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무림대회(4)-사기템
남궁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휘익!
검이 날카롭게 요혈을 찌르고 들어왔다. 보법을 펼쳐 피하자, 검 끝이 마치 뱀처럼 꺾이며 따라왔다.
채앵!
“크윽!”
힘겹게 검을 쳐냈다. 반격을 하려고 자세를 잡으려 했으나, 남궁현은 그럴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쐐애액!
“헛!”
무시무시한 검초에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까지 서 있던 공간이 검초에 찢겨나갔다.
꿀꺽.
잠시만 늦었어도 몸에 구멍이 뚫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남궁휘는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남궁현을 바라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래 중에서 자신보다 실력이 나은 후기지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대 남궁세가의 후계자이고, 십대고수인 아버지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것도 여자에게!’
남궁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주변의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소가주가 비무를 한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세가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도록 검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정당한 비무입니다. 제가 나서라고 할 때까지 누구도 나서지 마세요.”
‘누님!’
야속하게도 누님은 그렇게 말했다.
하긴, 지금 이 상태로 비무가 끝나면, 그건 자신이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 내가 진다고?’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에 호흡이 가빠졌다.
호흡이 가빠지자 보법이 흐트러졌고, 보법이 흐트러지자 초식이 꼬였다. 실전경험의 부족이 여실히 드러났다.
반면에 남궁현은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어릴 때부터 쫓기는 것이 일상이었고,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웠다. 웬만한 사내보다 훨씬 담이 컸다.
더불어 최근 한 달 동안은 대인과 함께 만박노괴에게 특훈을 받았다.
여기에 천음절맥까지 점점 호전되고 있으니, 타고난 재능에 날개까지 단 셈이었다.
“공자. 집중력이 부족하네요.”
“이익! 닥치시오!”
흥분해서 본래 실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남궁휘에 비해, 남궁현은 점점 차분해졌다.
‘이렇게 큰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서 고작···.’
상대의 한심한 모습에 분노마저 가라앉았다. 남궁현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마저 생겼다.
‘할아버지.’
진 노인은 주먹을 꽉 쥐고 손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압도하는 손녀의 모습에서, 그는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벅찬 감정을 느꼈다.
‘오라버니.’
반면 대인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남궁현은 기뻤다. 저 표정은 자신이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때였다. 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전음을 보내왔다.
남궁현은 곧바로 승부수를 걸었다.
휘익!
상대가 과감하게 치고 들어오자 남궁휘도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비무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헉!”
남궁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보며 몸을 사렸고,
서걱.
남궁현은 검이 눈앞으로 다가와도, 검풍에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도, 뺨에 생채기가 생겨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남궁휘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어찌 저리 침착할 수가···.’
그 순간 승부가 갈렸다.
까앙!
남궁휘의 검이 주인의 손을 떠나 허공을 날았다. 남궁현이 활짝 열린 상대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좌장으로 남궁휘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남궁휘가 한참을 날아가 바닥에 굴렀다.
“소가주님!”
놀란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 중 일부는 검을 뽑아 들고 대인 일행을 포위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궁휘가 팔을 들었다.
“···괜찮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그리고 남궁현에게 걸어갔다.
“···소저.”
남궁현은 조금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심각한 표정을 짓나 싶었다.
‘설마 추천장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남궁휘가 말했다.
“내가 졌소. 다음에 다시 합시다.”
“···네?”
“오늘은 내가 졌소. 하지만 이게 내 본래 실력은 아니오. 긴장했소. 그러니 다음에 다시 합시다.”
“하, 무슨 억지를.”
남궁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어쨌든 패배를 인정했으니 약속을 어길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이 된다고 달라질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용봉비무에 참가해야 해요. 공자님과 비무할 시간 없어요.”
그녀가 톡톡 쏘아붙이는데도, 어째선지 남궁휘는 비죽 웃기만 했다.
혹시 머리라도 다친 걸까?
“소저는 몇 살이오?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용봉비무에 참가하려면 나이가 최소···.”
남궁현은 새침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다.
“열여덟입니다.”
“설마. 나보다 누이로 보이지는 않는데.”
“누구처럼 어려서부터 잘 먹고 자라질 못해서요.”
“······.”
남궁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었다.
“저기···.”
“약속대로 추천장은 써주실 거죠?”
“무, 물론이요. 당장 내 이름으로 써주겠소.”
소가주가 갑자기 쩔쩔매는 모습에, 세가의 무인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그 상황을 한눈에 이해한 것은 대인과 몇몇 사람들 정도였다.
‘하여튼 무림 놈들은···.’
죽일 듯이 칼싸움하다가 우정도 꽃피고, 사랑도 꽃피고, 머리가 어딘가 이상한 종족이었다.
‘근데 쟤네 동성동본 아닌가? 뭐, 하긴···.’
어차피 둘이 이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두 가문 사이에 얽힌 핏물 때문에라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사실을 짐작도 못 하는 남궁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소저의 시합 때 내가 응원하러 가도 되겠소?”
“공자가 저를요? 왜요?”
“크흠. 그야 나를 이긴 사람의 시합이니까···.”
아쉽게도 남궁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 순간 남궁세가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묵직한 내공이 담겨 있었고, 자연스럽게 펼쳐진 기세가 주변을 장악했다.
“가주님!”
“가주님!”
모여 있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30대 중반으로 보이는-원래 나이는 훨씬 많겠지만-사내가 호위무사들과 함께 걸어왔다.
대인은 상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 남자가 남궁정천.’
무림의 십대고수, 그중에서도 맨 윗자리가 누구냐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아버님!”
남궁예린과 남궁휘도 서둘러 달려와 예를 갖췄다.
남궁정천은 비무가 남긴 흔적을 쭉 둘러보더니, 이내 그 시선이 남궁현을 거쳐 남궁휘에게 닿았다.
“휘야. 설마 네가 패한 것이냐?”
“······.”
남궁휘는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남궁정천이 아들에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푸흐···.”
남궁정천은 고개 숙인 아들의 모습을 빤히 바라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이 녀석아. 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비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 실력으로 용봉비무는 어림도 없다고 말이다.”
“아버님···. 너무하십니다.”
마치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남궁휘는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남궁정천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창천신검 남궁정천은 무림에서 대협객으로 유명했다.
매사에 공명정대하며, 약자를 배려하고, 가문에 헌신했으며, 불의를 보면 누구보다 먼저 검을 빼 들었다.
훗날 벌어질 정마대전에서도 크게 활약한 인물.
그런데···.
‘아까 현이를 바라볼 때, 잠깐이지만 살기를 흘렸단 말이지.’
대인 외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남궁정천이 살기를 내비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협객의 다른 얼굴이라···. 재밌네.’
대인은 그리 생각하며 남궁정천을 바라봤다.
마침 남궁정천도 대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남궁예린에게 간략히 설명을 들은 뒤였다.
“유모를 구해준 은인이라고 들었네. 내가 이 못난 녀석의 아비일세.”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창천신검 대협.”
대현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동시에 기도를 드러냈다.
‘이 정도 고수를 완전히 속일 수는 없어. 차라리 적당히 흘리는 게 낫지.’
남궁정천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나이에 비해 성취가 무척이나 빠르군. 무림에 새로운 신성이 나타났어. 허허허!”
그리 말하며 남궁정천은 웃었다. 한순간 주변이 밝아지듯, 맑고 깨끗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대인은 한줄기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들려줄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하다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
그날 저녁.
남궁정천은 자신의 방에서, 창밖으로 멀어지는 대인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그곳에 세상에 알려진 협객의 모습은 없었다. 온화한 표정도, 부드러운 눈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궁정천은 오직 싸늘한 시선으로 작아지는 대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비영.”
나직한 부름에, 천장에서 흑의복면을 한 사내가 뚝 떨어져 그의 등 뒤에 부복했다.
“예. 주군.”
“임대인이라는 놈. 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수상한 자입니다. 제가 알기로 광동에는 백가검문이라는 문파가 없으며, 말투 또한 어느 지방 사투리도 아닌데 묘하게 독특합니다.”
“마교의 앞잡이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저녁 식사 내내 대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남궁정천은 그중 어떤 정보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 수상한 놈이다.”
세상에 대협객으로 알려진 것은 이득도 많지만, 동시에 꽤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수상한 놈이 보여도 잡아다 고문을 해서 입을 열 수가 없으니 말이지.’
하물며 세가의 군식구가 은혜를 입었다고 하니, 외부에 알려진 대협객 남궁정천은 그들을 환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용봉비무에 나갈 수 있도록 추천장까지 써주었다.
사실 추천장은 써주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멍청한 아들놈이 웬 계집과 내기 비무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남궁정천은 아까 본 광경을 떠올리며 살기를 내뿜었다.
“모자란 놈. 내 아들이 계집 따위에게 진단 말이냐. 그놈은 실패작이다.”
“······.”
비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남궁정천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신경 쓸 일이 자꾸만 늘어나는군. 신강에 나타난 괴조에, 모용세가에서 보내온 소식만 해도 충분히 골치가 아프거늘···.”
얼마 전, 모용세가의 총관이 한 장의 서찰을 보내왔다.
검황문의 생존자 추적을 맡긴 암혈단이 전멸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가 그와 관련된 서류를 전부 훔쳐갔다는 내용이었다.
그 서찰을 읽는 순간, 남궁정천은 하마터면 수하들 앞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 끝난 일을 캐고 다니는 놈이 있다. 누구지? 사자검 진충인가? 아니, 놈은 그럴 실력이 안 돼. 그럼 구파일방 놈들인가? 놈들이 뭔가 냄새를 맡았나?’
남궁정천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역시 15년 전에 완벽하게 마무리를 했어야 했다.
‘남궁상인···.’
그는 아직도 종종 꿈에서 남궁상인, 검황문의 마지막 문주였던 놈의 얼굴을 본다.
『“이 비열한 놈···. 기다려라. 언젠가 네놈이 죗값을 치를 날이 올 것이다”』
원망과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눈. 남궁정천은 그 눈알을 직접 손으로 파냈었다.
“설마···. 남궁상인의 자식이 고수가 되어 돌아온 것인가?”
가장 그럴듯한 추리였다. 검황의 자손들은 하나같이 인간 같지 않은 재능을 타고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하게도 임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 상당한 고수였지. 그 나이에 이미 절정을 넘은 것이 확실했다. 재능이라면 능히···.’
설마?
하지만 남궁상인의 자식은 나이가 많아 봤자 열여섯일 텐데?
임대인은 적어도 그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다.
잠시 후 남궁정천은 그 의문을 스스로 해결해 버렸다.
‘성장이 빠르면 열다섯에 그만큼 크기도 한다. 얼굴에는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거나 축골공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백가검문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문파.
녹림을 때려잡으며 이곳까지 온 기이한 행적.
그 도중에 남궁세가에서 유모로 일했던 여자를 구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
의심은 무럭무럭 커져서 절반 이상의 확신이 되었다.
남궁정천은 비영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비영. 놈을 조사해라. 어디서 온 놈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의도적으로 세가에 접근한 것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조사해서 내게 보고하라.”
“존명.”
대답과 동시에, 비영의 모습이 사라졌다.
방안에 홀로 남은 남궁정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모용욱을 만나야겠군.”
그는 모용세가의 가주에게 보낼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
“오라버니. 귀에 그건 뭐예요?”
남궁현은 대인이 귀에 끼고 있는 물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행이 남궁세가를 나선 직후부터, 대인은 귀에 동그랗고 까만 구슬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이거?”
대인은 귀에 낀 블루투스 이어폰을 톡톡 두드렸다.
마침 이어폰에서 남궁정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용욱을 만나야겠군.]대인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지구에서 갖고 온 사기템.”
대인은 남궁정천의 방을 비롯해, 남궁세가 곳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