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73
73화 귀환(3)
“판단··· 말입니까?”
소피아는 눈을 깜빡였다.
던전이나 이권에 관련된 조건을 내걸 것으로 생각했는데. 현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방금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설마 주현우 님께서 이번 일에 대해 요구하실 조건은 그것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그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도.
믿어야만 알렉세이 로마노프는 물론이고. 베헤모스 토벌까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가 더 남았다.
“소피아 님이 제안하신 아르카임 던전의 최초 공략 보상에 대해서 만큼은 확실하게 선을 그어두고 싶습니다.”
“비겁하게 일이 끝난 이후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제 자신의 명예는 물론이고. 전대 창성이자 가주셨던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소피아 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로마노프 가문 전체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아르카임 던전이 베헤모스라는 거대 마족이라는 것이 드러난 후.
계약은 던전 공략권과 그 보상에 한정된 약속이었을 뿐이라고. 손바닥을 뒤집어 버리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올 수도 있을 테니까.
“그냥 만일을 대비하고 싶을 뿐입니다.”
“만일의 경우라고 하시면?”
“벌써 30년 가까이 공략법이나 코덱스가 발견되지 않은 미공략 던전인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겠죠.”
“그건···.”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소피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씀입니다.”
과연, 바벨의 최초 공략을 성공한 비법도. 저렇게 한계를 두지 않는 사고방식에 있는 게 아닐까.
소피아의 추측과는 달리···.
현우의 요구는 예상 때문이 아니었다.
아르카임 던전이 베헤모스라는 거대 마족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
그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미리 두는 한 수일뿐이었다.
“공략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와 상관없이. 이번 아르카임 공략대가 손에 넣게 되는 모든 보상을 이쪽으로 넘겨준다는 명확한 계약서를 작성해주시죠.”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아르카임 공략에 필요한 물자를 서류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반입 허가가 필요한 물건들이 꽤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반입 허가?
조금은 의아했지만 특별히 문제될 물건을 반입하겠다곤 하지 않겠지. 그녀가 아는 주현우는 그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현우가 정리해서 전달한 반입 물품 목록을 보고. 소피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제삼 세계의 전쟁에서나 쓰일법한. 투박한 이전 세대의 마도공학 공성병기들은 물론이고.
마나스톤을 코어로 사용하는 폭탄을 비롯하여.
흔히 1세대 대마족 화기라 불렸던 천무그룹의 마도 화포 신기전까지.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건가 싶은 물자 목록이었다.
“주현우 님···.”
소피아는 입을 우물거렸다.
물어봐야 할지를 고민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가 어려웠기에 그녀는 실례를 무릅쓰고 입을 뗐다.
“지금 보여주신 목록에는 던전 공략용으로 사용하기 어려워 보이는 물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주현우 님께서는 다른 목적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현재 아르카임 던전 내부에는 전대 가주이자 배신자인 알렉세이가 숨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공성병기들의 용도는···.
‘던전을 박살 내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그런 식의 황당한 상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현우와 다르게 미래를 모르는 소피아로서는 그게 가장 합당한 추측이었다.
“다른 목적이라뇨?”
“이 목록에 있는 공성병기들을 활용해. 아르카임 던전 자체를 박살내서. 배신자 알렉세이를 그대로 그 안에 매몰시켜버릴 계획이라던지···.”
“허.”
그러나 현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잘못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었다.
소피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럼···.”
“지금은 의아하시겠지만, 곧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저희 천무그룹에서 아르카임에 대해 사전에 파악한 정보를 기반으로 정리한 목록이니까요.”
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현우의 말을 믿는 쪽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만약 천무그룹이 진짜 전쟁을 원한다면. 이런 해괴한 수를 취할 리가 없다.
작금의 천무그룹은···.
남은 여섯 유력 가문 중에서 독보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가고 있으니까.
내부 균열으로 앓고 있는 로마노프를 깨부수기 위해. 굳이 잡스러운 수를 사용하지 않아도 간단할 것이다.
“일단 저희 쪽에서 최대한 문제가 없도록 준비해보겠습니다. 저희로서는 가능한 한 빨리 방문해주신다면 좋겠는데···.”
“저도 늦장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알렉세이 로마노프.
소피아에게 들은 정보가 정확하다면. 아르카임으로 숨어든 녀석이 베헤모스를 깨우는 데엔 빨라도 일주일 이상이 더 걸릴 게 확실했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이쪽도 3일 후에 준비를 마치고 출발할 겁니다. 그때까지 문제가 없도록 센스 있게 부탁하겠습니다.”
그게···.
소피아의 로마노프 가문은 물론이고.
본래 베헤모스에게 목숨을 잃게 되어야 할. 수많은 민간인의 유일한 목숨줄이 될 테니까.
***
소피아가 러시아로 돌아간 후.
현우는 잠시 주어진 여유를 이용해.
이번에 새롭게 손에 넣은 혼돈의 성배를 보다 자세히 탐구하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조금 아실 것 같습니까?”
“음, 모르겠는데.”
고개를 젓는 오수진.
그녀는 자존심이 꽤나 상했는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눈빛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얼굴은 젊지만.
저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이 이제 환갑에 거의 도달한 1세대 마법사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나 안 늙었어!”
“···예?”
현우는 꼴깍 침을 삼켰다.
설마 이 적마녀가 독심술에 관련된 마법까지 익혔던 걸까. 적어도 현우가 알기론 그런 마법이나 스킬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모른다고 하니까. 이 늙은이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잘난척이란 잘난척은 다 했던 건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정말?”
“···예.”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 정도는 맞춘 셈이었으나.
아무튼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오수진에게서 고개를 돌려. 현우는 옆에 있는 박광철 장인에게 화제를 돌렸다.
“박광철 씨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겠수다.”
박광철 역시 고개를 저었다.
장인으로는 대한민국을 넘어 이제 아시아 최고의 실력이란 평가가 아깝지 않은 그였지만. 현우가 가져온 신물, 혼돈의 성배는 아무리 살펴봐도 파악하지 못했다.
“일단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아티팩트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겠는데. 그 이상은 내 감정으로도 나오는 정보가 없어서···.”
“그렇군요.”
“인공적인 손길이 안 느껴지는 걸 봐선. 아무래도 던전에서 드롭 된 물건인 듯싶은데. 스킬로도 감정이 불가능한 아티팩트는 또 난생처음 보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박광철.
그는 못내 아쉬운 눈으로 혼돈의 성배를 바라봤다. 그의 옆으로 오수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 같은데. 정말로 이 신물에 게이트나 던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힘이 있긴 한 거야?”
“네크로맨서가 그러더군요.”
백 퍼센트 신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현우는 앞으로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 미래에서 블랙 가문의 행보는 녀석이 제공한 정보에 확실한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미친년을 족쳐보면 될 것 같은데.”
“쉽게 잡혀주겠습니까?”
“뭐, 쉽진 않겠지.”
오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랑 비교될 정도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니까. 그래도 천무그룹의 힘을 동원한다면. 아무리 그 정신 나간 시체애호가라고 해도 오래 도망은 못 다닐 거야.”
“그렇다면 일단은 추적만 붙여두고. 필요한 경우에 잡아들이면 되겠군요. 선택지만 남겨두는 걸로 하죠.”
“우리 귀염둥이가 원한다면야.”
어깨를 으쓱하는 오수진.
그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로마노프 가문으로 간다면서. 또 이 누나만 쏙 본가에 버려놓고. 무슨 재미있는 일을 벌이려고 그러는 걸까?”
“아르카임을 공략할 겁니다.”
“오!”
오수진이 눈을 반짝 빛냈다.
“세계 7대 미공략 던전 중에 하나잖아. 로마노프 가문이 순순히 공략권을 내주진 않았을 텐데?”
“순순히 내주더군요.”
“엥, 진짜루?”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오수진.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찰나. 현우의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혹시 말입니다.”
“응?”
“이런 신물이 세상에 여러 개 존재한다면. 신물끼리 공명하는 것으로 특별한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수진의 눈썹이 불쑥 움직였다.
그녀의 귀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 추측이 맞을 가능성은 높아. 만약에 한 개만 더 있었더라도. 이것저것 시험해볼 만한 조건이 될 텐데.”
“하나만 더 확보할 수 있다면. 이 신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연구가 가능해진다는 말씀이군요.”
“응.”
가슴을 쭉 내밀며 자신하는 오수진.
“이 누님의 실력과 안목이면 당연히 가능한 일이지. 우선 이런 신물이라는 것이 여러 개 존재한다는 가정부터가 증명되어야겠지만···.”
지금은 정도면 충분하다.
아르카임을 공략하고 손에 넣을 최초 공략 보상 역시. 네크로맨서가 이야기한 신물 중에 하나니까.
‘···다니엘 블랙이 노리는 신물의 정체. 그리고 아자토스라는 미지의 존재까지. 전생에서 놓쳤던 정보들이 차례로 손안에 들어오고 있다.’
어쩌면···.
벌써 다니엘 블랙의 발등엔 불이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녀석의 계획의 5년 치는 이미 물거품이 되었을 테니까.
미래는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바뀌고 있다.
***
한편, 로마노프 가문.
거대한 저택의 회의실 내부엔 침묵과 함께 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가주인 소피아 미하일로브나 로마노바.
그녀가 한국에서 용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한 직후. 복잡한 표정으로 호법장로들에게 넘긴 한 장의 서류 때문이었다.
“···허!”
태상호법 드미트리 로마노프.
그는 서류를 보며 끌끌 허를 찼다.
그 역시 오랜 세월 헌터로 활동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런 물건들이 던전 공략에 사용된다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그의 말에 다른 네 명의 호법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정말 드물게도 이번 일에선 다섯 호법의 의견이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천무그룹의 애송이 녀석이 우리 로마노프를 우습게 보고 장난질을 치는 것이 분명하오.”
“음, 천무그룹 녀석들은 아르카임 던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을 텐데. 공성 병기나 마나 폭탄의 반입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가주님. 이번 일은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납득이 가지 않는 요구 아닙니까.”
소피아는 그들의 앞에서 잠시 침묵했다.
약간 격양된 호법들 사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쯤. 드디어 소피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당장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까?”
그녀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확실히 작금의 로마노프 가문은 위태로웠다. 소속된 헌터들은 대거 다른 가문으로 빠져나갔고. 그나마 가문에 충성하던 헌터들과 혈족들 역시 거의 절반으로 나뉘었다.
“지금의 로마노프는···.”
소피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 6대 가문이라고 칭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이제 저희에게 남은 것은 명분과 명예, 그리고 로마노프의 정통성이라는 허울에 불과한 영광뿐이죠.”
“···으음.”
이게 전부 블랙 가문과 손을 잡고 로마노프를 집어삼켰던 알렉세이 로마노프. 그 비열하고 간악한 작자가 벌여놓은 만행 때문이었다.
“벌써 로마노프 내부의 분열은 정부의 귀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 가문의 눈치를 보던 정치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하겠죠.”
“음···.”
수염을 기른 호법이 침음성을 흘렸다.
러시아 정부는 오래전부터 로마노프 가문 자체를 정부의 개로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다.
그게 불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동안은 로마노프 가문의 위세와 세력이. 정부가 운용하는 헌터 부대보다 훨씬 강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와 대등하거나 그 아래일 지도 모른다.
아무리 로마노프가 흔들리고 있다곤 해도. 여전히 가문 회의에 소속된 세계 6대 가문인 만큼. 러시아 정부가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눈뜨고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얼마 전엔 세계 7대 가문의 일원이었던 샤오 가문이 천무그룹의 손에 멸문하기도 했으니.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로마노프 가문엔 돌파구가 필요하다.
“배신자 알렉세이의 숨통을 끊고. 아르카임을 문제없이 공략해낸다면. 우리 로마노프 가문의 위신은 흔들림 없이 공고해질 겁니다.”
한 마디로 일거양득.
그러나 절대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되는 마지막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천무그룹 측의 요구는 수용합니다.”
다만···.
소피아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역시 아르카임 내부로 진입해.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배신자 알렉세이를 확보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십시오.”
***
‘아마 로마노프 가문 측은···.’
아르카임 내부로 돌입할 준비에 더욱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그들의 제1순위 목적은 어디까지나 배신자 알렉세이의 확보일 테니. 장비부터 전술까지 모두 내부의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상정하고 대비하겠지.
‘하지만 그건 오히려 독이다.’
아르카임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들이 던전 내부라고 생각하는 공간은 그저 베헤모스의 체내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내부에서 마주치는 마족은···.
어디까지나 베헤모스에 기생하는 기생충에 불과할 뿐. 지금껏 아르카임이 미공략 던전으로 남은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공략할 수 없는 것을 공략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지금까지 미공략 던전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이번 아르카임 공략은.
외부에선 베헤모스라는 거대 마물의 진격을 저지하고. 내부에선 녀석의 심장을 찾아 파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건 오직.
미래를 알고 있는 현우만이 준비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공략방식이 될 테고 말이다.
‘상상도 못한 공략을 보게 될 거다.’
그렇게 이틀 후···.
현우와 그의 공략팀.
그리고 이번엔 장인 박광철까지 더해. 네 명의 인원이 아르카임 던전이 위치한 러시아 소도시 첼랴빈스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