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iting Filmography RAW novel - Chapter 137
136화. 많이 빠지셨네요
『90일』의 방향성을 예술영화로 확실하게 잡은 순간, 안시현의 제1 목표는 완성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 버렸다.
처음으로 흥행에 대한 관심을 껐다.
그 대신 모든 관심을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것에만 집중했고, 그 과정의 일환으로 극단 광대들의 터줏대감들이 오디션에 참여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안시현의 뜻에 공감해 줬다.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자신들의 출연이 『90일』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거란 걸 느꼈고, 아끼는 후배인 안시현이 부탁까지 했으니 작정하고 준비해서 오디션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날 저녁.
한창 술잔을 기울이던 중, 최정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현이 네 덕분에 우리 애들 간만에 촬영하게 생겼네. 아,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재밌겠다.”
“와. 너무한 거 아닙니까, 형님?”
“근데 진짜 재밌기는 하겠는데?”
“크흐흐. 인정!”
최정수와 터줏대감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술자리 분위기를 띄웠다. 안시현은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분위기만 즐겼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최정수가 안시현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더 필요한 건 없냐? 필요한 배역에, 필요한 배우 데려오는 거 너라면 어렵지 않잖아.”
“선배님들이 출연해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안시현의 마음 같아서야 배역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배우들을 모조리 캐스팅하고 싶었고, 지금껏 쌓아 온 인맥이라면 100%는 아니더라도 절반 이상은 만족스러운 캐스팅이 가능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공개 오디션을 선택하였다.
주요 배역에 인지도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면 할수록, 박의준 감독이 바라는 『90일』과는 방향성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최정수에게도 단역으로, 고작 대사 열 마디 남짓이 전부인 배역을 맡기는 데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광대들의 터줏대감들이 맡을 배역의 비중이 크긴 하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그리 큰 배역이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즉, 안시현은 자신을 제외한 주요 배역의 대다수를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뽑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왕이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한, 소위 말하는 무명 배우들이 캐스팅되기를 원했다.
‘내가 무명 배우에서 처음으로 인지도를 끌어올렸던 것처럼, 『90일』이 다른 배우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는 편이 『90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고, 회귀 전의 자신처럼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무명 배우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내다봤다.
“준비는 언제부터 들어가려고?”
“캐릭터 분석은 바로 들어가려고요. 몸 만드는 건 신년 되면 시작해야죠.”
“몸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던데?”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요. 특수 효과로 처리할 수도 없잖아요. 몸 못 만들 거면 주연 하면 안 되죠. 선배님도 10년 전에 배역 때문에 일부러 살찌웠었잖아요.”
“그때 20kg 찌느라 죽는 줄 알았다. 뭐…… 나보다는 네가 더 고생할 거 같지만.”
안시현이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 분석이야 늘 하던 것이고, 시간에 비례해서 완성도가 올라갈 테니 상관없었지만…….
한노을 캐릭터에 어울리는 몸을 만드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든 과정이 될 것 같았다.
* * *
2007년 11월 말.
“최주은 역을 준비해 온 배우 양소라입니다.”
“최근 출연작이…… 없으시네요?”
“네. 『90일』이 제 첫 오디션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준비해 온 연기, 바로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예정했던 대로 『90일』의 공개 오디션이 열렸다.
사실 공개 오디션이라고 해 봐야 특별한 건 없었다.
캐스팅 제안을 하는 게 아닌 오디션을 통해서 배역을 결정하는 것일 뿐이고, 연기력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판단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극단 광대들의 터줏대감들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안시현과 약속한 것처럼 『90일』의 공개 오디션에 참여했고, 해당 배역의 오디션에 응한 참가자들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연기력 차이가 꽤…… 많이 나네요.”
“아무래도 정수 선배님 밑에서 오랜 시간 갈고닦았으니까요. 무대가 좋아서 안 떠나는 거지, 능력이 없어서 못 떠나는 분들이 아니잖아요.”
“덕분에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네요. 매형이 촬영 때 극단 통째로 빌려주겠다고 했으니까, 그 부분도 걱정을 덜게 됐고요.”
“일단 하나는 결론 난 거 같으니, 다른 배역들도 차분하게 결론을 내려 볼까요?”
“최주은부터 가시죠.”
이틀간의 공개 오디션이 끝난 뒤.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은 오디션 결과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다. 대체로 두 사람의 의견이 비슷했지만, 의견이 갈릴 때면 안시현이 박의준의 뜻을 존중해 줬다.
기본적으로 캐스팅 권한은 감독에게 있으니까.
다행이라면 전체 배역 중 몇 개를 제외하면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디션의 결과가 명백하게 갈렸다.
애초에 연기력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판단하다 보니 의견이 크게 갈릴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갈린 배역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가 많아서 그런 것이었다.
오디션을 마무리하고 2시간.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은 모든 배역의 캐스팅과 관련해서 깔끔하게 결론을 냈다.
“합격 여부는 내일 중으로 연락 돌리고, 이번 주 중으로 계약 마무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혜인원을 통해서 스태프 구성을 마무리했습니다.”
“덕분에 감독님이 한결 편해지겠네요.”
“숨통이 좀 트였죠.”
“촬영장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체 제작보다는 촬영 장소를 섭외하는 쪽으로 방향으로 잡으려고 합니다. 혹은 촬영장을 빌려 쓸 수 있는 현장이 있는지도 알아보려고요.”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곽상필 대선배님께서 그 부분은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90일』의 시나리오를 탈고한 뒤, 박의준 감독은 곽상필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안시현은 곽상필을 만나서 박의준 감독을 돕는 속내에 대해 물었다. 혹여나 김진석 대표가 깊게 관여하는 거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지만…….
“제 뒤를 이을 재목으로 키워 보려고 합니다. 진석 형님이 부탁한 게 아니라, 제가 부탁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의준 감독님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가진 재능만 놓고 보면 톱클래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다만, 아직 원석에 불과하니까 제가 잘 가다듬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곽상필은 박의준 감독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심 낙점한 상태였고, 제대로 키워 보고 싶어서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이후 곽상필 감독은 박의준 감독에게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것들에 대해 가르치는 한편, 『90일』의 제작과 관련해서도 여러 도움을 주고 있었다.
촬영 장소 섭외가 그런 케이스였다.
곽상필의 도움 덕분에 『90일』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몇몇 영화의 촬영장을 빌려 쓸 수 있게 됐다.
비록 정해진 스케줄 내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지만, 촬영장을 빌려 쓸 수 있는 게 어디란 말인가.
‘곽 고문님께서 도와주면 우리야 고맙지.’
그로부터 며칠 뒤.
안시현은 박의준 감독으로부터 캐스팅 제안을 한 모든 배우들과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디션이 끝났으니, 이제 난 내가 할 일을 해 볼까?’
결과적으로 오디션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100%까지는 아니지만, 90% 정도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이 원하는 수준의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데에 성공했다.
거기에 스태프 구성도 끝났고, 촬영 장소 섭외는 박의준 감독이 곽상필의 도움을 받아서 알아서 할 거다.
이제 안시현이 해야 할 일은 하나.
원톱으로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도록, 남은 시간 동안 캐릭터 구축을 끝마치고 몸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 * *
안시현은 2007년의 마지막 날을 가족들과 보냈다.
아침 식사는 부모님과 점심 식사는 정일룡 회장과 함께했고, 저녁에는 라온이를 부모님에게 맡기고 정혜영과 오붓하게 별장에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2008년이 됐어도 안시현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라온이를 돌보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그러던 1월의 어느 날.
안시현이 최봉팔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최봉팔은 몸을 만드는 걸 도와 달라는 안시현의 부탁에 표정이 굳었다.
“꼭 그렇게 몸을 만들어야 하는 거야?”
“네. 이번 작품을 위해서는 꼭 필요해요. 가족들도 동의한 부분이고요.”
“걱정되긴 하는데…… 네가 원하니까 도와줘야지. 크랭크인 언제라고 했지?”
“6월 1일이요.”
최봉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살펴본 안시현의 몸은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 있는 단계였다. 최봉팔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부터 스스로 최선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만들 수 있겠다. 네가 어느 정도 준비를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 줄 모르니까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었죠. 괜찮은 것 같아요?”
“나쁘지 않아. 허 참…… 내 하다 하다 이런 식으로 몸 만드는 걸 도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하하.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어요.”
이런 식으로 몸을 만드는 건 안시현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90일』의 시나리오를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럼…… 근육 빼는 거 잘 부탁드릴게요.”
* * *
『90일』은 췌장암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마지막 90일 동안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이뤄 가는 걸 담백하게 풀어내는 영화다.
공교롭게도 『90일』의 주인공인 한노을이 걸린 병은, 회귀 전 안시현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병과 똑같은 것이었다.
덕분에 안시현은 한노을이라는 캐릭터에 제대로 감정 몰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이 악화되어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 췌장암 판정을 받고서 치료에 전념하기보단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었으니까.
그때의 기억 덕분에 한노을의 감정에 공감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실제로 안시현은 비교적 수월하게 캐릭터를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안시현의 몸 상태였다.
『칠전팔기』에서 작정하고 운동선수처럼 보일 수 있도록 몸을 만든 덕분에, 안시현의 몸은 근육질이었다.
췌장암 환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삐쩍 마르거나 딱 봐도 아파 보일 필요는 없다.
박의준 감독이 원하는 한노을은,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캐릭터니까.
다만 너무 근육질인 게 문제가 됐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직장인 수준의 몸매.
안시현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소 운동을 하면서도 근력 운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고, 최봉팔을 만난 이후에는 보다 철저하게 관리하며 근육량을 줄이기 위해 애썼다.
애써 만든 몸매가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근육량이야 다시 늘리면 되니까.’
지금은 『90일』이 더 중요했다.
회귀 전의 자신과 비슷한 입장이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내린 한노을이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조급해하지 말자. 시간은 많으니까.’
안시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캐릭터 구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음에도, 크랭크인까지는 네 달이 넘게 남아 있는 상황이니까.
차분하게 몸을 만들며 캐릭터를 가다듬어도 대본 리딩 전까지 충분히 준비를 끝마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시간이 흘러 5월 초.
『90일』의 첫 대본 리딩이 다가왔다.
공개 오디션 이후 통화만 했지, 얼굴을 보는 건 간만이 박의준 감독은 안시현을 보고서 꽤나 놀랐다.
“근육 많이 빠지셨네요.”
안시현의 몸이 그가 생각하는 한노을의 이미지와 매우 유사해진 상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