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330)
회귀자 사용설명서 330화
검은색 세계의 우리(3)
순간적이지만 정신이 멍해졌다.
반가울 리가 없었다.
누가 봐도 인간 쓰레기 빌런처럼 보이는 1회 차의 이기영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어졌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달라졌다.
다크써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고 지금보다 살도 많이 빠졌다.
현재의 나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머리가 무척이나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생각을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막장 루트를 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다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이 사단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정신을 잃었고 조혜진은 죽었다.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망자 역시 집계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한 모양새, 아니, 틀림없이 전쟁일 것이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거 혹시….’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동안 발에 땀나도록 찾아다닌 놈이 이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순식간.
조혜진을 죽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원한을 살 만하다.
샤오린이 이쪽을 가면남이라고 불렀을 때, 김현성이 보여준 반응을 떠올려보자 내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보여준 민감한 반응이 샤오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가면남에 중점을 뒀을 수도 있겠다.
직후 보여준 어색한 표정 역시 무척 신경 쓰이기 시작.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이쪽을 몰아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의 뒷이야기를 보고 싶은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상을 되감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혜진에게 화살이 떨어지던 장면으로, 내가 처음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던 장면으로,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기 시작한 장면은 이제는 뭐가 뭔지도 알아보기 힘들다.
이게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었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시간을 되감고 있다는 것.
중간 중간 흥미로울 것 같은 장면들이 눈에 띄지만 당연히 저게 무슨 상황인지,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카스가노 유노와 내가 함께 있는 모습 역시 순식간에 지나간 이후에 비치는 모습은….
정하얀?
정하얀과 내가 함께 있었다.
‘오빠,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이건 또 뭐야.
어째서 정하얀과 내가 함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보기에도 꽤나 달달해 보인다.
특히나 놀라웠던 것은 정하얀의 눈빛.
지금 같은 광기나 집착 따위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 순박한 소녀 같은 눈빛이었고 툭 하면 부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커다란 눈망울도 여전했고 어깨까지만 내려오는 머리, 심지어 잘 꾸미지 못하는 외관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얼굴을 보니 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지만, 지금의 정하얀은 정말로 귀엽다.
이윽고 눈앞에 튀어나오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 사랑을 나누는 장면까지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펼쳐진 광경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다이나믹하다.
검은색 세계의 나에게 매달리다 시피 하는 정하얀을 바라보는 건 양심이 찔리기야 했지만 어차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나 본인.
그나마 자신 있게 마주할 수 있다.
물론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다.
현세의 나도 정하얀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찝찝함은 금방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정하얀의 행동 하나하나가 굉장히 수동적인 것이 눈에 띈다.
무척 적극적인 지금과 비교해 보면….
‘그냥 다른 사람 같은데.’
혹시나 얼굴이 닮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정하얀.
울고불고 하는 모습도 여전했고 어떻게든 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네. 오빠 말이 맞아요! 오, 오빠를 만난 건 운명인 것 같아요. 운명이요. 틀림없이 운명일 거예요.’
라거나.
‘자, 잘, 잘못했어요. 정말로 히끅…. 잘못했어요.’
이런 모습들은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정하얀을 만났는지도 잘 모르겠다. 박덕구가 옆에 없는 걸로 봐서는 정하얀과 만난 것은 박덕구가 죽은 이후.
너무나도 정보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이 생긴다.
정하얀과 내가 1회 차에도 접점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지금 정하얀에게 이쪽이 시달리는 것도 전생에 지은 죄를 갚기 위해서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 만큼 괜스레 주의 깊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저 쓰레기 같은 놈이 정하얀에게는 어떤 짓을 하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그것과는 정 반대.
장담컨대 이상적인 남자친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정하얀은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조금 의아했던 점은 그녀와 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어디서 만나는지는 알 수 없다.
마법 연구실 같기도 했고 커다란 방 안이기도 했다.
타인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내가 정하얀에게 감금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1회 차의 정하얀은 2회 차의 정하얀이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도대체 뭐야.’
궁금하기는 했지만 궁금증은 금방 사라진다.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에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훅 하고 장면이 지나간 이후 비친 모습은 가관.
정하얀은 학대당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학대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쪽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집착하고 혹시나 미움 받을까 자신에게 행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안아주는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정하얀의 애정은 어떻게 봐도 무조건 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헤헤. 사랑해요.’
웃으면서.
‘너무 좋아요.
바보같이 품에 안긴다.
검은색 쓰레기는 입꼬리가 스물스물 올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간다.
정하얀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다시 한번 풍경이 뒤바뀌기 시작.
이후에 비친 장면은 조용히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정하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색 세계의 내가 이상한 수정구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수정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너무나도 똑똑히 내 시야에 비친다.
당시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발이 된 머리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
‘뭐야 이게.’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천장 위에 달려 있는 밧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방안에 있는 물건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다.
편지를 계속해서 읽고 있는 모습은 가관.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수십, 아니, 수백 장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바보 같이 웃으면서 편지를 읽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으로 보건대 저 많은 양의 편지에는 꽤 행복했던 추억도 적혀 있었던 것 같았다.
한 차례가 아니라 이쪽과 정하얀이 만남을 가지는 내내 받아오거나 써왔었던 편지 같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은 일그러지고 눈물이 터져 나온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흐윽. …그러니까 돌아와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돌아와 주세요.’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검은색 세계의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는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더 잘할게요.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제 싫어졌다는 말은 하지 마요.’
‘…….’
‘히끅. 흐그윽. 제발요. 부탁이에요. 보고 있다면 다시 말을 걸어줘요, 오빠. 평소처럼요. 이렇게는 싫어. 이렇게 헤어지는 건 너무 싫어.’
‘…….’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잖아요. 저는 전부 기억해요. 용기내서 고백한 것도 그때 깜짝 놀란 오빠 표정도. 그리고 우리가 맺어진 것도 전부 기억해요. 처음 맺어진 날도, 그리고 싸운 날도, 오빠가 화를 낸 날도 전부 다 기억해요. 전부 다요. 보고 싶어요. 정말로 보고 싶어…. 정말로… 이제 다시는 싫다는 소리 안 할게요. 오빠가 시키는 건 전부 다 할게요. 이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어떻게 되도 괴롭지 않아요. 오빠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주세요. 싫어졌다는 말은 하지 마요. 시키는 건 전부 다 할 테니까. 흐윽. 흐으윽….’
‘…….’
‘운명이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만난 건 분명히 운명일 거라고 했잖아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잖아요. 계속해서 같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히끅…. 그건 너무 싫어. 오빠가 없는 건 너무 괴로워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어요. 아무것도요. 차, 차,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차라리….’
‘…….’
하지만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결심은 했지만 쉬울 리가 없다.
‘히끅. 히끅….’
하는 딸꾹질 소리도 들려왔고 계속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장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깥을 바라보기도 한다.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 역시 수차례.
‘너무 괴로워…. 아무 생각도 않나…. 무서워. …도와주세요, 오빠. 제발 도와주세요. 다시 예전처럼 웃어줘요. 히끅. 흐으으윽.’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리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선은 천장에 고정된 밧줄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괜스레 입맛이 쓰다.
‘그래…. 오빠가 말했어.’
‘…….’
‘우, 우리는 다음 생에서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어. 맞아. 잠깐 아픈 것뿐이야. 잠깐만 괴로우면 편해질 거야. 깜깜해지지 않을 거야. 다음 생에서도 만난다고 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히끅….’
‘…….’
그녀는 몸을 떨었다.
천천히 의자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인다.
자신 스스로가 목숨을 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별거 아닌 이유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각각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살아갈 용기보다 죽을 용기가 더 컸을 때밖에 이루어지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이다.
바보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솔직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롭게 느껴진다.
‘후우. 후우…. 오빠도 알아줄 거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줄 거야. 내가 주, 죽었다는 걸 알면 평생 기억해 주겠지? 어쩌면 후, 후, 후회할지도 몰라. 슬퍼할지도 몰라. 나는 사라지지만 평생 기억 속에 남을 수도 있을 거야. 잊히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아. 응. 그, 그게 더 나아. 다음 생에서도 우리는 만날 거니까. 오빠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으응… 맞아.’
‘…….’
‘아니야. 어, 어쩌면 구해주러 나타날지도 몰라. 오, 오빠는 항상 내, 내가 괴로워할 때 와줬으니까.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 줄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히끅… 어쩌면 그럴 수도….’
뚝뚝.
눈물이 계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목소리는 점점 떨린다.
숨소리는 조금씩 거칠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흐느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흐으으으윽. 히끅.’
‘…….’
‘흐으으윽…. 히끅. 제발. 제발….’
머뭇거리기를 수차례.
하지만 정하얀은 결국 결단을 내린다. 스스로 걸어 천천히 밧줄을 목에 매달기 시작한다.
‘켁… 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충분히 줄을 자르려면 마법으로 자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더욱더 보고 있기 괴롭다.
검은색 세계의 이기영이 보고 있는 수정으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순식간에 내 몸이 빨려 들어간다.
눈 바로 앞에서 바둥거리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다.
‘구… 구해줄… 켁. 올 거야. 오빠는… 올 거야.’
당연하지만 와줄 리가 없다.
하지만 정하얀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그녀가 어느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착각이겠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틀림없이 내가 있는 곳이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봤지만 이쪽의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을 잃어가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나다.
지금의 상태가 타인의 눈에 비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지만 죽어가는 정하얀의 눈에는 보이는 모양.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정하얀이 보는 것이 환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의 정하얀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와닿고 있었으니까.
‘와줬어. 구하러… 와줬어.’
점점. 몸이 늘어진다.
달려들어 저 밧줄을 끊고 싶지만 당연히 나는 검은색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입을 열어보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다행. 다행…. 이제는 정말 함께….’
이상하게도.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정하얀의 눈에서도 마찬가지다.
버둥거리는 몸으로 손을 뻗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사랑….’
그걸로 끝.
미동도 없는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