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 마왕의 탄생(2)
같은 입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천지 차이였다.
베리트는 스스로를 마왕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존재감을 사방에 드러내고 있었다면,
고오오오···.
바알은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왕들의 마왕.
마계의 진정한 지배자.
가장 높은 권좌에 오른 후 단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기에, 바알은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목이 아프군.]바알은 하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계토끼를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주변의 마기가 요동치며 묵직한 압력이 일대에 발생했다.
쿠구구궁···!
그 압력은 릴리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모습에 바알이 감탄한 듯 미간을 모았다.
[호오···.]오히려 반응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히익···!”
“커헉···!”
털썩털썩.
멀리서 마왕 후보자들의 싸움을 구경하던 마족들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몸을 덜덜 떨었다.
‘주변에 존재하는 마기를 의지만으로 다루고 있어. 이 정도면 세계의 규칙에 간섭하는 수준인데···.’
아브락사스가 굳은 표정으로 베리트의 몸에 강림한 바알을 바라보았다.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막상 바알이 가진 권능의 일부를 엿본 순간, 경각심을 훨씬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알의 시선이 릴리에게 집중된 틈에, 그녀는 자신의 모든 지식과 마법적 수단을 동원해 바알을 분석했다.
우우웅!
그녀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베리트의 몸에 깃든 건 바알의 혼 전체가 아닌 일부로군. 존재 맹세를 통해서 놈의 몸에 언제든지 깃들 수 있도록 마법적인 장치를 만들어둔 거야.’
‘혼의 흔적이 남쪽으로 이어져 있어. 아마 본체가 있는 쪽이겠지. 잠깐만, 그런데 한 곳이 아니잖아? 왜 이렇게···. 여러 곳에 퍼져 있는 거야?’
‘마계 북부 전체가 바알이 지배하는 영역에 속한다고 했지. 설마···.’
순간 아브락사스는 어떤 가설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자세한 것은 조금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생각한 것이 맞다면 앞으로의 싸움에서도 큰 변수가 될지 모른다.
‘어쨌든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바알은···.’
한없이 신에 가까운 존재다.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지? 하찮은 종족이 이만한 성장을 이루다니···. 이 마계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인가.]하지만 ‘가까운’ 존재라는 것은, 아직은 불완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쾌한 듯 호기심이 뒤섞인 바알의 말투에서, 아브락사스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릴리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어.’
그건 아브락사스의 위장 마법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했고, 동시에 바알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마왕 자리를 노릴 정도로 강력한 마족이 말을 못 할 정도로 저능할 리는 없을 터인데···.]“할 줄 알아.”
바알의 도발에 릴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브락사스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스. 이제 어떻게 해?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직은 바알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하지만 릴리는 마왕을 말로 상대할 만큼의 노련함이 없었다.
섣불리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아브락사스에게 먼저 물어본 건,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아브락사스가 릴리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단 저 녀석도 당장 덤벼들 것 같진 않으니까. 싸우지 말고 대화로 정보를 조금 더 캐보자.
-응. 알았어.
그때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한 바알이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몇 번이나 네 이름을 물어보게 할 셈이지?]릴리는 미리 준비해둔 가명을 댔다.
“내 이름은···. 니바니바다!”
마계토끼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마족들이 웅성거렸다.
“니바니바···.”
“이름부터 강한 힘이 느껴지는군···.”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야.”
사실은 ‘바니바니’를 거꾸로 발음한 것에 불과했다.
상대의 이름을 알게 되자, 짜증스럽게 찌푸려졌던 바알의 표정도 조금 펴졌다.
[니바니바라···. 다행히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은 아니었군.]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동시에 일대를 짓누르던 마력이 흩어지면서, 숨이 막혀 컥컥대던 마족들도 겨우 다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물론 마족들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마자 곧바로 납작 엎드렸다.
자신들 앞에 나타난 존재가 누구인지, 베리트의 마지막 외침으로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마족들이 덜덜 떨며 바알을 경배했다.
“바, 바알이시여···.”
“가장 위대한 왕이시여···.”
바알은 그 모습을 흡족한 듯 둘러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납작 엎드리기는커녕, 자신에게 허리조차 숙이지 않은 마족이 셋이나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건방진 것들이 자주 보인단 말이지.]스멀스멀 피어오른 마기가 날카롭게 변해 그들에게 향하려는 순간,
“내 부하들이야. 건드리지 마.”
릴리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토끼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바알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마기를 거둬들였다.
예상외로 호의적인 말투에, 격렬한 전투를 예상했던 마족들은 의아함에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바알은 웃고 있었다.
[니바니바, 마왕이 되려 하는 자여. 내 눈으로 직접 보니 네가 베리트보다 더욱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하지만 그 웃음은 지극히 오만하고 교활했다.
바알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네가 마왕이 되도록 허락하겠다. 허나, 그 전에 내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 것이다.]“······.”
바알은 베리트의 소환에 응해 이곳에 강림했으나, 베리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둥실.
바알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의 등에서 12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촤라라라락!
그것은 악마의 날개라기보다는 색깔만 검은 천사의 날개처럼 생겼다.
활짝 펼쳐진 날개는 하늘을 다 가릴 듯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 상태로 바알은 지상의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가 마왕성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 성의 전 주인이었던 벨리알은 나의 친우이자 충신이었다. 그가 연합군에 의해 소멸한 후로, 나는 그에 대한 복수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아브락사스의 주머니 안에서 벨리알이 [저 가증스러운 놈!]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아브락사스가 미리 소리를 차단한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마계를 대표하는 왕으로서, 벨리알의 후임이자 이 땅의 새로운 왕이 되려 하는 니바니바에게 그 복수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바알은 자신을 소환한 베리트를 외면했다.
그 대신 더 마음에 들어 보이는 장기말을 선택했다.
심연과도 같은 시선이 릴리를 향했다.
[니바니바여. 내게 ‘존재 맹세’를 하여, 우리의 동맹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증명하길 바란다.]“······.”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결국은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충성하지 않으면 동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동맹이 아니라면 마왕이 될 수 없을 거라는 경고.
웅성웅성.
‘뭐야. 결국 바알 님의 허락을 받아야 마왕이 될 수 있다는 소리야?’
‘젠장. 그럴 거면 시험은 왜 봐. 그냥 자기 마음에 드는 놈한테 마왕을 시키지.’
‘원래도 그러려고 했는데, 니바니바 님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은 거잖아.’
‘아무리 바알 님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네···.’
납작 엎드려 있던 마족들은 불편한 시선으로 바알을 훔쳐보았다.
마왕. 모든 마족들이 갈망하는 지위.
끝없이 투쟁하고 쟁취한 끝에 달성할 수 있는 달콤한 열매.
바알은 그 시험장에 와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게 복종해야 마왕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바알이 마계 제일의 권력자라고 한들, 그 행동은 도가 넘은 부분이 있었다.
바알이 나타난 후 계속 침묵하고 있던 마왕성조차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바알 님이라도 이 이상 시험에 관여하시는 것은···.}
[무엇이 불만인가? 내가 자격이 없는 자를 마왕으로 만들겠다고 했나?]{그것은 아니지만···.}
싸늘하게 노려보는 바알의 시선을, 마왕성은 데구르르 눈알을 굴려 피했다.
바알의 손에 부서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브락사스는 아까부터 계속 릴리와 전음을 나누고 있었다.
-존재 맹세를 하면 절대 안 돼.
-그럼 어떻게 해? 싸워?
-우리에겐 명분이 부족해. 잠깐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
-응···.
이 자리에서 릴리가 바알에게 를 하면, 바알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그럼 북쪽에서 몰래 세력을 규합해 바알을 위아래에서 포위한다는 작전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럼 바알과 싸우는 쪽을 택한다면?
‘여기서 우리가 바알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워. 바알은 벨리알의 복수, 차원 허브 침공을 명분으로 삼고 있어. 거절한다면 의도가 의심될 거고, 우리의 정체를 마족들에게 들킬 확률이 높아.’
‘정체를 들키지 않고, 존재 맹세를 위장하는 방법은 없을까? 마법으로 더미(dummy)를 만들어 계약을 대행하게 하면···. 바알이 그런 수법에 속을 리가···.’
생각할수록 복잡한 문제였다.
게다가 그들에겐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싶군.]“음···.”
릴리가 팔짱을 낀 채 고민하는 가운데, 아브락사스는 천무극에게 미리 전음을 보냈다.
-무극. 곧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어.
-준비라면 진작부터 되어 있소이다.
천무극은 바알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투쟁심으로 활활 끓어오르고 있었다.
-일단 내가 협상에 나서 볼게. 두 사람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고···.
-아니. 이건 내가 할래.
-뭐?
-아스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단호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낸 릴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왜 네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릴리야?
릴리는 이번에는 아브락사스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아스는 소중한 친구이자 선생님이자 조언자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가 내리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무슨 의미지?]릴리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 돌파였다.
“난 내 힘으로 마왕이 될 거야. 네 허락 같은 거 필요 없어.”
[지금 무슨 말을···.]저벅.
릴리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소녀의 두 눈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마계의 법칙은 간단하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거머쥔다.
스스로의 힘에 자신이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굽힐 필요가 없었다.
설령 그 상대가 바알이라고 해도 말이다.
필요한 건 명분이 아니라, 오직 힘.
[지금 나와···. 싸우겠다는 것이냐?]바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가레스도 아니고, 바사고도 아니다.
마계에 저런 생김새가 어울리나 싶을 정도로 순하게 생긴 종족.
고작해야 토끼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불꽃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이 날아오른 릴리가, 바알을 향해 날아갔다.
[···이렇게 불쾌한 기분은 오랜만이군.]베리트의 얼굴을 한 바알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는 12쌍의 날개를 한번 접었다가 크게 펼쳤다.
-콰콰콰콰콰콰콰!
무시무시한 마력을 사방으로 떨쳐내며, 바알은 악몽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리트. 마왕의 자리는 너에게 주마.] [······.]지금껏 바알에 의해 억눌려 있던 베리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바알은 장기 말의 대답 따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건방진 반역자를 징치하기 위해 막대한 힘을 끌어 올릴 뿐.
부글부글.
바알의 기분을 대변하듯, 대기 중의 마력이 거칠게 끓어올랐다.
[바사고에, 아가레스에, 인간 놈들까지 마계를 침공하니···. 이제는 모두가 내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마왕성의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쿠르릉! 쿠르릉!
벼락이 내리칠 때마다, 지상에 거대한 재앙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마계의 주인이 누구인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겠다.]잠시 후 마계의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지저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