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160
160
Chapter38 – 마음을 울리는 (2)
레이첼.
어느덧, 수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면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곤 하던 이름이다.
뉴욕 내에서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곤 하던 디저트 전문 레스토랑 ‘레이첼&줄리아’의 오너 셰프이자, 오직 디저트 메뉴만으로 미슐랭 투 스타의 영예를 거머쥐었던 바 있는 실력 있는 파티쉐였으며···.
퍼스트 말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가 만든 디저트는 쉽사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단맛을 즐기거나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이따금 그녀의 디저트가 떠오르기 일쑤였으며, 그럴 때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첼&줄리아’에 걸음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가 거머쥐고 있던 미슐랭 스타가 두 개에서 한 개로 추락하기 전까지. 즉, 그녀가 ‘자살’이라는 지극히 극단적이며 비극적인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의 일이지만 말이다.
한차례 긴 한숨을 내쉬어 보인 그가 손수건 한 장을 꺼내서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한 번 훔쳐내던 찰나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디저트 바 내부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그의 일행, 중년 사내가 조심스레 물음을 건네왔다.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
황급히 손사래까지 쳐가며 “아닙니다.” 하고 답해 보인 퍼스트 말론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을 해 보이고는 바 테이블(Bar Table)의 빈자리 한 개를 꿰차고 앉았다.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좀처럼 기억의 수면 아래에서 끄집어내고 싶지 않던, 그래서 애써 잊고 지내던 이름이었다.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일렁이는 중이었다. 가장 또렷한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자신 역시 그녀의 죽음에 일조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죄책감이었다. 그녀가 본래 거머쥐고 있던 두 개의 미슐랭 스타 중 하나를 잃고, 무수히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질타를 받던 그해.
퍼스트 말론 본인 역시 그녀를 대상으로 한 신랄한 비평을 연재했었다. 군중 속에 숨어 함께 돌을 던진 기분이었다지만, 찝찝한 기분은 금세 잊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니라, 자신이 집필한 비평의 반응이 몹시 뜨거웠던 탓이었다.
그녀와의 친분이 돈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덕에 칼럼니스트가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객관성’을 더욱 인증받을 수 있었으며, 매니악한 대중들은 자신의 날카로운 어휘 선택에 환호했고 여러 매체들은 앞다투어 자신에게 칼럼난을 내주겠노라 제안을 해왔다.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후-.’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그가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는, 디저트 바 내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여러 추론이 교차했으며, 또 머릿속에 난잡하게 어질러진 생각들이 좀처럼 정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 셰프가 레이첼과 친분이 있던 건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 건가?’
톡, 톡. 무의식중에 연신 손가락으로 두드려대고 있던 바 테이블을 한 번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질감의 대리석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바 테이블 위로 일정한 간격에 맞춰 놓여진 향초 몇 개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혹은 허기를 자극하는 달콤한 향을 뿜어대는 중이었고 말이다.
전반적으로 어두우며, 음습하고 또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좌∙우로는 익숙한 얼굴을 한 평론가 몇 명이 바 테이블 앞에 일렬로 앉은 채, 디저트를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늦게 코스가 끝났더라면, 디저트 바는 아예 못 했겠군.’
디저트 바의 규모가 워낙 협소했던 터라,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해봐야 네 명이 한 번에 앉을 수 있을 법해 보이는 자그마한 크기의 테이블 두 개와, 여덟 명이 일렬로 앉을 수 있는 바 테이블 한 개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퍼스트 말론이 그렇게 디저트 바의 내부를 찬찬히 살피던 찰나였다. 곁에 앉아있던 중년 사내가 돌연 “오.” 하고 감탄을 흘려 보이고는, 다소 호들갑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바 너머로 헤드 셰프와 파티쉐들이 디저트를 조리하는 걸 지켜볼 수 있군요. 정말 매력적인 설계에요.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점이야말로 바 테이블 형태로 이루어진 오픈 키친의 최고 장점이랄 수 있겠···.”
무어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가 돌연 뒷말을 삼켜냈다. 바 테이블 너머에서 한창 조리에 열중하고 있던 ‘헤드 셰프’ 탓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퍼스트 말론은 마치 헤드라이트 불빛과 마주한 토끼라도 된 것마냥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니라, 헤드 셰프를 상징하는 푸른색 스카프를 둘러맨 채로 디저트 메뉴 조리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낯익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줄리아···?”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말에 줄리아가 시선을 옮겨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그녀의 얼굴 위로 점차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내 퍼스트 말론이 “맙소사.” 하고 중얼거려 보이고는, 제 상체를 앞으로 바짝 기울인 채 말을 이었다.
“이런, 정말 몰라보게 변했군. 훨씬 더 아름다워졌어. 분명 뉴욕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네, 맞아요. 그동안 인도에 있었어요. 얼마 전, 영 셰프의 연락을 받고 뉴욕으로 돌아왔고요.”
“그래, 정말 잘 생각했어. 좋은 기회를 붙잡았군.”
짧게 말해 보인 퍼스트 말론이 “음.”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뒤, 어렵사리 뒷말을 덧붙였다.
“많이 늦었지만 레이첼 일은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레이첼이란 이름이 거론되기 무섭게, 줄리아의 동공이 겨울철 드센 바람 앞에 놓인 사시나무라도 되는 양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단연 눈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 테이블 아래쪽에 감춰둔 두 손 역시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그녀가 퍼스트 말론을 빤히 들여다보며 제 입술을 옴짝달싹하고 있던 찰나였다. 돌연 바 테이블 한 편에서 술렁임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 소음이 점차 덩치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한창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던 두 사람, 퍼스트 말론과 레이첼 역시 디저트 바의 입구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음의 근원은 오늘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영 셰프’였다.
잘 훈련된 도베르만을 연상케 하는 인상의, 훤칠한 동양인 청년이 말끔한 조리복 차림을 한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 테이블을 꿰차고 앉은 평론가들의 칭찬에,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답해보이는 것으로 화답해가며 말이다.
그렇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필상이 끝내 줄리아의 코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귀를 가져다 대라는 듯 손짓을 해보인 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줄리아, 이럴 줄 알고 한 번 와봤어요.”
“이럴 줄 알았다니요? 무슨 뜻이죠?”
줄리아가 화들짝 놀라 건넨 물음에 필상이 진중한 표정을 한 채, 그녀의 두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번 테스트 키친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대목이 바로 줄리아였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테스트 키친 행사를 통해 줄리아와 그녀의 스승 레이첼을 죽음에 이르게끔 몰아넣었다고 볼 수 있는 유명 평론가들이 재회하게 되리란 점이었다.
줄리아가 그들과 조우했을 때 평소 다른 이들을 대할 때처럼 마냥 능숙하고 당당하게 잘 대처 해내리란 믿음이 드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과 분노를 비롯한 여러 감정에 휩싸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다시금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심이 피어오르곤 했던 것이다.
이내 필상이 제 앞머리칼을 위로 한 번 쓸어올려 보이고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말했다.
“금방 돌아가 봐야 하니까, 잘 들어요. 애초에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발권하기 전에 결심했을 거 아녜요?”
“그래요, 맞아요. 분명 그랬는데···.”
“레이첼의 꿈을 이뤄줄 거라면서요? 그러려면, 미슐랭 쓰리 스타 디저트 레스토랑의 오너가 되어야 하고요.”
그 말에 줄리아가 고개를 내저어가며, 살짝 격양된 투로 답했다.
“제가 당신 테스트 키친 행사를 망칠까 봐 이러는 거죠?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제발 그 이야기 좀 그만 들먹여요.”
“아뇨, 테스트 키친 행사는 망하든 말든 별 관심 없습니다. 설령 망친다 하더라도, 어차피 시즌이 시작되면 결과가 뒤바뀔 테니까요.”
한차례 “그럼 대체···.” 하고 말해 보인 줄리아가, 도로 입을 꾹 다물기에 이르렀다. 필상의 두 눈 위로, 결연하기 그지없는 기색이 드리워있던 탓이었다. 이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기를 잠시.
필상이 눈짓을 살짝 해보이는 것으로, 바 테이블 앞을 지키고 앉아있는 유명 평론가들을 바라본 뒤에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서 달콤한 디저트로 혼을 쏙 빼놓는 거예요. 줄리아가 레이첼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뉴욕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또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최대한 달콤하게 알리는 거죠.”
그제야 긴장이 누그러진 것인지 한차례 “풉.” 하고 웃음을 흘려 보인 줄리아가 재차 말했다.
“이런, 그게 제 특기에요.”
“잘됐네요.”
“셰프, 정말 고마워요.”
“아뇨, 별말씀을.”
퉁명스레 답해 보인 필상이 곧장 덧붙였다.
“줄리아가 제 테스트 키친 행사를 망칠까 봐 걱정되서 꺼낸 말일 뿐이에요.”
이내 필상이 곧장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는 디저트 바를 빠져나갔다. 잠시 그런 필상의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던 줄리아가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퍼스트 말론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보셨다시피, 갑작스레 셰프께서 방문하셔서요.”
“괜찮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줄리아가 곧장 유려한 어투로 답했다.
“어쨌든,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파우스트 디저트 라인의 헤드 셰프이자, 디저트 레스토랑 ‘레이첼의 꿈’의 오너 셰프직을 맡고 있는 줄리아입니다.”
평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퍼스트 말론과 그의 일행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줄리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앞서 전개된 코스와 완벽히 어우러지는 수준 높은 디저트를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리고 아까 했던 말은 정말 진심이었네. 그러니까···.”
퍼스트 말론이 무어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였다. 줄리아가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음산한 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덮어두고, 오늘은 미식 평론가로서 제 디저트를 맛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알겠네.”
“만약 입에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비평을 잔뜩 집필하셔도 상관없어요. 그게 아저씨의 일이잖아요?”
퍼스트 말론이 아주 작게 “일···.” 하고 중얼거려 보이고는 덧붙였다.
“맞아. 비평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의 일부지. 마음에 드는 요리와, 그 요리를 만든 셰프를 칭찬하는 것 역시 일의 일부일 테고.”
“좋아요, 일단 드셔보신 후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마음껏 평가하세요. 테스트 키친 내용 발설 금지 조항은 파우스트에만 해당될 뿐, 샵 인 샵 형태라지만 독립된 공간인 제 디저트 바에는 해당되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줄리아가 “대신.” 하고 말해 보인 뒤, 진중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덧붙였다.
“만약 제 디저트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글을 쓰게 된 거라면, 말미에 제가 원하는 글귀 몇 줄만 적어주시겠어요?”
“어떤···?”
“레이첼의 꿈의 셰프가 선보인 디저트 메뉴는, 더는 볼 수 없는 레이첼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레이첼의 양녀, 줄리아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에 돌아왔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줄리아의 얼굴 위로 의기양양한 미소가 드리웠다. 기세가 달라졌다. 피네스가 아른대는 듯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켜내보인 퍼스트 말론이 저도 모르게 답했다.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