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길잡이 소년(3)
다음 날 아침.
“···초인들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다고?”
주상욱은 전날 밤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전해 듣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 앞에는 쿠로다마 신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년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말할 기회가 없어서···.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지난밤 도주에 성공하지 못한 소년은, 주상욱이 일어나자마자 밤 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했다.
릴리나 대인이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스스로 이실직고하고 나선 것이다.
“이게 무슨···.”
“무사님. 제발 살려만 주세요.”
노예처럼 납작 엎드린 소년이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며, 주상욱은 분노가 아닌 연민을 느꼈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일로 당연하다는 듯이 무릎을 꿇는 거지?’
주상욱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누가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인다는 거야? 빨리 일어나.”
“용서해 주실 때까지는···.”
주상욱은 직접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난 널 죽이지도, 때리지도 않을 거야.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야. 알았니?”
“······.”
신은 주상욱의 눈치를 살폈다.
소년은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난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이나 겁먹은 연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상욱은 불안에 몸을 떠는 소년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말했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해치지 않을 테니까. 지금부터는 우리한테 진실만 말해. 그거면 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후, 겨우 안정을 되찾은 신이 입을 열었다.
“···저는 도쿄의 트라이브 중 하나인, 오로치에 소속된 종자였습니다.”
“트라이브? 오로치? 종자?”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에 주상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신은 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
한쪽에서 대인이 조용히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신은 거기까지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트라이브는···.”
신은 퍼스트 게이트 이후 변화한 일본에 대해서 설명했다.
트라이브 내에서 영주, 무사, 평민으로 나뉘는 계급.
그리고 그 안에서 하층 계급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지 말했다.
“평민은 노예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주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무사들은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저희를 막 때렸습니다. 그리고 여자애들은···.”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주상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을···!”
“···전부 사실입니다.”
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상욱은 그 모습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는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예. 트라이브 오로치에서···.”
현재 도쿄는 4개의 대형 트라이브가 지배하고 있었다.
동쪽의 이자나미
서쪽의 오로치
남쪽의 무사시
북쪽의 만다라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도쿄를 지배하는 그들은, 각각의 규모만으로도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만큼 큰 집단이었다.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은, 명맥만 남은 중앙정부의 법과 질서를 간단히 무시할 정도였다.
“도쿄 안에 4명이나 되는 왕이 있는 셈인가···.”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됐을 때, 주상욱은 자신이 맡은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대통령 각하. 이런 상황에서 저보고 일본과 동맹을 맺으라고요? 우리 안에 사자가 4마리나 있는데요?’
들어보니 일본 정부는 도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4대 트라이브의 힘에 눌려서 거의 영향력이 없다고 했다.
‘이 동맹이 의미가 있을까?’
주상욱은 벌써부터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때 신이 주상욱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트라이브에서 쫓는 건 저뿐입니다. 제가 떠나면, 여러분께 더 이상 폐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자리에서 일어난 신이 주상욱에게, 그리고 대인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길만 알려드리고 저는 떠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문제도 없이 도청까지 가실 수 있을 겁니다. 검문소에서 무사님의 능력을 조금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런···.”
신은 일행에게 도쿄로 가는 길을 설명한 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주상욱은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저 아이 말이 맞아. 하지만···. 이대로 보내버리면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초인들에게 쫓기는 어린 소년.
이대로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저 아이는 얼마 가지 못해 죽을 것이다.
‘추격자들에게 잡혀서 죽거나, 아니면 몬스터에게 죽게 되겠지.’
“잠···.”
그러나 주상욱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가 저 아이를 계속 데리고 다니면, 도쿄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와 적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은 주상욱의 눈치를 보며 점점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주상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저 소년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주상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고작해야 공무원에 불과해. 게다가 여긴 우리나라도 아니고.’
“······.”
결국 주상욱의 소년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에는 냉소가 깃들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이득이 안 되는 꼬마를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지.’
신은 스스로 이 상황을 의도했다. 낯선 여행자들을 따라 도쿄로 돌아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
‘날 팔아넘기지 않은 게 다행이지.’
신은 힐끗 고개를 돌려 릴리를 바라봤다.
소녀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느라 가만히 있었다.
‘릴리라고 했지. 어제는 고마웠다.’
신은 릴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소년은 도쿄에서 최대한 멀리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도쿄를 떠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땐, 놈들을 다 죽여 버리겠어.’
“꼬마. 거기 서.”
대인이 신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예···?”
신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긴 어딜 가. 도쿄 도청까지 길 안내하기로 한 거 잊었어?”
“하지만 제가 있으면 여러분께 방해가 될 텐데···.”
신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대인은 ‘그래서 뭐?’라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유령이 여기 꼬맹이 얼굴도 봤다며. 그럼 어차피 우리 정체 다 들킨 거 아냐?”
계속 입이 근질근질했던 릴리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 파란 유령이 나보고 자기 취향이랬어!”
그건 대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뭐?”
표정이 굳은 대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어떤 새끼가···.”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신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너 여기서 기다려 봐. 꼬맹이. 저 녀석 못 도망치게 잡고 있어.”
“응!”
어쩐지 신이 난 릴리가 신에게 달려와서 팔짱을 꼈다. 못 도망가게 잡아두려는 행동이었다.
“!!”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팔의 감촉에, 소년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사이 대인은 주상욱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 팀장님. 저랑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예.”
두 사람은 소년 소녀에게서 멀어졌다. 아무도 못 듣도록 기막을 펼친 대인이 주상욱에게 말했다.
“저 신이라는 꼬마.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데리고 다니죠.”
대인에겐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정확히는, 방금 전에 생겼다.
‘저 녀석이 내가 생각한 그 녀석이 맞다면···.’
하지만 주상욱은 고개를 저었다.
“부대표님. 저를 냉혈한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주상욱은 지금 일행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해서 말했다.
“우리는 목적지까지 현지 초인들과 아무런 트러블 없이 도착해야 합니다. 싸움을 일으켜서 문제라도 생기면, 저희의 목적을 이루기가 훨씬 힘들어질 겁니다.”
“······.”
대인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주상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부대표님이 얼마나 강한 초인인지는 저도 소문으로 들어서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대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으니 저 꼬마는 버리고 가자? 틀린 말은 아니네요.”
“······.”
“뭐, 정 방법이 없으면 그래야겠죠.”
그 순간, 주상욱은 눈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임대인.
불가능에 가까웠던 임무를 몇 번이나 해결하고, 수차례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남자.
부산에서는 홀로 마왕이라 불리는 괴물을 처치해서, 신(新)부산시청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질 거라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이번에도···.’
주상욱은 그 동안 대인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그의 진짜 목적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임대인이라는 남자가 항상 놀라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방법이 있죠.”
대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주상욱은 분함과 동시에, 묘한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다들 임대인, 임대인 하는구나 싶달까.
“말씀드렸지만 무력으로 해결하는 건···.”
“오해가 있으신데, 저 싸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대인은 평화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꼬맹이들을 못 알아보게 변장시키면 돼요. 그다음 트라이브의 검문을 통과하는 거죠.”
“···변장입니까?”
주상욱은 조금 실망한 듯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신을 바라봤다.
13~4살 정도 돼 보이는 얼굴에,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더벅머리의 마른 소년.
“변장한다고 특징을 감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일단 어린아이고.”
“그거야 하기 나름이죠. 제가 이쪽은 또 전문이거든요. 한번 해봐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그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주상욱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인은 기막을 해제했다. 그리고 릴리를 불렀다.
“꼬맹이. 캐리어에 옷 몇 벌이나 챙겨 왔어?”
“음···. 다섯 벌? 왜?”
릴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신은 그 옆에서 돌처럼 굳어 있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서 그중에 한 벌만 꺼내와. 좀 큰 걸로.”
사태를 파악한 주상욱이 경악한 표정으로 대인을 바라봤다.
“설마···. 진심입니까?”
씨익. 대인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짙게 번져갔다.
“저 이런 걸로 농담하는 사람 아닙니다.”
“······.”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 다가갔다.
대인이 말했다.
“꼬마. 앞으로 우리가 지켜줄 테니까, 계속 길 안내해.”
“하지만 제가 있으면 여러분께 폐를···.”
“그래서 변장을 할 거야. 그럼 됐지?”
“···네?”
“너 어차피 갈 데도 없잖아.”
“어, 그게···.”
“됐고 일단 좀 씻자. 너 마지막으로 샤워한 게 언제야?”
“자, 잠깐만요!”
막무가내로 뻗쳐오는 대인의 손길에, 신은 거절할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신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이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이런 것까지 하게 될 줄은···.
“엄청 예쁘다!”
옆에서 릴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만큼 거울 속 소녀의 모습이 예뻤던 것이다.
하얀색 원피스에 청재킷.
긴 생머리(가발)는 허리까지 늘어뜨렸다.
옷이 좀 작았지만, 워낙 마른 몸매라 조금 짧은 스타일로 소화가 가능했다.
깨끗이 씻기고 보니 이목구비도 상당히 예쁜 편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데?”
대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소녀로 변신한 소년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건···.”
신은 거울 안의 소년, 아니 예쁘장한 소녀를 바라봤다.
“이건 진짜 아닌데···.”
소년은 어젯밤에 도망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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