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2
22. 물이 멎은 날
카페 스몰디에 들어갔을 땐 땅거미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2층 통창 앞의 긴 소파에 앉아, 수연은 태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졸려?”
태산이 수연이 편히 어깨를 벨 수 있게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조금. 나른해.”
몸에 힘을 뺀 상태로 물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하얀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30분만 자.”
“아냐. 눈만 감고 있을래. 커피 마시고 있어.”
“응.”
눈을 감고서 수연은 생각했다. 태산의 냄새가 참 좋다고. 그러다 스륵 잠에 빠졌다.
톡톡, 뺨을 두드리는 손길에 다시 눈을 떴을 땐 가로등이 켜진 시간이었다. 태산이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공주님, 일어날 시간이야.”
흐음. 눈 뜨기가 싫어서 수연은 태산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자신의 방 침대로 텔리포트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꺼풀이 자꾸만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집에 가야지.”
“응.”
대답을 하면서도 수연은 태산의 팔에 얼굴을 비볐다. 태산이 가만가만 머리를 쓸어 준다.
“일어날게.”
일어난다 말하고도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냥 이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일어나기가 싫다는 생각을 하며 간신히 실눈을 떴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투덜거리는 수연의 손을 태산이 잡았다. 손을 잡고서 몇 분을 더 있다가 수연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는 가면서 마셔야겠다.”
생각 없이 말하다가 하나도 줄어 있지 않은 태산의 잔을 보았다. 자신의 잔과 똑같은 높이에서 멈추어 있었다. 잠이 든 내내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을 태산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해진다.
“크루아상 맛있어 보이던데. 그것도 몇 개 사 가자.”
태산이 쟁반을 들며 말하는데 어디선가 벨소리가 울렸다. 따다다단, 하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었다.
“잠깐만.”
태산이 쟁반을 내리고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응. 박 대리.”
– 팀장님? 어디세요?
재민의 목소리가 수연에게까지 들렸다. 태산이 핸드폰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여기? 대전.”
– 대전이요? 세종에 농어촌공사 가신 거 아니세요?
“공사 들렀다가 대전에 나왔어. 왜?”
– 아, 다른 게 아니라요, 팀장님이 지시한 대로 산 옆으로 붙은 쪽 뚫고 시멘트 주입했거든요. 근데 아까 5시쯤에 내려오는데 물 흐르는 양이 훅 줄은 거 같은 거예요.
“물이?”
태산이 반문하며 뒤를 돌았다.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사이로 커다란 재민의 목소리가 흘렀다.
– 네. 아무래도 물이 멎은 거 같아요. 내일 아침 되면 확실히 알겠지만요.
수연도 태산도 멈춘 듯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종으로 올라가는 길, 태산은 수연에게 양해를 구하고 농어촌공사로 전화를 걸었다.
“예, 차장님. 장 팀장입니다.”
– 어, 장 팀장.
“방금 박 대리한테 보고받았는데요, 물이 멎었답니다.
– 물이 멎었어? 한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다더니, 벌써?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스피커를 통해 대화를 하는 거라 수연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한 달을 머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장태산을 어떻게 마주하고 보나, 걱정했었는데. 그때로부터 며칠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천히 줄길래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멎었다네요. 지금 밖이라서요. 저도 내일 확인해 보고 쌍극자 탐사 진행해서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장 사장님 한 달 안에 막는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시더니 정말 끝냈네? 거참 신통해.
“그러게 말입니다. 테스트하고 결과 나오면 검사공 진행하시죠. 대충 언제쯤 될까요?”
– 아, 우리야 바로 가지. 테스트 결과 오케이면 연락해요.
쌍극자 탐사니 검사공 진행이니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수연은 식은 커피를 마셨다. 태산이 수연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한 통화만 더 할게.”
“응. 열 통화해도 괜찮아.”
그 말에 태산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화면을 눌러 누군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소리가 들리다가 뚝 끊겼다.
“사장님. 장 팀장입니다.”
– 어, 태산아.
“박 대리한테 연락 왔는데 물 멎었답니다. 내일 테스트해 보고요, 검사공 진행하겠습니다.”
– 멎었어? 허허허허. 거봐라. 내 말대로 한 달 안 걸렸지?
“그러게요. 공사 구간 다 끝나도록 안 멎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사장님 말씀대로 멎긴 멎네요.”
– 그럼 검사공 끝내고 얼른 철수해. 남은 일은 서울 와서 마저 처리하고. 용인 현장에 인력 달린다고 난리야.
“예, 알겠습니다. 이만 끊습니다.”
쌍극자 테스트니 검사공이니 하는 말들은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 철수라는 말은 흘려듣고 싶어도 귀에 박히듯이 들어왔다. 수연은 복잡해지는 마음을 감추려고 가볍게 웃으면서 태산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이제 물이 안 새는 거야?”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그렇구나. 신기하다. 진짜 막히네.”
태산은 수연을 잠깐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 마시더니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는지 어, 하고는 어느 빌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맛있는데.”
“어디?”
“저기 얼큰이 칼국수집.”
“나중에 한번 갈까?”
“응.”
수연이 선선히 대답했다.
태산은 운전하며 곰곰이 다시 계산을 해 보았다. 다음 주 토요일이 수연이 세종으로 이사를 하는 날이다. 쌍극자 테스트와 검사공까지 진행하는 데에 길게 잡아도 4일. 짧으면 3일. 현장 철수하고 정리하는 데 하루. 닷새가 지나도 화요일이다.
커다란 트럭이 있는 것을 핑계 삼아 이삿날 도와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수연이 이사를 하는 주말까지 수연 가든에서 머물 빌미가 없다.
철수 명령까지 떨어졌으니 일단은 서울에 올라갔다가 이사 당일에나 내려와야 할 것 같았다. 이사를 돕겠다는 핑계로 서울에서 내려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니, 가족들이 돌아간 후에나 만날 수 있을 테고. 그럼 밤늦은 시간이 되겠지.
그래도 다행인 건 공사가 일찍 끝나서 수연 없는 수연 가든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하루에 10분 정도 만나는 것도 아쉬워 죽겠는데, 수연 없는 수연 가든이라니. 수연이 세종으로 내려가고 나면 밤마다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참아야 할지 막막하던 참이었다.
숙소를 옮긴다고 할까. 혼자서만 서울에서 출퇴근하겠다고 하고 세종에 방을 구해 볼까. 이참에 아예 세종에 거처를 두고 서울로 출퇴근을 할까.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딱히 묘수가 없어 수연 없는 수연 가든에서 물이 멎는 그날까지 참아야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신기하게도 물이 멎었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수연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나 정윤이네 집에서 내려 줘.”
“정윤이네?”
세종에 산다는 친구의 이름이 정윤이었다.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같이 들어가면 아빠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지금쯤 아빠도 집에 들어왔을 텐데. 거기다가 너 대전이라고 했었잖아. 같이 들어가면 이상하지.”
“세호 내려오라고 할까?”
“내가 할게. 정윤이네 집에 잠깐 들려서 아기 보고, 세호 오면 그때 들어가지 뭐. 이 길 따라 쭉 가면 사거리 나오는데, 그 앞에 내려 줘. 뭐라도 사서 가게.”
“응.”
태산은 수연의 말대로 비상 깜빡이를 켜고 상가 앞에 차를 댔다.
“조심해서 들어가.”
인사를 하는 수연을 당겨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아 쫌.”
수연이 찰싹 태산의 어깨를 때린다.
“전화해.”
태산의 말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은 상가 안 아기 용품점으로 들어가는 수연을 바라보다 다시 출발했다.
* * *
“어이, 장 팀장. 물 멎었다면서?”
다음 날 아침, 식사하기 위해 가든으로 들어서자마자 동만이 환한 얼굴로 물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테스트해 봐야 알겠지만요.”
“거 참 희한혀. 구멍 뚫고 시멘트 부어서 잘도 막네. 박 대리 이제 서울 올라가서 좋겠어.”
동만의 말에 재민이 활짝 웃었다.
“새는 양이 천천히 줄긴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뚝 그칠 줄은 몰랐거든요. 저희끼리는 한 일주일은 더 걸리겠다 했었습니다.”
“그려? 이제 아주 가는겨?”
동만이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내려놓으며 물어보았다.
“아뇨. 지금까지 시공한 건 3분의 1이구요. 물 막혔으니 일단 올라갔다가 나머지 3분의 2는 예산 잡히는 대로 다시 내려와야죠.”
“왜 한 번에 안 해요?”
세호가 과일을 담은 접시를 들고 나오면서 재민에게 물었다. 재민이 짧게 설명을 한다.
“그게 말야, 이번엔 좀 특별한 케이스라서. 원래는 공고 뜨면 입찰하거나 수의 계약을 먼저 하는데, 이번엔 워낙 급하게 돌아가느라 예산 배당받을 시간도 없었거든. 사장님 실력 믿고선 그냥 덥석 부탁을 했달까. 일단 되는 대로 막고, 나머지는 절차 밟아 공사 예산 배정되면 다시 하기로 했어.”
재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연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분명 진돌이가 웡웡 짖었고, 수연이 세호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수연은 가든에 없었다.
그동안 수연이 가든에 식사 준비를 도우러 나오는 날도,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첫 밤을 지낸 이후로는 매일 나왔었다. 짧게라도 인사를 하거나 한 번씩 눈을 마주치며 살짝 웃기라도 했었는데, 식사가 끝나도록 수연이 보이지 않았다.
“누나는?”
태산은 세호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아프대요.”
세호도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었다. 핸드폰을 여는데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팀장님, 농어촌공사에선 내일 나올 수 있대요?”
“응. 먼저 내려가. 준비해 놓고.”
“옙.”
재민을 보내 놓고 방으로 잠깐 돌아와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프다며.”
– 아냐. 아픈 건 아닌데.
“어제 일 때문에 힘들어서 그래? 내가 너무…….”
– 그런 거 아니고. 암튼, 그냥 좀 그런 상태야.
수연이 태산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그냥 좀 그런 상태라니. 태산은 창문 너머 수연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깐 얼굴만 볼게. 창문 열어 줄래?”
– 응.
드르륵 창문이 열리고 수연이 그 앞에 섰다. 눈이 퀭하고 얼굴이 파리했다.
“병원 갈까? 내가…….”
거기까지 말하다 깨달았다. 쌍극자 테스트도 해야 하고 내일은 검사공 테스트도 진행해야 했다. 한 달을 작업한 마무리를 짓는 날이라 빠질 수도 없다.
– 괜찮아. 그냥 잠깐 그런 거야. 쉬면 나아.
“먹고 싶은 건? 커피 사다 줄까?”
– 나중에. 나 조금만 쉴게.
건너편에서 수연이 흐리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 왔다. 마음 같아선 테스트고 뭐고 재민에게 맡겨 놓고 병원에 데려가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사장님’ 세 글자가 화면에 뜬다.
– 장 팀장, 나 거의 다 와가네.
“예. 바로 현장으로 내려오세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필 제일 중요한 날이라, 수연에게 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쉬움을 남겨 두고 태산은 저수지로 내려왔다.
수연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아랫배가 뭉근하게 아파 온다. 식은땀도 나고 허리도 뒤틀릴 듯이 아팠다.
“어쩐지 어제 졸리다 했어.”
혼잣말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리하기 직전에는 유난히 졸리곤 했었다. 시기도 그렇고, 졸린 것도 그렇고 미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태산과 어울리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으.”
할머니 같은 소리를 내고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웅크렸다. 원래도 생리통이 심한 편이지만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눈치껏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태산은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다.
태산을 생각하다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 들었던 목소리들이 귓가를 떠돈다.
‘물이 멎었어요.’
‘얼른 철수해.’
새는 물이 멎으면 공사가 끝난다. 공사가 끝나면 태산이 철수한다.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에 내려올 일이 없어진다.
“아파.”
배를 움켜쥐고 수연은 신음 소리를 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앓다가 다시 생각했다.
태산이 올라가 버린다. 자신이 세종시로 복직을 한다 생각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세종시에 가도 태산은 수연 가든에 머물 거라 생각했었다.
주말에 오면 볼 수 있지 않을까. 태산이 세종으로 내려올 수도 있겠지.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만나지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히 생각해서 당장 이별이 닥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시간도 없는데…….”
생리를 한다. 컨디션은 제일 안 좋고, 기분도 바닥을 기는 기간. 울컥 피가 쏟아질 때면 모든 게 다 싫어지는데, 최악의 기간에 태산을 보내야 한다 생각하니 안 그래도 아픈 배가 더 아파 왔다.
“내일, 모레, 글피.”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세어 보았다.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려면 나흘은 걸릴 텐데, 그때쯤이면 태산은 검사를 모두 마치겠지. 하루에 한 번 만났던 짧은 데이트도 못 하고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은 더욱 우울해졌다.
“하아.”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누웠다. 이런 때 생리하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럽고, 배가 아픈 것도 서러웠다. 담담하게 다스리려 했던 마음이 밟힌 두부처럼 으깨어지는 기분이다. 눈물이 울컥 나올 것만 같아서, 수연은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아무 일 없는 듯 지내다가 태산이 올라가야 할 때가 되면 담담하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헤어짐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공사가 끝나고 태산이 올라가야 하는 날이 오면, 태산이 수연 가든을 떠나게 되면 그다음 일은 온전히 태산에게 맡기려 했었다.
잘 가, 인사를 하고.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는 태산에게 응, 하고 대답을 하려 했었다. 서울에서 문득 전화를 걸어 내려갈게, 하면 그래, 하고 말하고 싶었다. 전화가 영영 오지 않는다 해도 그러려니 하면서, 이별 없는 이별을 하고 싶었었다.
“모르겠다.”
수연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기분이 엉망이다. 이 상태로 태산을 보면 이상한 말이나 찍찍 뱉을 것 같다. 차라리 태산이 바쁜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수연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