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1706)
회귀자 사용설명서 1706화
중원무림빙의(111)
“얘네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
“천마.”
“…….”
“천마라 부르더라고.”
“…….”
“참 웃기지 않아? 뭐, 사실 나는 그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겠지만… 심지어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도 못 했지만, 아무튼 이지혜가 머리를 잘 쓴 건 확실한 것 같지?”
‘시바… 머리를 잘 쓴 정도가 아니야… 그 정도가 아니라고….’
외통수였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 체크메이트라고 중얼거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질 정도로 완벽한 외통수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웃고 있는 이지혜의 얼굴이 상상이 된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꼬고, 체스 말을 붙잡은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듣기로는 단순히 천마신교의 교주라고 붙는 별호가 아니라…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에게 붙이는 별호 같은 거라고 하던데,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이 모양이더라고.”
타이밍마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흐르고 있는 가운데, 슬쩍 시선을 돌리자 차희라가 여전히 이빨을 보이며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내 반응을 살짝 떠보는 것 같은 느낌도 확실히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때. 자기 눈에도 내가 천마처럼 보여?”
‘천마처럼 보이다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갈기,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붉은색 눈,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위압감, 무복을 뚫고 나오는 터질 듯한 근육, 굳이 티 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절대자의 기세는 수만 년에 한 번씩 나올 것만 같은 신화 속의 정복왕과도 같은 모양새다.
이 남자는 날 때부터 누군가의 위에 서 있기 위해 태어난 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런 외관을 지닌 인물이 경천동지할 무력을 선보이며 중원의 강자들을 개박살 내버린다면, 자신도 모르게 천마라 부르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나였어도 그를 자연스레 천마라 불렀을 것이다.
꼬물이 역시 잘 자라기는 했지만….
‘누… 누가 봐도 이쪽이 천마 같자너. 꼬, 꼬물이는 천마처럼 보이지도 않자너….’
그래. 누가 봐도 이쪽이 천마처럼 보였다.
어떻게 봐도, 이쪽이 천마였다.
‘이래서… 이래서 희라 누나를 풀어줬던 거구나.’
“…….”
“…….”
이지혜는 그녀의 행보에 자연스럽게 천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거라는 걸 예상했던 것이다.
‘시바. 이래서 희라 누나를 풀어줬던 거였어.’
말 안 해도 입 아픈 소리였지만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희라 누나는, 천마신교의 교주도 아니고, 천마신교도들의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세계관 설정상 다수가 그리 믿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에 무게감이 실리게 된다.
아마 그녀가 이 행보를 계속 이어나갈수록, 중원인들의 머릿속에 천마는 차르갈 칸을 칭하는 별호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꼬물이 쪽이 자신을 천마라 주장해도, 그 누구도 모용진천을 천마라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차원에서도 둘 중 누구를 천마로 택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꼬물이를 천마로 만들어 우리 차원으로 보낸다는 전제조차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건,
‘죽일 수밖에 없어.’
꼬물이가 직접 희라 누나를 죽인다면 가장 베스트 시나리오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워낙 포텐셜이 높은 놈이다 보니 최종에 최종까지 성장을 마치면 비벼볼 수 있을 만한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아니, 솔직히 그것마저도 확신할 수가 없다.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개박살이 날 것이다.
꼬물이 최종 완성본도 이 모양 이 꼴일진대, 하물며 지금의 꼬물이에게 희라 누나를 이겨 달라고 바라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말인즉슨….
‘내가 해야 돼.’
“…….”
‘무조건 내가 해야 되는 거야.’
“…….”
‘내가 죽여야 되는 거야.’
하지만….
‘희라 누나를… 죽일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
‘이… 이딴 걸 어떻게….’
“…….”
‘이 여자를 죽이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간 많은 위기들을 겪어왔고, 많은 일들을 해왔지만, 이만큼 견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또 처음. 물론 진가가와 진상공이 여기로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로도 부족하다.
진 군사가 정상이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오고 나발이고, 명예고 나발이고 허겁지겁 두들겨 맞을 것이다. 만약 희라 누나를 어떻게 하고 싶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어… 어?”
“방금 나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 라고 생각했지?”
“…….”
“…….”
“아… 아니?”
“아닌데…?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았는데 말이야.”
“아니야. 누나. 내가. 왜….”
“아니기는… 분명히 죽이려고 했으면서….”
숨을 쉬기가 힘들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이 저절로 다리가 떨려온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게 된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채워졌을 때, 그녀가 말을 이어왔다.
일순간 긴장이 풀리게 만드는 편한 목소리였다.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자기.”
“…….”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그냥 알아보고 싶었던 거지. 아마 자기라면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분… 분위기… 괜찮자너.’
놀랍게도 귀엽다는 듯한 얼굴이다. 지난번에 하얀이가 대놓고 살기를 내뿜고 있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 물론 당시와는 상황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확실히 애첩은 다르다는 것일까. 그간 열심히 노력해서 봉사한 효과가 드디어 드러나는 것일까.
어쩌면 희라 누나가 내게 협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자기한테 협력할 생각은 딱히 없어.”
희라 누나가 먼저 선수를 쳐왔다.
“물론 자기한테 이게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아. 또 내가 도와주면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자기를 데리고 가는 거거든.”
“…….”
“즐길 거 즐기고.”
“…….”
“나는 물론 자기를 믿고, 자기가 이쪽을 저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자기는 한 가지에 몰입하면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는 성향이 있잖아. 난 자기의 그런 성향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 넘으면 안 되면 선이라는 게 있으니까. 쉽게 말해 자기가 선을 지켜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 그래,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야. 네 선이 되어주려고.”
“그럼, 어떻게 하게. 아니,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기는, 당장 오늘 밤에도…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들어갈까?”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누나! 무슨… 나는 지금 그런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
“…….”
“그냥 농담한 거야. 근데 자기도 참 웃긴다. 나는 자기가 나한테 그런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거든.”
“왜?”
“내가 자기를 여기로 불렀어?”
“…….”
“…….”
“자기가 나한테 직접 찾아왔잖아.”
“…….”
“자기가 나한테 던진 질문은 사실 내가 자기한테 던져야 할 질문이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지… 다음 수는 도대체 뭔지. 그야 나는 자기가 그냥 여기로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거든. 물론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겠지만, 자기가 나를 찾은 건, 시시콜콜한 이유나 운명적인 이끌림 같은 게 아니야. 본능이자 의지인 거지. 잘 생각해 봐. 꼭 나한테 찾아올 이유가 있었는지.”
‘그래. 그것도 맞아.’
순간적으로 시바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그래. 희라 누나가 아니라 내가 여기로 온 거야.’
희라 누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기가 어떤 경위로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기가 여기로 온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거든… 왜. 회귀했다면서. 나는 자기가 한 번만 회귀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겨우 한 번, 딱 한 번의 실수 가지고, 김현성을 비롯한 다른 빙의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거든. 아마 몇 번 쌓이고 쌓이니까. 대화 자체를 단절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던 거 아니겠어?”
“…….”
“같은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의 상황도 이미 보고 왔을지도 모르지. 왜. 생각해봐 더 이상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꽤 곤란해지는 상황 아니야? 자기가 나를 부른 타이밍이 꽤 절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마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무림인들의 대다수가 나를 천마라 불렀을 거야.”
‘그 말도 맞아.’
“자기.”
“…….”
“자기는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고….”
“…….”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고 나보고 자기를 마중 나오라고 한 거라고.”
“…….”
“…….”
‘그것도… 맞아.’
차희라는 웃고 있었다.
‘이 누나….’
너털웃음이나 배신감에 허망한 웃음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기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도대체 어떤 걸 준비했을지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즐길 건 즐기고… 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
“뭘 준비했을까? 그 꼬마 진청밖에 없으면 좀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지. 회귀뿐만이 아니라, 모용화연과 모련, 그 사이에 있는 갭에서도 활용할 시간이 꽤 될 테니… 다른 육체로 무언가를 설계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장담하건대 나는 분명히 자기한테 몇 번은 죽었을 거야. 별개로 자기가 나를 넘지 못하고 회귀한 횟수도 결코 적지 않을 거고. 물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은 자기가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회귀를 했다는 가정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나는 자기가 나를 불렀을 때부터 내 가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 자기는 이미 이 모든 걸 겪었던 거라고. 재미있지?”
‘재미없어요. 이거 게임 아니에요. 누나. 시바.’
정말로 이걸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정말로 이 12차원을 그냥 유희의 장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대륙에서는 가장 초월자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이가, 갑작스레 너무나도 초월자다운 마인드로 이 사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물론 이기영과 싸움을 벌이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기대하는 것은 내가 준비한 무언가다.
대륙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 더욱더 그런 것일까. 나와 척을 지고, 대립하는 것이 즐거워 보인다. 그녀의 눈에는 모련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선물상자를 들고 온 것처럼 비치고 있으리라.
“…….”
“…….”
“자기도 양보하지 않는 성격이잖아. 나도 여기에서는 굳이 양보하고 싶지 않네. 서로 원하는 방향이 다르니, 결국에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물론 그녀의 가설은 이쪽이 회귀를 계속해서 반복했다는 것을 가정으로 하는 발언이다. 그녀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눈은 내 상태창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
“…….”
“…….”
[27회차를 시작하는 빙의자.]정확하게 달라붙어 있는 칭호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바… 시바. 진짜.’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지만…
[27회차를 시작하는 빙의자.]틀림없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