니다만.”
록흔은 책에서 읽고 본 바로 어림짐작했다. 남향 한주는 그녀가 부접 일을 하면서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한주 국예성 운하다. 십 수 해 전에 지난 바 있지.”
세 잃은 동궁 시절이었던가? 담담히 말하건만, 록흔은 가륜에게서 뵈지도 않는 그늘을 느꼈다. 그녀는 부지간에 입술을 감물었다.
“언사천, 꿈 이야기를 해봐라.”
“저 성의 거리를 지나면 화각이 으리으리하게 올라선 대가가 보이고, 이어 약탕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좀 더 멀리 나아가면 흰옷 입는 자들이 머릴 풀고 곡을 하며……, 맨 끝에서는 제 손을 훔친 도적이 이를 드러내고 웃습니다.”
가륜이 손을 뻗어 그림 한 장을 떼어냈다. 그리고 잠시 훑어보더니 바로 록흔에게 넘겼다.
“규언.”
록흔은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글자는 각각 좌우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림의 뒤를 보는 것처럼 모든 선이 흐렸다. 록흔은 화지를 뒤집었다. 다른 편은 온전한 백지, 어떠한 선도 일절 비춰 보이지 않았다.
“후면인가?”
“예. 제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사천이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그건, 저 너머에서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사천, 호랑이 새끼를 거뒀군.”
가륜이 사금파리인 양 날캄하게 웃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그저 잘린 손일진대…….”
사천이 절규했다. 미려한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범수는 아니지.”
가륜이 고개를 젖혔다. 신간에 묶인 하얀 매듭인 양 그림들이 스산하게 나풀댔다. 그것은 창백하여 서럽도록 차가운 초상들이었다. 그는 각각을 날파랍게 살폈다. 머리 위의 흩날림은 당집의 것과 같았다.
“옛적, 북방에선 무녀들이 젖먹이를 가뒀습니다.”
록흔은 측벽으로 다가서 어느 어미 등에 업힌 아이를 바라보았다.
“반드시 여아로. 납치한 어린것을 잔독하게 굶겨, 아사 직전까지 몰았다 합니다.”
사천이 록흔을 향해 몸을 틀었다. 벌겋게 일어선 눈은 오로지 한곳만을 보았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 젖어미를 데려와 보얗게 부푼 가슴을 풀어 놓으면……, 아이에게 무엇이 뵐까요?”
파닷파닷!
종이끼리 부스댔다. 서로 치고 닿는 소리가 끔찍하게 새됐다.
“아기는 젖 달라 작은 손을 내밉니다, 그때.”
괴괴한 바람 속에서 록흔의 목소리만 크게 돋았다.
“무녀가 날 선 단도로 맨 앞으로 뻗은 손가락을 자릅니다.”
사천이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상황은 다르면서 같았다. 원념이 모인 것, 손이나 손가락이나 매한가지였다. 더불어 아이도 그도 원하는 것은 채 얻지 못했다.
“단지된 것을 신체로 삼아, 무녀는 아이의 귀를 부립니다. 이를 태자귀 또는 명도라고 하지요.”
왼손이 살아 날뛰는 건, 순전히 제 탓이었다. 또한 아름다움을 그림에 온전히 담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이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천은 나달해진 눈빛으로 높다란 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요컨대, 탐하는 것. 순수할수록 두려운 법이다.”
가륜이 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운하의 어느 지점을 손으로 짚었다. 그곳엔 살구꽃이 허옇게 만개했다.
“언사천, 길을 놓아라.”
“예에?”
“너는 왼손 하나 잃었을 테지만, 저 너머에선 네 악몽이 현실이다. 칠 년 동안 그저 울기만 하진 않았을 터.”
사천은 눈을 지릅떴다. 눈앞의 사내는 볼수록 두려웠다. 차분히 다박다박 일러주는 다른 이도 어렵지만, 높다란 저 사내와는 같지 않았다. 그에겐 동행과 달리 다슨 곁이 일호도 없었다.
“아직 완전치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온전한 게 얼마나 되려고. 시작해라.”
명했으니 행하라, 안어는 명확했다. 사천은 그대로 짓이겨졌다.
“예…….”
즉시 화구가 펼쳐졌다. 그 새, 록흔은 그림을 다시 제자리에 되돌렸다. 사천이 현재 유일하게 지닌 손으로 붓을 잡았다. 그리고 가륜이 가리킨 지점에 첫 점을 찍었다.
“돌이킬 방법은?”
가륜이 묻자, 사천이 눈귀를 떨었다. 그러나 손에는 실수가 없어 말 두 필이 물 흐르듯 그려졌다. 놈들은 한낮부터 삼요당의 뜰에 매어진 월영과 혈루마였다.
“강구했으나, 이때껏 두려워만 했습니다.”
입술의 떨림이 바로 두려움이었다. 사천은 고개를 떨구고 눈을 바로 들지 못했다.
“잘못되면 루국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까?”
“예, 영영 잃을까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사천은 이제 록흔을 그렸다. 운하 곁에서 푸른 옷자락이 연하게 스쳐 날았다.
“여인은 산 전체를 밝히려 하는데, 네 놈은 사내로서 외면밖에 한 게 없군.”
가륜이 혈룡검을 훔켜잡았다. 맵찬 기세에 사천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나 붓을 놓지는 않았다.
사아아양!
검성이 야멸치게 푸르렀다. 혈룡이 포효하매, 록흔의 드맑은 눈에 붉은 빛이 깊게 스쳤다.
“언사천, 무엇이 가한가?”
가륜이 물었을 땐, 이미 그림 안에 그가 남은 뒤였다. 서릿발 같은 하문에 사천은 고개를 깊다랗게 수그렸다.
“말묵하여 백지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좋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지.”
“그, 그것은!”
“영영 못한다, 울 테냐?”
“…….”
가륜이 서릿발처럼 좨치매, 사천은 더욱 오그라들었다. 록흔이 가까이 다가서 화사의 어깨를 짚었다. 다슨 손길에 수그렸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무하, 구연을 내게 주겠소?’
예, 기꺼이요.
‘바라보는 것 외엔 하지 못하는 사내라도?’
예, 상효.
‘그러면 내 향연도?’
온 마음으로요.
‘우리 꼭, 가연을 맺는 거요.’
향연, 때론 부처의 손을 닮아 불수감으로도 불리는 사내가 여인에게 정표로 주는 상깃한 과실. 구연, 처녀가 그 답으로 건네는 감귤. 벌써 수십 번을 답했으되 대답하는 마음은 늘 향기로웠다.
‘무하, 당신에게 보여주고픈 게 많아…….’
상효, 나도 그래요.
‘해주고픈 것도.’
으응.
‘내 품에 보듬어…….’
꿈결이노라, 매번 황홀히 미소 짓네.
‘눈물일랑 닦아 주리다.’
예, 그래요.
트륵!
문 밀리는 소리가 거칠었다.
“어떤 놈이 일을 이딴 식으로 했어?”
그악스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제 불찰입니다. 한 번만 용서를…….”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다만 숨을 죽일 뿐. 여기 있으되, 여기 있지 않으니.
“주인님 오시기 전에 어서 되돌려!”
“예, 예에!”
목구멍 안에서 뱅뱅 돌 뿐, 울음은 밖으로 나오지 않을세라.
“어서 서둘러!”
재촉하는 소리 드높아, 눈물만 섧게 흘린다.
칠 년이 과연 존재했던 것인가? 사천은 살포시 미소 짓는 여인을 가만 응시했다. 꿈에서는 늘 보았으되, 제 비겁함이 역해 차마 마주 대할 수가 없었다. 잘린 손도 썩지 않더니, 부러 감긴 눈도 멀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뵈던 것은 잠시, 늘 뜨고 있던 듯 지금은 명료했다. 빌어먹게도 특출 난 몸뚱이였다.
“언화사.”
그저 부르는 소리, 독촉은 없었다. 그래서 사천은 붓을 쥘 수 있었다.
“시점인가, 종점인가?”
“그린 것과 거꾸로 나가야 합니다.”
록흔은 눈을 가늘였다. 작금, 그녀는 언사천에 가륜을 겹쳐 보았다. 기억에 의지해 필단으로 연을 피웠듯, 그는 화사의 눈으로 추이를 살폈다. 그 시선이 몹시 날캄했다.
“마지막 획, 갈무리했던 그 자리부터…….”
머릿속으로는 수백, 수천 번도 더 해본 일이었다. 지난 세월 사천은 기억을 더듬어 루국을 그렸던 날을 떠올리고, 허공에 바닥에 헛손질을 수없이 해가며 지우고 또 지웠다.
스윽.
처음에 사천이 쥔 붓은 먹물 한 점 없이 하얬다.
슥.
흐름은 재빨라 되레 느린 듯했다. 붓이 닿은 자국부터 먹물이 바랬다.
시으윽.
루국의 눈동자가 허옇게 비어진 만큼 필단은 검어졌다. 동공을 채운 갈매빛 역시 바랬다. 본시 묵화라 색 없이 먹의 농담만으로 그렸을 터. 그녀의 곱다움을 빨아들여 염료로도 표현키 어려운 색들이 저절로 생긴 듯싶었다.
타악!
눈동자, 입술, 코, 눈시울, 눈썹, 손가락, 입성, 머리칼, 목, 귀, 얼굴의 윤곽선……. 선이 사라지니 입술의 핏기도 뺨의 홍조도 무색으로 돌아갔다. 화지가 비워지는 만큼 붓털은 어두워졌다. 필관 역시 검어지고 이윽고는 사천의 손마저 깜장물이 짙게 들었다. 가륜이 일련의 동작을 순서를 미동 없이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록흔이 관찰한 바로는 눈 깜빡임도 없었다.
“이제…….”
그림 그리려 막 펼친 화지처럼, 루국의 초상은 깨끗했다. 사천이 땀이 뚝뚝 돋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몸은 지친 듯싶으나 그 눈은 몹시 맑았다.
“확인은 네 몫이지.”
루국이 젊음을 되찾았을 수도 있고, 초상이 비어진 것처럼 소멸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륜의 말처럼 찾아가 살피는 것은 사천이 해야 옳았다.
“언화사, 루국이 먼저 내민 손입니다.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록흔은 그리 말하고 무심결에 가륜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비긋이 웃었다. 네가 잡을 손이나 잘 챙겨라. 눈으로써 하는 말에 그녀는 다뿍 굳어 버렸다.
“규언이란 승냥이도 화법이 이와 같겠군.”
“예. 제게서 배웠으니 같습니다.”
“그것보다 네 왼손을 지녔잖나.”
여전히 혈룡은 발검된 채였다. 가륜이 한곳을 가리키니, 놈이 핏빛으로 우짖었다. 사천의 두 뺨에 칼빛이 형형히 어렸다.
“언화사께선 이제 우수를 쓰십니다만, 어느 쪽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천이 되물으매, 가륜이 록흔 대신 입을 열었다.
“이를테면, 왼손잡이의 기억을 지닌 오른손잡인가, 아니면 온전한 오른손잡인가?”
“그건……!”
갑작스레 사천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거슬러 올라가며 그림을 지웠다. 이제는 그저 오른손잡이, 왼손의 버릇을 잊고 손 가는 대로 나간 곳이 분명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루국! 안 돼!”
뭐에 씐 듯, 사천이 눈을 뒤집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위허위 나가는 모습이 실성하기 직전이었다. 탁자에 남은 것은 묵색 붓과 빈 화지가 전부였다.
“폐하, 언사천을 뒤쫓아야…….”
“걱정 마라. 둘의 해후에 방해만 될 터.”
가륜이 붓을 들어 물에 담갔다. 이내 투명하던 것이 진묵으로 변했다. 그리고 호는 다시 허예졌다. 붓대도 백설로 돌아갔다.
“지금은 앞으로 나갈 때다.”
“만에 하나 루국이 잘못 되었다면요?”
“화령의 피가 섞였으니, 인간처럼 약하지는 않다.”
가륜이 상량하게 잘라 말했다.
“하오나…….”
“록흔, 어느 손을 주로 쓰나?”
“저……, 오른손입니다만.”
번한 것을 묻기에 록흔 역시 번한 답을 했다. 그러나 오래전, 그녀는 혜덕 스님 몰래 왼손을 쓰곤 했었다.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었을 때, 더 많이 잘 하고자 하는 욕심이 하나 가득 했을 때였다. 그러나 결국은 들켜 오른손잡이로 남았다.
“아닐 텐데.”
가륜이 씩 웃으며 검파를 움켜잡았다.
파악!
철거덕!
혈룡검이 벽에 야멸치게 박혔다.
시아아앙!
붉은 빛이 두껍다래졌다.
티이익!
벽이 무르게 찢겼다.
“폐하, 저것은…….”
벌써부터 살구꽃 향이 상깃했다.
“길도 열렸으니, 갈까?”
“예, 폐하.”
사아악.
벽이 수렁인 듯 검신이 점점 깊게 박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파장식까지 오롯이 저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검을 잡은 이도, 그에게 손이 잡힌 이도 부드럽게 안으로 흘렀다.
사락.
검은 깁도, 푸른 깁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시으윽.
혈룡이 뚫은 길이 점차 바스러졌다.
“…….”
그림은 그림, 벽은 벽. 아무 일 없던 듯 붉은 빛은 사라졌다.
타랏!
운하 양옆으로 지천으로 핀 살구꽃, 그 곁을 지나는 말과 사람. 새로 더해진 그림에 잠시 광채가 어렸다 사라졌다.
목백일홍 붉은 꽃이 사늑하게 흔들렸다. 살빛 고운 살구가 나무마다 그득했다.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이 푸르렀다. 풍광은 사천이 그린 벽화와 거의 일치했다. 다만 계절이 지닌 색이 다소 달라졌을 뿐. 운하 건너의 벅적하고 풍족한 사람살이는 그대로였다.
“운하 너머 운하, 누각 건너 누각.”
가륜이 몹시 낮게 읊조렸다.
“열여섯, 황홀한 지옥이었던가?”
록흔은 왜냐 묻지 않았다. 그저 알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일렁대는 눈으로 가륜을 비껴 보았다. 화사가 그린 듯 사위는 알락달락했다.
“자, 뭣부터 시작할까?”
가륜이 웃었다. 배롱나무 붉은 그늘 아래서, 그다운 빛접음으로.
“사박스러운 화사놈부터 찾아야지요.”
록흔은 마음을 숨기는 것엔 이골이 나 있었다. 눈 안의 잗다란 떨림이야 바로 감추고 결바르게 대답했다.
“쉴 줄 모른다 타박하더니, 너야말로 만만찮다. 어떠냐, 시장하지 않나?”
“폐하, 송괴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
가륜이 입귀를 상그레 치올리는가 싶더니, 바로 록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에 황제를 단독으로 모시고 나와 제대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잠시 바랬다. 어연번듯하게 빛나는 눈동자 안에 그녀는 깊게 담겼다.
“부러질라.”
입귀에 눈귀에 미소가 더 깊다래졌다.
“폐하, 면목 없습니다.”
“뉘가 들으면, 연중랑장께서 더 번다할 질 텐데.”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운하의 기슭에 흐드러진 수목들뿐. 금빛 살구는 보르르, 도홍빛 복숭아는 발그레, 그 과실수 새로 껴든 나무에서는 주황빛 감귤이 곱게 익었다. 검푸른 밤이라 그 색들이 더 새뜻하게 다가왔다. 실바람에 달금한 향이 물씬 묻어났다. 상깃한 그늘 밑에서 록흔은 가륜 안에 있었다.
타닥.
푸릇한 꼭지 하나가 똑 떨어졌다.
“자.”
동그랗고 매끈하나 약간은 오돌토돌한 열매, 귤빛이 록흔의 손에 가득 찼다.
“차마…….”
록흔이 연하게 내민 말에 가륜은 눈귀를 조프렸다. 그녀는 한 손 바듯하게 쥔 것만 가만 보고 있었다. 보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살폿 어린 것은 홍조가 분명했다.
“아까워서 먹지는 못할 거 같아요.”
어연간에 제가 연이 된 줄도 모르고 록흔이 속삭였다. 딱히 가륜이 들으라 하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저리 언뜻 비치는 고움조차도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덮듯이 잡았다.
“무딘 사내로군. 네겐 녹읍만 주었으니.”
감귤 잡은 보얀 손이 겹겹이 싸였다.
“폐하, 아니…….”
“아니긴, 지환 하나 준 게 없잖나.”
“그런 것, 바라지 않습니다.”
록흔은 가락지 따위 원치 않았다. 가륜에게 그 무엇이라 일컬어지지 않아도, 곁에 있으면 족했다. 지키고 좇으며 살고픈, 욕심이라면 그게 전부였다.
“욕심도 내어 버릇하면 충분히 자란다.”
“예, 하지만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명이다. 욕심 사나워져라.”
가륜이 록흔을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그의 시선에 묶인 채였다.
“우선, 식욕부터.”
향기로운 그늘을 벗어나니 손을 찾아다니는 배가 보였다. 이름하야 과편선, 선체가 반으로 자른 외처럼 생겼다. 선원이 둘을 보더니 고물의 방향타를 높이고 또 낮췄다. 가람배는 점점 방향을 틀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손님, 곧 가겠습니다.”
밤이나 어둡지도 적막하지도 않았다. 운하 옆 대로를 따라 높다랗게 솟은 유리구 안에서 촛불이 야울야울 타고, 불을 잔뜩 밝힌 화선들이 물결 따라 흘러 다녔다. 대나무로 소나무로 지어 올린 여러 층의 주택은 저마다의 빛으로 야색을 더했다. 사람들은 노천찻집에서 한 잔의 이야기를 나누고, 심지어 아이들도 대낮인 양 나와 놀았다. 야경은 왁자하고 복작댔다.
“볼 만한가?”
“예. 풍류객이라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지나쳐야 한다는 말, 허언이 아닌 듯합니다.”
과편선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와 제 몸을 운하 가장자리에 댔다. 놈은 사람 둘과 말 두 필을 태우고 다시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다. 휘황하게 밝은 배라 부나비 몇이 부스대며 따랐다.
“손님, 무엇으로 올릴까요?”
선체는 넓적하고 길었다. 그리고 이층으로 올린 선실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주목적이 식사를 하기 위함, 구수한 음식 내가 사방에서 배어 나왔다.
“폐…….”
록흔은 혀끝으로 나머지 음을 사리며 가륜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런 곳에서 어찌, 저 건너 객잔이라도 찾으심이…….”
고물에서 생선을 다듬고 고기를 치며, 이물에서는 쌀을 일어 밥을 지었다. 배에서 구하는 식수라야 뭍과는 같지 않을 터, 선실은 화려하나 찬을 차리는 것은 썩 깨끔하지 않았다.
“너, 내가 샌님처럼 마른자리만 찾는다 여겼나?”
가륜이 빈자리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켰다.
“아옵니다, 하지만 강물을 퍼 올려 밥을 지으니.”
록흔이 앉으며 아미를 찌푸리는 걸, 가륜은 부드럽게 보았다. 뉘를 위함인지 아는 탓에 입귀마저 유하게 풀어졌다.
“그골그골 삶을 꾸리는 건 엇비슷하다, 뱃속에 들어가면 다 같지. 여기 하엽반이 되나?”
“예, 손님. 그에 따른 식선이 정해졌는데, 어찌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륜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뉘가 또 부르는지 차 두 잔을 내주고는 휑하니 이물 쪽으로 달려갔다.
“어떠냐?”
배는 나무그늘에서 벗어나 번화가의 한 중심을 향했다. 앞으로 나갈수록 운하가 푸르게 일렁이고, 양옆으로 벌어진 호사로운 밤빛이 눈 곁을 스쳤다.
“아름답긴 하옵니다, 다만.”
집들은 높다랗고 하나같이 가깝게 붙어 서 있었다. 들보가 닿고 처마가 이어져 맵자하게 어울린 모습이 썩 고우나 록흔에게는 매우 위험해 보였다. 불이라도 난다면 걷잡을 수 없을 터. 삽시간에 재로 남을 듯했다.
“그래, 국예성에서 큰 불이 났었다.”
가륜이 한 지점을 보았다. 록흔은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화윤반 말씀입니까?”
홍색 천지인 객잔 옆에는 위혼(慰魂)이라 새겨진 비가 있었다. 화강암 덩이는 멀리서도 뵐만큼 커다랬다.
“음. 예부터 국예의 밀집된 주택지구엔 이러저러 잡다한 불이 많았다. 대부분 실화였고, 방화라 해도 우발적인 것이라 큰 피해 없이 잡혔지.”
“이곳은 감화단 활동이 활발하다 들었습니다.”
성 곳곳에 높다랗게 솟은 탑이 있었다. 야간엔 등불로, 주간엔 깃발로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리라. 록흔은 망루를 올려 봤다. 지금 역시 불구슬인 양 등화가 동동 떠 있었다.
“그랬지. 하지만 조직적인 방화엔 그들 역시 맥을 못 췄다. 십 년 전, 국예의 이할이 전소했으니까. 최초의 발화지점은 화윤반, 바로 저기였다.”
가륜이 입귀를 자그시 틀었다. 그 때, 예의 사내가 커다란 쟁반에 이것저것 수북이 담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손님, 하엽반이 나왔습니다.”
만드는 것은 비록 깔끔치 않았어도, 식선은 맛깔스레 보였다. 사내가 올망졸망 차려 놓으니 순식간에 식탁이 가득 찼다. 대소쿠리에 소담하게 담긴 것은 연잎으로 싼 밥이었다. 록흔은 새파랗게 쪄진 것을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펼쳤다. 푸르싱싱한 향을 헤치고 보니, 동근 은행이며 울퉁불퉁한 호두며 길쭉한 잣이며 오동통한 밤이며 섞인 게 많았다. 찹쌀로 져먹는 게 보통인데 군데군데 연붉은빛이 껴 들어가 더 먹음직스러웠다.
“손님, 홍미는 저희 국예의 특산물입니다. 일명, 붉은 연꽃 씨앗 쌀이라고 합지요.”
“그렇군요, 잘 먹겠소.”
“필요하신 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사내는 싹싹하게 웃고는 지체 없이 자리를 비켰다.
“그 정도 규모면 집 잃은 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상자도 상당했을 터인데요.”
록흔은 말하면서 가륜 앞으로 푸지게 살찐 붕어를 밀어 놓았다. 그리고 푸성귀며 나물 볶은 것도 같이 옮겼다.
“쉰넷이 졌다, 대부분이 어린애와 노인들이었지.”
“마혜황후 소행이었습니까?”
이미 가륜이 꺼낸 이야기였다. 오래 품은 것은 언젠가는 쏟아내야 옳았다. 지금이 바로 그때, 록흔은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
“동궁이 화윤반에 있다는 밀정의 보고에 흑리들이 움직였지. 마혜 입장에선 골칫거리 따위 재로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가륜이 연잎으로 싼 것을 풀었다. 잔뜩 가늘인 눈귀가 몹시 찼다.
“오보였다, 동궁은 거기 없었거든.”
“탐욕에 사람이 먹히면 슬픈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록흔은 밥에 섞인 가장 큰 은행을 골라내 가륜의 하엽반 위에 얹었다. 그리고 토실하게 살 오른 밤도 건져 놓았다.
“그러한 일은 근원을 따져야 옳습니다. 뉘 때문이라는 원망은 참상을 행한 자에게만 떨어져야 하고요.”
민초 따윈 밟혀도 되며, 이 산하 내 것이니 함부로 써도 된다는 이였다면. 록흔은 가륜을 응시했다. 연심은 품었더라도 충심을 품지는 않았을 터였다. 주군이든 정인이든 그는 그녀에겐 넘쳤다. 감정이 흐르는 대로 새는 대로, 미소는 갈쌍했다.
“연한 녀석.”
가륜이 입귀를 쓰게 비틀었다. 그러나 상량한 눈빛은 곧 다스하게 얼녹았다.
“다 건져주고, 맨밥을 먹을 테냐?”
록흔은 말없이 상그레 웃기만 했다. 곱다란 그 뺨에 볼우물이 하얗게 팼다.
“록흔, 부접들도 이리 챙기나?”
“아닙니다. 외려 전 받는 쪽입니다.”
“내 보기에도 화기애애하더군.”
“폐하께서 패를 내리셨을 땐 일이 하나 늘었거니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혈육이 는 듯합니다.”
“사람도 일도 기껍다?”
“예.”
록흔이 입시울을 늘리며 곱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가륜은 눈귀가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