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51
251화 은혜 갚으러 온 까치들(3)
화르르르르륵!
정면에서는 릴리가 만들어낸 불꽃의 군대가 적을 불태우고,
푸부부부북!
뒤에서는 대인이 수백 개의 검으로 칼날 폭풍을 만들어 피보라를 일으켰다.
수백 마리가 넘는 프로스트웜 무리는 앞뒤로 포위당한 채 빠르게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캬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아!
서리난쟁이들에게는 ‘서리신의 분노’라고까지 불리던 무서운 괴물들.
그러나 오늘은 임자를(?) 잘못 만나 멸종위기에 처했다.
“꼬맹이. 포위망 잘 유지해. 한 놈이라도 빠져나가서 나중에 새끼 치면 귀찮아지니까.”
나중에 AS까지 해줄 생각은 없는 대인이었다. 때문에 한 번에 확실하게 처리할 계획이었다.
츄릅···.
릴리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프로스트웜을 바라보며 침을 흘렸다.
“아저씨. 얘네 구워 먹으면 맛있을까?”
“진짜 먹고 싶어? 이따 서리난쟁이 왕한테 가서 맛있는 거 달라고 할 건데?”
“···바보야! 그런 말은 빨리 해야지!”
화르르르르륵!
의욕이 만땅이 된 릴리가 더 큰 화력을 일으켰다. 하늘에서 불벼락이 쏟아지고, 지상에서는 불길이 솟구쳤다.
상성의 우위?
압도적인 불꽃 앞에서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프로스트웜의 단단한 비늘이 녹아내리고, 살이 시커멓게 탔다.
“금방 정리하겠네.”
릴리 혼자서도 충분해 보였기에, 대인은 분열검을 거둬들이며 소녀가 싸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얼마 전보다 더 강해졌네.’
그동안 대인도 제법 강해졌지만, 지난 7개월간 릴리의 성장은 옆에서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헬게이트라는 대재앙을 앞두고, 릴리처럼 강한 전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가끔씩, 대인은 릴리가 만족을 모르고 세상 전부를 집어삼키려 드는 화마(火魔)처럼 보여서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호오···. 재미있는 것을 옆에 데리고 다니는군.
7개월 전, 마계의 대군주 바사고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바사고는 대괴수 아바돈의 몸 안에 자신의 ‘눈’을 심어서 대인을 관찰했고, 중간에 그 사실을 눈치챈 대인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후, 그들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마왕성을 지배할 수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였군.
-너는 아직 ‘그게’ 무언지 모르는 모양이지?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바사고는 마계 서열 3위의 강대한 마왕이었다.
, , 등의 이명을 갖고 있었다.
그 이명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바사고는 마계에서 가장 많은 지식과 왕성한 호기심, 탐구심을 지닌 존재였다.
그는 대인에게,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릴리에게 큰 호기심을 드러냈다.
-산 채로 데려와서 직접 해부해 보고 싶은데. 혹시 나한테 ‘그걸’ 넘길 생각은 없나?
바사고가 그 말을 한 순간, 대인은 아바돈의 얼굴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사실 그 후에도 몇 마디가 더 오갔고,
나중에도 몇 번 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시간 참 빠르지.’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서, 정말로 헬게이트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저씨! 다 해치웠어!”
프로스트웜을 남김없이 처리한 릴리가 쪼르르 달려와서 대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무지막지하게 강해지긴 했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한결같은 꼬맹이다.
피식 웃은 대인은 릴리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래. 빨리 가서 서리난쟁이 왕한테 맛있는 밥 차려달라고 하자.”
“머리 누르지 마! 아저씨가 자꾸 누르니까 키 안 크잖아!”
“네 키가 안 크는 걸 왜 내 탓을 해? 역시 좀 더 꾹꾹 눌러줘야···.”
“하지 말라고!”
“악! 야! 물지 마!”
둘이 평소처럼 별것 아닌 걸로 투닥거릴 때였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냉기를 느낀 대인은 곧장 릴리를 안고 옆으로 움직였다.
콰콰콰콰콰콰콰!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이내 공간 자체가 얼어붙었다.
[신성한··· 얼음을··· 내놔라―!]쇠를 긁어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얼음알갱이들로 이루어진 산발의 여자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벌써 쫓아왔냐.”
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대는 얼음산 정상에서 만난 서리여왕이었다.
[내놓지··· 않으면··· 없애··· 버리겠다···!]쩌저저저저저적-!
일대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허공에 얼음알갱이가 무수히 맺혔다. 그것은 탄환보다 빠른 속도로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퍼버버벙!
바닥에 구멍이 뻥뻥 뚫렸지만 대인과 릴리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성가신 게 따라왔네.”
“배고픈데 왜 자꾸 나와···.”
옆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히··· 내 얼음을···!]“말이나 좀 제대로 하든가.”
[죽··· 인··· 다!]그 순간 서리여왕의 몸을 이루던 얼음알갱이가 폭발하더니, 사방에 쓰러져 있는 프로스트웜의 시체로 나뉘어 들어갔다.
스르르르륵···.
녹아내리고 타버린 프로스트웜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놈들은 자기들끼리 뭉치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변신했다.
[크워어어어어어···!!]뒷발로 몸을 일으킨 존재는 거대한 공룡을 연상시켰다. 강인한 턱과 몸통만큼 긴 꼬리, 쩍 벌린 입안에서는 냉기가 뭉쳐 있었다.
우르르르르!
괴물의 포효에 얼음산엔 산사태가 일어났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진이 일어났다.
도시 하나쯤은 가볍게 멸망시켜버릴 것만 같은 대괴수의 출현.
“어휴.”
“하암.”
그러나 대인과 릴리는 나란히 서서 똑같은 포즈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괴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꼬맹이. 이 패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질리지 않냐?”
대인의 질문에 릴리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거 지금까지 아저씨랑 백 마리도 넘게 잡았으니깐.”
[[크워어어어어어어어!]]괴수의 세상을 떨어 울리게 하는 포효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시큰둥해 보였다.
심지어는,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
“아싸! 이겼다!”
“쳇···.”
괴수를 누가 상대할 것인지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했다.
*
*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리난쟁이 왕국의 왕이 거듭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눈앞에는, 왕국 제일의 골칫거리였던 프로스트웜을 전멸시키고 온 두 영웅이 있었다.
···며칠 굶은 거지들처럼 입안에 음식을 마구 밀어 넣고 있었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지구의 식사 문화는 무척 호쾌하군.’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서리난쟁이 왕은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얼음산에서 거대한 불길이 피어오른다는 보고를 받고, 병사들과 함께 달려간 그곳에서,
난쟁이 왕은 잿더미가 된 프로스트웜 시체 수백 구를 보았다.
“그 전설이···. 사실일 줄이야.”
난쟁이 왕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오래전부터 저희 왕국에 내려오는 한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언젠가 아주 먼 곳에서 영웅들이 찾아와···.”
와인으로 목을 축인 대인이 난쟁이 왕의 말을 끊었다.
“뭐, 다 아는 부분은 건너뛰자고요.”
“···예?”
“어디를 가나 그런 전설 한두 개쯤 있더라고요.”
난쟁이 왕에게는 평생의 소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가는 곳마다 비슷한 일을 해온 대인과 릴리에겐 일상 같은 풍경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에이. 괜찮아요. 우리도 다 필요해서 한 건데. 이런 거까지 일일이 다 기억도 못 하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은 대인은, 스쳐가듯 한마디 했다.
“뭐, 정 그러시겠다면야. 사실 여러분의 야금술에는 저희도 관심이 있고···.”
서리난쟁이 왕국은 지구로 치면 도시 하나 정도 규모의, 아주 작은 나라였다.
왕국보다 부족에 가까운 수준이고, 국력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전시킨 야금술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수준이 높았다.
“저희랑 기술 교류 안 하실래요?”
그리고 어딜 가건, 대인은 챙길 수 있는 건 알뜰하게 챙기는 편이었다.
“물론입니다! 저희야말로 지구와의 교류에 아주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서리난쟁이 왕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큰 기회다!’
며칠 전 이곳을 찾아온 대인은, 이미 지구의 문화와 기술에 대해서 서리난쟁이 종족에게 은근슬쩍 꽤 많이 퍼트린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이 골칫거리로 여기던 몬스터까지 전부 처리해줬으니, 외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호감도 MAX를 찍은 셈.
‘이것도 하다 보니 익숙해진단 말이지.’
그동안 여러 차원을 넘나들었기 때문일까. 대인은 능숙하게 다른 차원의 지도자를 구워삶았다.
저녁 식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서리난쟁이 왕국은 지구의 우방이 되어 있었다.
“그럼 정식으로 동맹 제안을···.”
“조만간 저희 쪽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식사 겸 외교를 끝낸 대인은 릴리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대인은 침대로 직행하려는 릴리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꼬맹이. 밥 먹자마자 눕지 말고 가서 씻고 와.”
“귀찮은데···.”
“빨리.”
릴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순순히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힌 순간, 대인은 침대 위로 다이빙했다.
“흐어어···.”
피곤했다.
온몸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아이고오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개고생을···.”
대인은 영웅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그저 빨리 은퇴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게 꿈이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냐고···.”
그 소박한 목표가, 우주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행복한 은퇴 라이프를 즐기라면, 일단 지구로 쳐들어오는 마왕 놈들부터 다 쳐 죽여야 하는 것이다.
“어휴.”
대인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잠시 빈둥거리다가, 왼손의 시계를 얼굴로 가져왔다.
‘지구 쪽 일은 잘 되고 있으려나.’
띡띡띡.
몇 번의 간단한 터치로 초월의 별을 활성화하자, 눈앞에 넓은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잠시 후, 홀로그램 화면이 마왕성 내부를 비췄다.
회의 중인 연합 사령부가 보였다. 각국의 지도자들과 낯익은 얼굴의 초인들이 보였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심각해 보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게이트 수치를 훨씬 초과했습니다.
-이상 현상이라고 밖에는···.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준비할 시간이 며칠밖에 없는데···.
사람들의 표정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대인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 현상이라고?”
며칠 후, 미국 그레이트 베이슨 사막에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헬게이트’가 열린다.
엄밀히 말하면 ‘마왕급’ 헬게이트는 아니지만, 수많은 마수, 괴수, 고위 악마들까지 등장하는 대재앙급 게이트였다.
마왕들이 지구의 힘을 가늠하기 위해 보내는 일종의 선발대.
그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해야만, 인류는 헬게이트를 버텨낼 희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정보는 충분히 줬을 텐데?’
띡띡띡-
대인은 스크린을 터치해 카메라 위치를 변경했다.
마왕성은 인류 최고의 슈퍼컴퓨터 시스템으로 진화했고, 대인은 다른 차원에서도 초월의 별을 이용해 마왕성을 원격으로 ‘어느 정도는’ 조종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홀로그램 화면은 그레이트 베이슨 사막을 비췄다.
“저건···.”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 그 위에 수천 개에 달하는 게이트가 누에고치처럼 닫힌 형태로 생성돼 있었다.
게이트의 크기는 다양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정도로 작은 것부터, 고층 빌딩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것까지.
그 개수는 한 달 전 마왕성 슈퍼컴퓨터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바사고. 설마 그 자식이···.”
대인을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로 마왕성 슈퍼컴퓨터에 접속해 게이트 수치를 확인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꿀꺽.
대인은 침을 삼켰다.
‘이 정도면···. 선발대 정도가 아니라 마왕이 직접 올 수도 있다는 얘긴데.’
하지만 그런 무리수를 둘 만한 마왕이 있던가?
아직까지 헬게이트는, 마왕급 존재가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로 확장되지 않았다.
그걸 억지로 찢고 들어오려면,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힘의 상당 부분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발람 말고 그런 멍청한 놈이 또 있다고?’
대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게이트 수치는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걸까?
마왕 중 하나가 온다면 누가 오는 거지?
“아저씨.”
이번에도 바사고가 개입한 걸까? 아니면 다른 대군주 중 하나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저씨?”
이렇게 첫 전투가 시작되면, 인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으리라는 것.
“망할···.”
“아저씨!”
“···어? 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옆을 돌아보자, 릴리가 머리의 물기를 말리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머리에서 은은한 사과 향이 났다.
“아저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지구 쪽에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예상했던 것보다 게이트 반응이 훨씬 강해.”
릴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우리가 도우러 가야 하는 거 아냐?”
“음···.”
대인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신의 힘의 깃든 보석을 다 못 모았는데.’
마왕들을 상대할 비장의 무기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지금 가면 베이슨 그레이트 사막에 나타날 적들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마지막 보석을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지금부터는 꼬맹이랑 따로 움직여야 하나?’
대인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삐삐삐삐-!
초월의 별에서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뭔가 특수한 일이 발생했을 때만 저런 알림이 울린다는 걸 알기에, 릴리의 표정은 울상이 되었다.
“안 돼! 또 무슨 일이야!”
그런데, 그 순간 대인의 얼굴에는 오히려 환한 미소가 맺혔다.
“뭐야. 둘 다 한 달은 더 걸릴 거라더니···.”
그게 엄살이었던 건지, 아니면 대인을 돕기 위해서 준비를 서두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대인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
“꼬맹이. 우린 아직 지구에 안 가도 되겠다.”
“진짜?”
“어. 지원군이 곧 양쪽에서 도착할 거거든.”
양쪽 다, 다시 보면 무척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
서울 외곽.
지이이이이이이잉!
갑자기 발생한 대규모 게이트 반응에, 서울에 남아있던 초인들과 경찰 병력이 모여들었다.
“하필 이럴 때···.”
최정예라 불릴 수 있는 초인들은 대부분 미국에 가 있었다.
때문에 서울에 남은 병력은 갑자기 발생한 대규모 게이트에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게이트로부터 하나의 인마(人馬)가 걸어 나왔다.
다그닥다그닥.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백마.
그 위에 타고 있는 여인은, 진부하게 표현하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녀였다.
“···이곳이 지구로군.”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에 더해, 끝이 살짝 뾰족하게 올라간 귀.
머리 위에 쓴 왕관은 태어날 때부터 쓰고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고, 행동이며 말투 하나하나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와···.”
“예쁘, 다···.”
몬스터를 기다렸던 초인들은, 그 여인을 본 순간 정신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넋을 놓고 바라봤다.
“전하.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뒤로 물러나주십시오.”
여인을 따라 게이트에서 나온 중년의 기사가 여인의 오른편에 서며 주위를 경계했다.
“레너드 경. 오늘만큼은 좀 봐주시는 게 어때요?”
여인의 왼편에서는 마법사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말했다.
“전하께서 하루라도 이곳에 빨리 오려고 얼마나 애쓰셨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오늘은 안 하던 화장까지 하시고···.”
그러자 선두에 선 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호킨 백작! 오해할 만한 말은 부디 삼가시오!”
호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노기사 레너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레너드는 혀를 쯧쯧 찬 후 자신의 주군에게 말했다.
“전하. 이곳의 백성들이 전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크흠. 알았소.”
헛기침을 한 여인은,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구인들(거의 다 남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인은 힉스 왕국의 국왕. 앨리나 폰 레인하르트라 하오.”
“아···. 예···.”
게이트의 현장 책임자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앨리나는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방금 전 얼굴을 붉히던 소녀는 사라지고, 그녀의 몸짓 하나 목소리 하나에 자연스러운 위엄이 배어 나왔다.
“동맹의 요청에 따라 본국에서 선별한 기사 1천과 병사 2만, 마법사 300. 그리고 전투 교육을 받은 엘프 4천과 함께 왔소. 이들은 선발대요.”
게이트 안에서 말을 탄 기사들과 중무장한 보병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힉스 왕국.
가이아 대륙의 동남쪽에 있는 작은 나라로, 2년 전까지만 해도 내전으로 다 망해가던 나라였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상황은 바뀌었다.
내전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왕녀는 엘프의 숲으로 도망쳤고, 이후 엘프들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정당한 왕위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왕성에서 도망쳐 왕이 되어 귀환하기까지의 일은, 가이아 대륙에서는 이미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앨리나 폰 레인하르트.
이후 그녀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치고,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힉스 왕국을 부흥으로 이끈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전해주시오.”
1년 만에 자신의 왕국을 되찾은 소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돕기 위해 왔다고.”
***
비슷한 시각, 경기도 일산.
지이이이이이이이잉!
격렬한 게이트 반응에, 긴급 호출을 받고 온 초인들과 경찰 병력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안에서 뭐가 나오려고···.”
초인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게이트를 바라봤다.
찢어질 듯 거세게 출렁거리는 게이트.
잠시 후 저 안에서 나올 존재가, 엄청난 양의 마력을 품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격 준비.”
현장 책임자의 말에 군인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눴다. 초인들은 무기를 뽑아 들고 바리케이드 바로 뒤에서 대기했다.
다들 바짝 긴장한 상태로 게이트를 주시할 때였다.
저벅저벅.
안심하라는 듯, 한 청년이 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선한 인상에, 곧은 허리 하며 단정한 의복, 명문가에서 교육받은 것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허어. 이곳이···.”
청년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노인처럼 뒷짐을 진 모습이 특이했다.
검 한 자루 갖고 있지 않았지만, 마치 스스로가 잘 벼린 검인 듯 정돈된 예기를 뿜어내는 청년.
그는 무림에서 검성(劍星)이라 불리는 세 명의 전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형님. 혼자서만 냉큼 뛰어드는 것이 어디 있소.”
“대형. 이곳에 와보고 싶었던 마음은 알지만 본인의 위치와 체면도 생각하셔야···.”
커다란 도를 허리에 찬 덩치 큰 중년인은 툴툴대며, 등에 다섯 자루나 되는 창을 멘 중년인은 잔소리를 하며 처음 나온 청년의 좌우에 섰다.
검성(劍星) 모용혼
도왕(刀王) 적군양
신창(神槍) 마중기
무림에서는 살아있는 신으로까지 모셔지는 세 명의 절대고수가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저건 무림인 복장인데?”
그들의 정체를 짐작조차 못 하는 지구인들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 게이트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왔다.
“스승님! 멋대로 먼저 가시면 어떡합니까!”
검성은 자신을 스승이라 부른 청년을 짓궂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청운아. 맹주인 너야 떠맡은 식구가 많지만 나는 자유인이 아니더냐? 그리고 네 출정식 연설이 너무 지루했다. 그리 어설퍼서야···.”
“그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저를 무림맹주에 추천하신 분이 할 말입니까!”
무림 역사상 최연소 무림맹주.
무당신룡 청운은 자신의 스승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의 뒤로, 남궁세가의 무사들과 검황문의 무사들, 무림맹의 정예들이 게이트에서 걸어 나와 도열했다.
“오라버니···.”
“사위! 내가 왔네!”
1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기도를 뿜어내는 남궁현과 진 노인의 모습도 보였고,
‘주군. 속하가 이곳에 왔습니다.’
그동안 오대세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암중에서 무당신룡이 새 무림맹주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쓴 남궁정천(비영)의 모습도 보였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청운은 맹의 무사들을 정렬시킨 후,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지구의 초인들에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친우는 지구에 오면 꼭 이렇게 물어보라고 했다.
“이곳이···. 파천검제의 나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