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91
늦게 온 벌칙으로 인해.
노은하는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벌주를 마셔야 했다.
다음은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벌주를 몇 잔쯤 마셨을 때쯤.
은하는 혼비백산한 분위기 속에서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그러고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들을 찾았다.
“은하야! 여기다, 여기!”
“아….”
바로 그때 손을 흔들며 은하에게 소리치는 사람이 한 명.
레귤러스 클랜로드 구연수였다.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테이블은 클랜원들이 은연중에 피하고 있던 자리였다.
은하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구연수가 저리도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기에 별 수 없었다.
“오, 은하야! 그래! 내가 주는 술도 한 잔 받아야지!”
“안녕하세요….”
은하가 구연수의 자리를 찾자.
간부들이 재빨리 어디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왔다.
은하는 자리에 앉았고.
간부들에게 둘러싸인 은하는 이제 꼼짝없이 잡힌 신세가 되었다.
“자, 마셔! 마셔!”
“이제 우리랑 이거 다 마실 때까지 자리 못 떠나는 거 알지?”
“…….”
아주 작정한 것 같은 간부들.
은하는 그들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거대한 술병을 보고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은하에게 술을 먹였다.
그러다 구연수가 말한 것이다.
“─그래, 은하야. 클랜생활은 어땠니?”
“…좋았어요. 누나랑 연화 누나가 잘 챙겨주기도 했고…. 역시 S급을 인가받은 클랜이라서 그런지 시설도 꽤나 좋고, 체계적이고….”
“그러엄! 우리 클랜이 어떤 클랜인데!”
“…….”
클랜로드가 클랜생활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은하는 구연수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을 꺼냈다.
구연수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은하야.”
“네.”
그러고는 그가 분위기를 잡고서는 은하를 부른 것이다.
은하는 직감했다.
본론이 나오겠네.
그동안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서 슬슬 제안할 것 같기는 했는데….
구연수의 목적이야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너만의 파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은하가 예상하고 있던 말을 꺼낸 것이다.
구연수가 이제는 플레이어 업계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네가 우리 클랜에 입단한다면…, 레귤러스클랜은 네가 원하는 만큼 지원해줄 용의가 있어. 네가 최대한 클랜의 간섭을 받지 않게끔 편의를 봐줄 수 있고. 네가 만드는 파티에 클랜의 해가 되지 않는 입장에서, 아무 간섭도 하지 않을 거라 약속할 수 있어.”
레귤러스 클랜로드의 제안.
간부들은 말없이 술을 기울였고.
은하는 자신을 영입하려고 하는 구연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네가 파티에 넣는 사람들도 아무 조건도 없이 클랜에 입단시킬 생각도 있어. 그럴 경우에 실력이 검증된 파티원은 8:2, 아직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파티원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후에 정산비를 재조정한다는 조건으로 7:3, 그리고 너는 9:1의 정산비를 보장할게.”
“…….”
파격적인 제안이 따로 없었다.
일반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견습이란 명목으로 6:4, 유망주의 경우에는 7:3의 정산비를 계약조건으로 클랜에 입단했다.
하지만 구연수는 은하에게는 9:1, 그의 친구들에게는 최소 7:3, 최대 8:2의 정산비를 보장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율적인 행동권은 물론이고…. 설마 인사권까지 준다고 할 줄이야.
구연수는 은하가 원하는 사람들을 조건 없이 클랜에 입단시키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자존심이 높은 S급 클랜이 정산비, 자율 보장권, 독립 행동권, 심지어 인사권까지 내준 것이다.
은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매력적이기는 해.
매력적이기는 한데….
은하는 침묵했다.
구연수의 제안이 무척이나 매력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구연수가 아무리 은하에게 많은 권한을 내준다고 해도─.
─결국 내 윗대가리는 이 사람이랑 여기 있는 간부들이란 건데….
자율 보장권을 받는다고 해도.
독립 행동권을 받는다고 해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런 대우를 받으면….
기존 클랜에 있는 사람들의 반발도 무시하지 못할 테고….
더군다나 그런 대우를 받게 되면 기존에 입단해 있는 클랜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는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매력적이었으나─.
“─한 번 생각해볼게요.”
은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파격적이고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나 결국 상급자의 명령을 우선시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 걸린 것이다.
누군가의 밑에 들어간다면 구태여 조직을 관리할 필요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내가 과연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수 있을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구연수에게 답을 미루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구연수는 노은하의 생각을 어느 정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래…, 한 번 생각해보렴. 근데 너무 부담을 가지지 말아줬으면 해.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내가 널 고깝게 보지 않을 거니까. 앨리스그룹의 총애를 받는 너한테 내가 뭘 어쩌겠냐.”
“…네. 말씀 감사합니다.”
구연수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털털하게 대했다.
은하는 구연수의 답변에 고마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 마셔! 마셔!”
“이거 다 마실 때까지 이 자리에서 못 떠나는 거 알지?”
“하하….”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은하는 테이블에 있는 술이 모두 동이 날 때까지 고인물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란 참으로 고역이었다.
…진짜 이제는 결정해야 하는데.
어느 클랜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파티를 만들 건지, 클랜에 들어가 어느 정도 대우를 받으면서 파티를 만들 건지….
아니면─.
─직접 클랜을 만들든가.
노은하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
이후로도 은하는 벌주를 마시면서 배를 채워야 했다.
“선배님들! 그러지 마시고 저하고 하양이가 노래를 부르는 걸로 때워주세요! 제 동생 그만 괴롭히고!”
“은하 조금만 마시게 해주세요. 네? 선배님들….”
보다 못한 은아가 나서기도 했다.
거기에 레귤러스클랜의 후원자인 앨리스그룹 직계 정하양이 가세하자 클랜원들은 은하에게 관심을 뗐다.
클랜원들은 곧 두 사람이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환호했다.
은우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바빴으며.
연화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졸지에 은아에게 손이 잡혀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는 한편 은하는─.
─후…. 힘들다.
머리 위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불닭이를 데리고.
은하는 밖에 나가 바람을 쐤다.
취기는 들지 않았지만 안에 있으니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숨 좀 돌릴 겸에 조용히 바람이나 쐬려고 했는데─.
“─은하야? 밖에는 왜 나왔어?”
“그러면 형은 왜 나왔어요?”
“나야 바람 좀 쐬러….”
“저도 바람 좀 쐬려고요.” “아…, 그렇구나.”
바람을 쐬고 있던 중.
은하는 밖으로 나온 한창진과 마주쳤다.
제법 술에 취해 있는지 불콰해진 얼굴을 한 한창진이 그에게 다가와 벽에 몸을 기댔다.
“”…….””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사실 단 둘이 있었던 적이 그동안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은하와 창진은 마땅한 대화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으려 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저기, 있잖아…. 은하야.”
“네, 왜요?”
한창진이 말을 걸었다.
은하는 그에게 고개를 돌
리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은하는 창진이 갑자기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해했다.
한창진은─.
“─지금까지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나 혼자 알고 있어야만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
“그래도 역시 안 되겠어. 너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떤 걸요?”
“동기 중에 베베란 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은 사실 아카데미에 편입한 일반인이 아니라….”
“아….”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분위기를 잡는가 했더니.
은하는 피식 웃고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창진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로, 은하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요. 빨리 좀 말해주지 그랬어요.”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하지만 은하는 그의 말을 끊었고.
곧이어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창진은 어딘가 후련한 듯하면서도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그동안 말해주지 않아서.”
“형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죠.”
우울함이 섞인 어조.
은하는 미안해하는 한창진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한들.
이미 은하는 그가 지금까지 그녀가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힘껏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이참에.
은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이 백서진 선생님하고 인연을 끊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소문이 사실인 거예요?”
“아…, 너도 그 소문 들었구나.”
은하는, 궁금했다.
회귀 전에 한창진은 백서진의 자리를 보좌했었다.
그는 어둠의 연락책이었다.
노은하의 적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한창진은─.
“─왜 선생님의 를 그만둔 거예요?”
“…….”
한창진은 회귀 전과 같은 인생을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지금까지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창진의 인생이 이리도 달라진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은하는 물어보았고.
한창진은 굳은 얼굴을 했다.
“만약에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
두건으로 입가를 감춘 그는 차분한 눈길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은하의 눈동자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간파하려고 하며.
그것은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굳이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니까.”
한참이나 시선을 주고받았을 때.
창진이 입가를 가리고 있던 두건을 살며시 내렸다.
은하는, 한창진의 맨 얼굴을 처음 본 것 같았다.
─엄청 여리게 생겼네.
한창진은 냉혈하고 잔인하며 싸늘한 인상이 강했다고 한다면.
한창진은 마음이 여리고, 어리숙하며,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은아 때문에….”
“…….”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는 나도 어서 빨리 플레이어가 되어서 스승님을 보좌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
“그런데 은아를 만나고…, 세상에 그렇게 명랑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고 말았지 뭐야. 그동안 내가 봐왔던 사람들하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 것 같더라고.”
한창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고 한다.
호기심에 은아의 옆에 있었다고.
그러다가 그녀의 마음에 감화되어 한창진은─.
“─나도 은아하고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졸업하고 어둠에는 들어가지 않고, 레귤러스클랜에 들어가게 된 거고.”
“…….”
“은아한테 착하게 보이고 싶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하하…. 스승님께서는 당신이 설마 마음이 이렇게 여린 놈을 키웠다면서 엄청 탄식하셨지만 별 수 없었지. 내가 마음이 없다는데 어떻게 어둠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겠어.”
“…정말 그것뿐인 거예요?”
“그것 말고는 없어.”
“형 바보에요?”
“은아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은아를 만나고 나서 알겠더라고…. 아무래도 나는 바보인 것 같더라.”
정말이지.
이런 바보가 있을 수 있나.
은하는 쑥스러워하는 창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한창진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행여나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했으나─.
─이 형도 진짜 바보네.
어쩌면 바보 형보다 더 바보야.
그가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은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 한단 말인가.
…왜 내가 찔리지.
한창진은 바보다.
바보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하는 한창진, 그의 결단을 도저히 비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경계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그러다 한창진이 읊조렸고.
은하는 말을 멈췄다.
창진은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은하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계속 경계하고 있었던 것을.
그렇기에 이참에 말한 것이리라.
이 형은…. 적일까, 아닐까.
은하는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진의 진심을 듣고.
아주 조금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일단은…, 한 번 믿어보자.
이 형이 이전 삶과 다르다는 걸.
모르겠다는 고민 끝에.
은하는 한창진에 대한 의심을 이제 느슨하게 풀기로 했다.
그에 대한 반향으로─.
“─우리 누나한테서 손을 떼겠다면 그때는 한 번 생각해볼게.”
“아….”
은하는 말을 놓기로 했다.
부루퉁한 어조가 담기 말이었으나.
한창진은 사소한 변화를 눈치 채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은하는─.
“─우리 누나한테 손대면 그때는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
허락하지 않는 선이 있노라고.
한창진에게 거듭 강조했다.
아니, 협박했다고 한다.
☆
길고 긴 회식이 끝이 나고.
사람들은 제각기 가게를 나섰다.
구연수는 술에 취한 클랜원들에게 제각기 타고 갈 택시를 잡아주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럼 우리도 갈까.”
이윽고 클랜원들이 모두 떠나고.
구연수는 남아 있는 클랜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전, 그와 같은 테이블에 있던 간부들이었다.
회식 때 웃고 떠들었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양.
그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을 하고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말이 없었다.
두 개 그룹으로 나뉘어 차를 타고 서울 외곽으로 이동한 그들은 다만 적색던전으로 향했을 뿐이다.
“─아, 클랜로드.”
“그 녀석들은.”
“모두 안에 있습니다.” “누가 들어오지 않나 감시해. 만약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절대로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내쫓고.” “네.”
적색던전 입구 앞에는 클랜 내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맡는 클랜원들이 서 있었다.
자질구레한 일은 험하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사람의 발길이 많이 없는 적색던전을 야심한 시각에 지키고 있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구연수와 간부들은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그들을 지나쳐 던전으로 들어갔다.
“─크, 클랜로드….”
“”””…….””””
적색던전을 얼마 내려가지 않아.
그들은 손발이 포박된 클랜원들과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클랜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구연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클랜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변지성을 더한 4명.
간부급은 변지성 1명이었다.
눈을 마주친 그들이 덜덜 떨었다.
구연수의 눈을 마주하고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크, 클랜로드…!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아요. 세상에 제가 약에 취해서는 클랜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다니….”
“…….”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가 칠사자란 자리도 내려놓고, 간부도, 가진 것도 전부 내려놓겠습니다!”
“…….”
“그러니까 제발 목숨만은…!”
변지성.
그나마 구연수의 기운을 견딘 그가 묶여 있는 클랜원들을 대표로 해서 외친 것이다.
그러자 구연수가 눈알을 굴렸다.
그의 시선이 변지성에게 향했다.
이내 그가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성아.”
“네, 네!” “그걸 변명이라고 하냐.”
“……!”
빠득 하고.
구연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순간, 구연수의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변지성은 영혼을 압도당하는 듯한 시선에 움찔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날 실망시키지 마라.”
“”””…….””””
그것은 맹수의 눈이었다.
그것도 맹수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의 눈.
“네가 하는 말은 듣기도 싫으니까, 그냥 곱게 가라.”
분노한 사자가 손을 뻗었다.
대기하고 있던 클랜원이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그가 검을 뽑았고.
변지성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이이…, 이 개자식아!!”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변지성은 이성을 잃었다.
사자의 자식도 별 수 없었다.
아니, 구연수에게 변지성은 이제 한낱 쥐새끼에 불과했다.
─서걱
구연수는 검을 휘둘렀다.
그는 목이 떨어지며 바닥에 쓰러진 쥐새끼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다만 짤막하게 욕지기를 하고 돌아섰을 뿐이다.
“마나관리기구에는 적색던전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비명횡사했다고 전하고.”
“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피가 묻은 검을 칼집에 넣은 그가 따라붙는 클랜원에게 전했다.
클랜원들은 현장을 정리하려 남고, 간부들이 그를 따랐다.
“클랜로드. 어둠 쪽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러다 간부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구연수는 짧게 혀를 찼다.
“냅둬. 끄나풀이 죽었다는 걸 알면 그쪽에서도 자중하려 하겠지. 과연 얼마나 자중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 말 들어.”
“…네.”
간부가 된 지 얼마 안 된 남자.
구연수는 그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입술을 잘근 깨물기만 했다.
제기랄….
어둠이란 그런 것이었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
선녀정부가 수립되기 훨씬 이전, 도시의 지배자를 자청하던 군주들이 멸망 속에서 대두되었던 시절.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었던 어둠은 끝내 다른 군주들이 몰락하던 와중에도 힘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이 모든 것을 독식하며 멸망한 세상에서 사회가 기능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은 없어.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어둠에게 종속되어 있어.
어둠이 이 세상의 근간이 되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존재한다면.
바꿔 말하면 그림자가 존재하기에 빛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후관계가 역전되었다.
그렇기에 멸망 이후의 세상은 워낙 기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나라는 어둠이 깔아놓은 세상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어떠한 식으로든 부정을 저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선녀정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녀정부야말로─.
─어둠에 가장 깊이 얽혀 있겠지.
구연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멸망 이후 세상의 이면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아는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이고.
“저, 클랜로드.”
“또 왜.”
“칠사자의 빈자리는 이제 누구에게 임명할 생각입니까. 이대로 공석으로 남겨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흠….”
이내 구연수는 한 간부의 지적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를 노려 다른 간부가 말했다.
“연화는 어떠십니까. 이제 클랜에 입단하고 4년이나 됐고, 실력으로는 충분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이른 나이라는 생각도 그렇게 들지도 않고요. 유수진이 어린 나이에 십이좌가 된 마당에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흠….”
구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들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야. 연화는 제외해.”
“네? 어째서….”
류연화.
그녀는 분명 칠사자로 불리기에는 손색이 없는 존재였다.
어디 칠사자뿐인가.
십이좌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십이좌 중에서 딜러의 자리가 비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
그럼에도 구연수가 그녀의 임명을 반대하는 이유는─.
─혹시 모르는 일이지.
과연 연화가…, 내년에도 클랜에 남아 있을 것인지 말이야.
구연수는 미래를 생각했다.
동시에 노은하를 떠올렸다.
노은하, 그는─.
“─다 큰 수사자지.”
그는 자신과 같은 맹수였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위험한 맹수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연 노은하 정녕 그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자의 밑으로 들어올 것인가.
또한 무리는 이끌되, 웬만해서는 다른 수사자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수사자가 한 무리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연화 말고 다른 사람으로 추려서 회의 안건으로 올려.” “네, 알겠습니다.”
그간 노은하를 영입하려 했으나.
구연수는 한 달 동안 은하를 보며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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