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91
91화 노르웨이, 세계수(2)
세계수 위그드라실.
우거진 나무 뿌리 사이로 열려 있던 포털을 통과하자. 가장 먼저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빽빽이 솟아 있는 얼음 기둥.
“우아···.”
주건우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수많은 얼음 기둥의 표면이 주위의 빛과 풍경을 이리저리 난반사시키며. 그야말로 환상적인 관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진 세계.
시종일관 우중충한 분위기였던 얼어붙은 요툰헤임 던전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의 신비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감탄이 채 끝나기도 전.
매서운 칼바람이 그의 뺨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주건우의 감탄은 바로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아악! 추, 춥잖아!”
그는 오들오들 떨며 자신을 중심으로 넓게 창염갑을 전개했다. 이전에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형태였다.
“혀, 현우 형···!”
딱딱 이를 부딪치는 주건우.
뼈에 사무치는 한기에 당혹감을 드러낸 것은 류한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음, 일단 겉보기론 토르의 형제단 측이 제공한 정보가 틀리진 않았던 것 같군요.”
“그러니까.”
“하지만 이미 현우 도련님께서 예상하신 바였을 겁니다. 이제 뭔가 특별한 묘수를 꺼내실 차례일 테죠.”
은근히 기대하는 시선.
주건우 역시 제발 뭐라도 해달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현우는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당황할 필요는 없다.
지금 느껴지는 한기는 환상이니까.
사방을 둘러싼 얼음.
기포 하나 보이지 않는 맑은 표면에 현우는 손을 올렸다. 서늘한 냉기가 손바닥을 통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 전체를 속이는 환각인가. 마나를 통한 기감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
오감을 넘은 육감까지.
그 모든 것을 속이는 환상이라니.
적어도 토르의 형제단으로선 그 진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 지금까지 던전 공략이 지지부진 할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이내 현우는 아공간 포켓에서 준비해온 세계수의 묘목을 꺼냈다.
묘목을 향해 가볍게 마나를 불어넣자.
화아악─!
일순 주위를 가벼운 온풍이 휩쓰는 것 같더니.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한기가 마치 눈 녹듯이 증발했다.
남은 것은 풍경 뿐.
추위라는 감각 자체가 환상이었던 것이다.
“···추위가 사라졌군요.”
류한나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뿐만 아니라 토르켈을 비롯한 토르의 형제단 길드원들도.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지, 진짜군.”
“지금은 오히려 더운 것 같은데?”
“이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토르켈.
그는 살짝 달라진 눈빛으로 현우를 보았다.
“이렇게 환경을 변화시키는 아티팩트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던전의 추위를 사라지게 한 거요?”
그러나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라진 게 아닙니다.”
“으음, 그럼···?”
“원래부터 착각이었던 거죠. 주위를 잘 살펴보시면 무슨 이야긴지 어렵지 않게 알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착각이라니.
토르켈은 의아한 기분으로 일단 현우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그 즉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전부 얼음이 아니라 거울이다.
토르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몇 번을 살펴보고 만져봐도. 분명 얼음이었다고 생각한 것은 거울이었다.
‘이게 대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던전의 환경조차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건가.
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기본적인 환경조차 의심하지 않았으니. 과연 던전 공략에 계속해서 실패할 법도 했다.
“내가 멍청했군. 의심해서 미안하오.”
토르켈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 인정할 줄 아는 남자였다. 솔직히 사과하는 그를 향해 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오직 제 판단만을 전적으로 믿어주셔야 합니다.”
“음, 알겠소.”
지금은 이거면 충분하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으로 토르의 형제단 전체가. 현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180도 바뀌었을 터.
‘물론, 세계수의 묘목의 사용처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놀랄 일은 더 남아 있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때에 들어온 타나토스의 보고.
던전의 첫 번째 환상은 쉽게 격파했으나. 진짜 공략은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전에 완벽하게 대비된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는 법.
그러므로 이와카미 가문에 이어 또다시.
현우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다니엘 블랙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전진의 기회로 이용할 예정이었다.
***
던전 내부는 적막했다.
토르의 형제단 역시, 아까부터 잡담 한 마디조차 꺼내지 않고.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하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모든 공략이 무용지물로 변했다.
이제 무엇이 나타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한 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을 테니.
그리고 이내.
그들은 이번 공략의 첫 번째 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전방에 마족 무리가 있군요.”
“그냥 전진하게 놔두진 않을 모양이오.”
웨어울프 스무 마리.
전부 SS급에 해당하는 까다로운 마족이다.
“전부 토벌하고 지나가죠.”
“음, 좋은 판단이오.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편이 안전할 테니.”
토르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던 망치를 뽑아들었다. 그건 바로 오랜 시간을 그가 애용해온 애병이자 유일등급의 아티팩트인 썬더브링어였다.
“마침, 다수전이라면 자신 있소.”
“그럼 등은 맡기겠습니다.”
스무 마리나 되는 웨어울프라면.
SSS급 헌터조차도 보조 없이는 상대하기 어려운 수준.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녀석들을 쉽게 상대하고도 남을 만한 전력이 있었다.
‘오래 걸리진 않겠어.’
현우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촤르륵, 그의 양손이 묵빛을 띈 흑린갑으로 뒤덮었다. 이윽고 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자. 청명한 우레불꽃이 솟아올랐다.
“주건우.”
“응!”
“녀석들의 숫자가 꽤 많으니까. 혹시라도 놓치는 놈이 없게 뒤에서 막아줘.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을 거야.”
“에이, 너무 쉬운 부탁인데?”
씨익 웃으며 양손을 펼친 주건우.
동시에 그의 주위로 창염이 넓게 퍼지며, 흡사 새장과 비슷한 형태를 취했다. 이걸로 웨어울프는 한 마리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으리라.
“오오···.”
토르켈의 눈이 빛났다.
‘천무그룹 혈족의 권능은 상당히 신기하군. 저걸 저런 식으로도 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러나 감탄하긴 아직 일렀다.
“그럼 갑니다.”
토르켈이 잠시 감탄하는 사이.
이미 현우는 한 발 먼저 웨어울프 무리를 향해. 청명한 푸른 불꽃의 궤적을 길게 그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순간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빠른 속도.
창천십팔무(蒼天十八武)
제5초식 만리화(萬里花)
현우가 흩뿌린 우레불꽃이 허공에서 수 십 개의 작은 꽃봉오리가 되어 피어났고. 이내,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는 문자 그대로 극렬한 파괴력을 뿜어내며 개화했다.
꽈과광─!
연이은 폭발과 함께 웨어울프 다섯 마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니, 고기파편이 되어 승화했다는 표현이 옳을까.
토르켈은 다시 터져 나오는 경탄을 삼키며. 썬더브링어를 강하게 쥐었다.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열다섯 마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토르켈은 바로 놈들을 향해 썬더브링어를 휘둘렀다.
꽈르릉! 귀를 울리는 뇌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격렬한 전류가 웨어울프 사이를 누비며 녀석들을 산채로 튀겼다.
매캐한 탄내가 풍겨왔다.
일격의 여파로 검은 연무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돌적이군···!’
연무로 가려진 시야 너머에서.
피륙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현우는 남은 웨어울프의 머리통을 모조리 짓이기고. 다시 토르켈의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첫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천무그룹의 잠룡···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군.’
토르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대련이라도 한 번 붙어보고 싶은 상대였다.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흠, 아니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린 토르켈.
너무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나머지.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손 안에서 썬더브링어를 몇 번 빙글빙글 돌렸다.
***
다시 전진하기를 몇 분.
“왠지 다시 추워진 것 같은데···.”
주건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단지 느낌이 아니라 정답이었다.
역시 평소 추위에 민감한 녀석 답게. 아주 예리한 감각으로 미세한 수준의 기온 변화를 감지해낸 모양이었다.
“확실히 기온이 떨어지는 것 같소.”
“설마 이것도 환상인가?”
에릭 보른.
토르의 형제단 길드 부마스터인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직 던전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듯했다.
“이건 환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우는 그 의심을 부정했다.
이미 환상은 세계수의 묘목으로 파훼했다. 이건 세계수의 미궁에 존재하는 SSS급 마족으로 인한 변화였다.
‘그리고 이미 예상한 바다.’
확실한 대책은 이미 있다.
얼어붙은 요툰헤임 던전 공략을 위해. 카일리 가문에서 뜯어냈던 신화급 아티팩트. 바로, 가비야의 불꽃 깃털이 여기서 도움이 될 예정이었다.
“오, 이건 그···.”
“신화 등급 아티팩트입니다. 던전 내부의 환경으로 인한 추위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아줄 수 있죠.”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추위 덕분에.
SSS급 마족이 가까이 있다는 것 또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시 걸음을 떼려는 찰나.
“잠깐, 여긴 낯이 익은 것 같소.”
토르켈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하던 것과 많이 다르지만.
이 구간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지난 공략 당시 쏟아지는 다수의 마족에 의해 그들이 후퇴했던 구간.
심지어 쏟아져 나온 마족 전부가 SSS급 헌터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던 터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구간에서 프레다를 잃었지.”
간략한 설명을 끝내고.
씁쓸하게 중얼거린 토르켈.
혹시라도 유품이 남아 있을까.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그러나 주위는 온통 얼음처럼 돋아난 거울들 뿐.
누군가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한편, 현우는 토르켈의 설명을 듣고.
바로 이 구간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가 거울의 시련이다.’
코덱스를 확보한 블러드 레이븐즈조차.
이 구간에서 몇 명의 희생자를 내고서야. 간신히 시련을 통과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공략법은 간단했다.
주위의 거울이 모두 빛을 잃을 때까지. 마족의 공세를 버티는 것. 일종의 방어전을 치루는 것으로 다음 구간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현우가 이곳에서 상대해야할 것은 마족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예측대로.
바로 시련이 시작되었다.
주위의 거울들이 빛을 발했다.
주변의 풍경을 반사하고 있던 거울의 표면이 수면처럼 흔들리더니. 그 안에서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언데드 다섯 마리가 튀어나왔다.
‘SSS급 마족으로 분류되는 드라우그다.’
미라같이 말라비틀어진 피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외형과 다르게. 드라우그는 강한 맷집을 지녔으며. 고대 주술까지 사용하는 까다로운 마족이었다.
“···마족이다!”
먼저 반응한 것은 에릭 보른.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메이스를 들어올렸다. 거울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계속 전진할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다시 후퇴할 것이냐.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였다.
“주건우.”
“어, 응?”
약간 당황했지만 바로 대답하는 주건우.
지금 현우가 해야 할 일은 침착하게 지금 당장 녀석에게 한 가지 특별한 임무를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네가 새롭게 발전시킨 창염갑을 최대로 전개해봐. 일단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어··· 알겠어!”
그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현우의 의도를 되묻진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현우가 이해하기 어려운 오더를 내릴 때엔 항상.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콰가가각!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건우가 펼친 창염갑의 불꽃 돔 위로. 수십 개의 화살비가 날아와 꽂혔다.
역시, 이때를 노릴 것 같았다.
“저, 저건···!”
“블러드 레이븐즈군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의 기습.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면 눈뜨고 당했을 법한 아주 교활한 계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타나토스를 통해 녀석들을 주시하고 있던 현우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블러드 레이븐즈라면···.”
“최근 공략권을 구매하겠다고 제안을 던진 신생 길드로군. 설마 이런 곳에서 저놈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헛웃음을 흘리는 토르켈.
여전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명확하게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거, 외통수가 분명한데.’
앞에는 SSS급 마족.
그리고 뒤에는 적대적인 헌터 집단.
토르켈의 판단은 빨랐다.
“내가 길을 뚫겠소.”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나는 이 던전에서 반드시 살아 나가야할 이유도 없소. 내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볼 테니. 우리 길드원들과 함께 입구로 후퇴하시오.”
“형님!”
“에릭, 군말 말고 따르도록 해라. 이건 길드 마스터로서 마지막 명령이다.”
“하지만···.”
재차 말리려던 에릭이었으나.
토르켈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썬더브링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나···.
현우의 생각은 달랐다.
“됐으니까. 두 분 모두 물러서세요.”
누구도 희생할 필요는 없다.
녀석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하나.
바로 지금 일촉즉발의 위기로 보이는 이 상황 자체가 현우가 바라고 의도한 무대라는 것.
“타나토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러나 타나토스는 바로 현우의 의사에 따라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우─
차원문이 열리며 페일 라이더가 나타났다.
다만 공간의 한계 때문에 전부가 아니고. 일부 포대만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블러드 레이븐즈.’
공략법이 하나뿐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언제나 그렇듯···.
압도적인 힘은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법.
현우는 이 자리에서 거울의 시련은 물론이고. 블러드 레이븐즈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너흰 전부 여기서 죽는다.’
─꽈과광!
페일 라이더의 포신 일부가 불을 뿜었고.
끊임없이 드라우그를 소환해야 할 거울이 차례대로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