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80
80화 배신자 고블린
지난번에 수정구로 연락했을 때, 레드 고블린은 대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접선 장소에 도착하면 먼저 수정구를 사라. 내가 알려준 대로 수정구에 마력을 주입하면 조직에서 널 찾아올 거다.’
‘그 다음 조직원을 따라가 용건을 말해라. 레드 고블린과 통신을 해야 한다고. 그럼 그들이 나를 연결해줄 거다.’
그때 대인은 이렇게 물었었다.
‘저에 대해서 물어보면 뭐라고 합니까? 사실대로 말할까요?’
레드 고블린은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니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마라!’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그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 돼 있었다.
1. 조직원들끼리도 모든 정보를 다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것.
2. 레드 고블린은 안셀(대인의 가명)에 대해서 조직에 절대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
왜냐하면, 외부인에게 조직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중죄일 테니까 말이다.
즉, 앞으로 몇 시간 정도는 사기를 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레드 고블린. 들어는 봤겠지?”
가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노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어찌 모르겠는가.
그 분께서 몬스터 가면을 하사한 ‘사제들’ 중 한 명을 말이다.
몇 년 전, 고블린이 불의 아이를 잃어버린 죄로 지저감옥에 끌려갔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최근에 복귀해 ‘레드 고블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도 말이다.
노인은 대인의 검에 선명하게 자라난 오러 블레이드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지저감옥의 실험실이 대단하긴 한가 보군. 고블린은 사제들 중에서 가장 약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노인이 한층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불의 아이를 쫓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노인은 이제 완전히 대인을 레드 고블린이라고 믿었다.
대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헌데 이곳에는 어쩐 일로···.”
순간 가면 속의 두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터져 나왔다.
“정말 모르겠나? 아직도?”
대인은 의미심장하게 노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조직의 간부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뭘까. 그것도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이렇게 몰래 잠입하듯이 말이다.
그 순간 노인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혹···. 불시 감찰입니까?”
“······.”
레드 고블린은 말없이 노인을 바라봤다.
그 침묵에 불안해진 노인이 다시 말을 꺼내기 직전에, 생각을 정리한 대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역시···. 누군가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레드 고블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속의 대인은 예상 밖의 행운에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대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석구석 안내해라. 내 눈으로 직접, 전부 다 확인하겠다.”
***
대인의 예상대로, 도박장 지하 4층은 판데모니움의 자금줄이자 지부 중 한곳이었다.
노인은 그를 숨겨진 방들로 안내했다.
첫 번째 방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현금 보관소입니다. 도박장의 수입은 철저하고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대인은 노인이 가져온 두꺼운 장부를 빠르게 넘겨보았다. 현실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대인은 돈보다 돈이 사용되는 용도와 자금이 흘러가는 경로에 더 주목했다.
‘대륙 곳곳에 돈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이야.’
도대체 이만한 조직이 전생의 가이아 대륙에서는 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걸까?
대인은 그 의문을 머리 한쪽에 잘 넣어두며 말했다.
“다음은 어디지?”
노인이 안내한 두 번째 방은 다른 의미의 보물창고였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검부터, 신성력을 뿜어내는 갑옷, 정령의 힘이 느껴지는 망치, 환수가 봉인된 액세서리까지.
방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아티팩트, 그리고 정련된 마정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도박장에서 담보로 잡힌 물건들 중에서도 상등품만 남겨놓은 것입니다.”
방에는 수많은 아티팩트가 있었지만, 대인의 시선은 아까부터 한 곳에만 머물러 있었다.
‘영혼석이잖아?’
마정석 산꼭대기에 붉게 빛나고 있는 보석은 분명 영혼석이었다.
그것도 두 개나
대인은 왼손에 찬 시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나는 시계에 먹이고, 하나는 지구로 돌아갈 때 차비로 쓰면 되겠네.’
대인은 이 방의 위치와 구조를 확실하게 기억해두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들러야 할 테니까.
“다음 방으로 가지.”
세 번째 방에는 약에 취한 귀공자들이 침대 위에서 반라의 여인들과 뒹굴고 있었다.
발정 난 짐승처럼 헉헉대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꼬맹이는 안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가 물었다.
“저 놈들은?”
“대부분 귀족 자제들입니다.”
노인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도박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그러다 마약에 손을 대고, 그렇게 저희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인은 약에 취해 잠들어 있는 귀족 자제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망치는 녀석들에게 줄 동정심은 없었다.
칭찬을 받은 것이 기쁜 듯, 노인은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지난 몇 년간 저희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노인이 성큼성큼 앞서가며 안내했다.
지하 도박장 4층 끝에는, 거대한 석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대인은 그 너머에서 지독할 정도로 짙은 살기와 피 냄새를 맡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노인이 석벽 위에 손을 올리고 짧게 주문을 외우자, 잠시 후 쿠구구구구궁! 하고 석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 안은 넓은 공동이었는데, 정육점의 불빛처럼 붉은 빛이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지독한 비린내와 피 냄새가 풍겼다.
크르르르르!
짐승의 울음소리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쇠창살이 보였다. 그 너머 어둠속에서 맹수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크르르르르!
마치 몬스터 박물관에 온 것만 같았다. 쇠창살 안에 갇힌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보였다.
그리고 쇠꼬챙이나 채찍으로 몬스터를 조련하는 조직원들도 보였다.
“몬스터 표본입니다. 이 앞쪽에는 특별한 것은 없고···. 더 안쪽으로 가시지요.”
노인은 대인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몬스터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대신 부속별로 나뉜 시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쇠창살 안에 어린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르르···.”
“으으으···.”
“끄륵···.”
아이들은 하나같이 괴기스러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몸에 몬스터의 팔이나 다리를 이식했거나, 등에 날개를 붙였거나, 심지어 입을 찢고 몬스터의 이빨을 이식한 경우도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
“살, 려, 주세요···.”
대인은 키메라로 개조당한 아이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노인에게 말했다.
“이 애들은 다 어디서 구해왔지?”
노인이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쟁고아들을 데려오거나, 가난한 부모들을 적당히 구슬려서 사오지요.”
“······.”
그 순간 대인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부술 듯이 움켜쥐었다.
“그래. 여전히 그 방법을 쓰고 있었네.”
“저···.”
레드 고블린의 분위기가 냉랭해 보이자, 노인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측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보신 것들은 전부 실패작입니다. 성공작은 저 안쪽에 있습니다.”
대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기대할게.”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지막 쇠창살 앞에 도착했다.
비쩍 마른 소년소녀들이 쇠창살 안에 갇혀 웅크리고 있었다.
“······.”
“······.”
하나같이 팔다리, 그리고 목에 구속구를 단 아이들.
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인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이 녀석들은 전부 성공작입니다. 신체에 아무런 반발작용 없이 이식을 성공했고, 보시다시피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인간이랑 다를 바가 없는 상태입니다.”
노인은 품에서 채찍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주면 흉측한 본성을 드러내게 할 수 있지요.”
노인이 손짓을 하자, 쇠창살 양옆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쇠창살문을 열었다.
끼익- 쿵!
문이 열리자 아이들이 놀라서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으, 으으···.”
“또야···?”
벽에 바짝 붙어서 오들오들 떠는 아이들. 노인은 뱀 같은 눈으로 그들을 쭉 훑어보더니, 한 소년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지크. 이리 나오너라.”
“······.”
소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소년이 머뭇거리자, 노인이 클클 웃으며 말했다.
“싫으면 네 동생한테 대신 나오라고 할까?”
“그, 그냥 제가 할게요.”
옆에 있는 동생을 바라 본 지크는, 눈을 질끈 감고 철창 밖으로 나왔다.
털썩.
이미 익숙한 듯, 지크는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좌우에서 조직원들이 그의 팔다리의 구속구를 풀었다.
노인이 머리 위로 채찍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님도 오셨는데 이번에는 한번 성공해보자꾸나.”
촤아악!
채찍이 사정없이 지크의 몸을 후려쳤다.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이를 악물고 참아내던 소년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푸화아악!
폭발하듯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온 몸에서 은빛 털이 자라났다. 입은 개의 주둥이처럼 길쭉해지고 그 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자라났다.
늑대인간. 그 중 최강이라는 은빛부족.
그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변신한 지크가 고개를 치켜들고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포효가 공동 안을 뒤흔들었다. 지크는 곧장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쯧. 아직도 주인을 못 알아보는군.”
혀를 찬 노인이 들고 있던 채찍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치지지지지직!
크워어어어어어!
온 몸을 관통하는 전기충격. 바닥에 쓰러진 지크는 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벗기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구속구는 목을 더 죄여올 뿐이었다.
“크으으으아악!”
노인은 손가락을 채찍의 버튼에서 떼지 않으며, 대인을 돌아봤다.
“아직까지 복종심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만, 그것과 몇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대량생산도 가능해질 겁니다.”
“끄으윽···.”
스르르륵.
잠시 후 늑대인간이 다시 소년으로 돌아왔는데도, 노인은 버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주인을 못 알아본 벌이다. 손님까지 오셨는데 망신을 시키다니···.”
혀를 찬 노인은 고개를 돌려 철창 안을 바라봤다. 겁먹은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노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한 마리 더 해봐야겠군.”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크의 여동생이었다.
“한나. 이리 나오너라.”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던 지크가 눈을 부릅떴다.
“제가 대신 했잖아요···!”
“실패했으니 무효지.”
퍼억!
노인은 지크를 옆으로 걷어찼다. 그리고 조직원들을 시켜 한나를 꺼내오게 했다.
부들부들 떨며 밖으로 나온 한나는,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의 지저분한 빨간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다.
“너는 오빠랑 달리 참을성을 좀 보여라. 그래야 내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
그때였다.
노인 옆으로 다가온 대인이 그의 채찍을 휙 빼앗아 들었다.
“재밌어 보이네. 나도 한번 해보려고.”
“아, 예···.”
그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대인은 소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잘못, 했어요···.”
소녀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작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하지도 않은 잘못을 빌었다.
‘꼬맹이도 이런 곳에 있었겠지.’
대인의 처음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레드 고블린을 사칭해 조직의 정보나 좀 캐고, 돌아가는 길에 영혼석이랑 아티팩트 몇 개나 훔쳐갈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도 레드 고블린을 엿먹이기엔 충분했으니까.
굳이 이곳에서 피곤하게 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대인이 손을 뻗자 소녀가 움찔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툭!
목을 죄이던 구속구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소녀는 놀란 얼굴로 대인을 올려봤다.
“왜···.”
뒤로 물러났었던 노인이 놀라서 대인에게 걸어왔다.
“그걸 떼면 곤란합니다!”
“안 곤란해.”
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자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노인이 보였다.
대인은 채찍을 휘둘렀다.
휘리릭!
목이 휘감긴 노인이 경악해서 눈을 부릅떴다.
“컥! 무, 무슨···.”
동시에, 곳곳에 숨어 있던 기척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지만, 다 함께 덤빈다면 꽤 곤란해질 수도 있는 수준.
‘게다가 진짜 강한 녀석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지.’
알고 있었다.
귀찮고 피곤해질 거라는 걸.
하지만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대인은 채찍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콰드득!
노인이 목이 허공으로 뜯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