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Corpse-Collecting Warrior RAW novel - Chapter 130
변화(3)
이 세상은 전반적으로 지구의 중세 후기와 비슷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뚜렷하게 구분된 계급 구조. 그에 맞춰진 법과 질서.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관 역시 그 질서에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에 기사가 평민에게 하대하는 것이나, 검을 뽑아들고 앞길을 가로막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여기가 도시연합, 그것도 그 중심인 미궁도시 팔시온이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팔시온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도시가 뭉친 국가, 도시연합의 사회 구조는 꽤나 독특했다.
귀족의 존재와 역할은 다른 국가들과 유사했으나, 그 신분이 비단 혈통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의 능력만 출중하다면, 그 탁월함만큼이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게 도시연합의 사회 구조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탐험가 출신 귀족들이지.’
미궁에서 높은 실적을 올리고 공로를 인정받은 탐험가는, 그 공로에 따라 귀족 계급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도시를 지키는 병사들 역시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공을 세우면, 기사는 물론 그 이상의 위치까지도 바라보는 게 가능했다.
이런 질서는 용병이나 상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수준 이상의 능력이 공증된 사람이라면, 당장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게 당연했고.
그렇기에.
“아직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니,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구나!”
미궁에서 생환한 금패 용병 출신의 탐험가를 눈앞에 두고, 제 신분을 내세워 윽박지르는 기사의 모습은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여기가 무슨 남부 제국도 아니고.
“쯧.”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만 가지고 도시 안에서 다짜고짜 머리를 부수거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순은 기사단은 이 구역의 치안권을 일임받은 공적인 조직 아닌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부리는지, 그 전후사정 정도는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댈런은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허리띠에 끼운 채 광장을 둘러봤다.
맨 처음 보이는 건 광장을 둘러싼 백 명에 가까운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예닐곱 명의 기사들.
평소의 치안 병력과는 그 숫자부터가 몇 배나 차이가 난다.
널찍하게 광장을 둘러싼 배치 또한, 마치 미궁 안에서 나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듯한 모양새.
‘일단 상부의 지시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군.’
아직까지 명확한 뒷사정은 알 수 없다. 짐작 가는 게 몇 가지 있긴 하지만, 확단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이 대륙에서 짐작하지 못한 일이 터지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리고 그런 예상 밖의 일은, 으레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곤 하는 법이다.
톡. 톡.
백 명의 병사.
열 명 안쪽의 하급 기사.
지금의 그가 가진 무력이라면, 용의 힘을 꺼내지 않고도 저들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관건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느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소요와 아군 측의 피해를 얼만큼 막을 수 있느냐일 뿐.
톡. 톡톡.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수백 가지 경우의 수들을 연산해내는 동안, 손끝은 저도 모르는 사이 도끼날을 가볍게 두들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던 것일까.
“잠깐만요. 저하고 이야기하시죠, 기사님.”
시에나가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선, 기사의 이목을 대신 잡아끌었다.
댈런은 그녀가 허리 뒤춤으로 보내는, 진정하라는 듯한 손짓을 보고 턱을 긁적였다.
아니, 뭐 다짜고짜 도끼라도 뽑을 줄 알았던 건가?
그냥 대충 생각만 해 본 거라고. 생각만.
***
“넌 뭐냐?”
당연하겠지만, 일관적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기사는 시에나의 난입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 파티의 마법사입니다. 금강궁의 명에 따른 공무라 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흐음······.”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시에나의 외모와 분위기는 그 누가 보더라도 매혹적인 마력이 있었으니까.
“스읍······.”
민머리 기사는 말 위에 앉은 채 시에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눈가에 탐욕이 번들거리는 게, 아주 노골적으로 외모를 감상하는 듯한 표정.
머리칼부터 갑옷 위로 드러난 몸매를 먼저 훑고,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아주 가관이었다.
‘···저거 나중에 길 가다가 어디 하수도 같은 곳에 빠져서 객사하겠군.’
시에나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살기에, 댈런은 도끼머리에서 슬그머니 손을 물렸다. 이제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저 기사의 말로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게 누가 뒷골목 정보상의 심기를 건드리래? 우스운 건 당사자는 제 운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크흠, 용병 댈런. 청동 구역의 시에나. 그리고 차르국의 병사들 맞나?”
“뭐야! 난 왜 빼나, 기사 양반?”
“네, 맞아요.”
대놓고 목록에서 빠진 비요른이 반발했고, 시에나가 침착하게 그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을 이었다.
“상부에서 너희를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너희는 그저 영광스러운 금강궁의 명령에 고분고분 순종하면 될 뿐이야. 우리 기사들을 며칠 동안 기다리게 만든 괘씸죄는, 앞으로 하는 태도를 봐서 용서해줄지 결정하도록 하겠다.”
“···하아, 무슨 이런 병신이.”
그리고 시에나의 인내심도 여기까지였던 걸까.
어처구니없는 민머리의 이야기에, 그녀의 입에서도 마침내 속마음을 가득 담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라?”
기사의 눈매가 꿈틀거린다. 놈은 얇은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두 손으로 검을 치켜들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흡···!”
번들거리는 이마에 힘을 빡 주자, 놈의 검신 위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서서히 맺히기 시작했다.
검기였다.
“흐흐흐, 검기는 처음 보나 보군. 그 방자한 입을 놀린 대가, 팔 하나로 끝나는 걸 감사히 여기거라. 나 앙겔 경이 기사의 검기로 친히 네 년놈들을···!”
시발. 못 들어주겠네.
댈런은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성큼 나섰다.
“···큿!”
말과 호흡을 동시에 끊어내는 접근. 민머리 기사가 자기도 모르게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까각! 땡그렁!
하지만 흐릿하게 검기를 머금었던 진검은, 댈런의 가벼운 손짓에 오히려 두 동강 난 채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어, 어어···?”
“어어는 무슨. 검기를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는 놈이.”
턱.
댈런은 걸음을 내디뎠다.
지면이 아닌, 허공을 딛는 걸음.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존재하는 듯, 빈 공간은 작은 파문과 함께 그의 몸을 받쳐냈다.
말 위에 올라탄 민머리와 같은 눈높이가 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놈은 댈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팔 하나라고 했나?”
“어, 그, 그게···?”
“가져가겠다.”
휘릭.
화려한 동작은 없었다.
슥―
그저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댈런의 손이 잠시 흐릿해지고.
철퍽.
기사의 팔이 갑옷째로 바닥의 판석 위에 떨어졌을 뿐.
“어, 어어, 으아아아악!”
쿠당탕!
한 박자 늦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민머리가, 잘려나간 본인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몸부림쳤다.
광장을 둘러싼 병사들 사이에서도 순간적으로 소란이 일었다.
물론 혼란은 잠깐뿐.
모두가 눈앞의 민머리 같은 머저리는 아니었기에, 광장을 느슨하게 둘러싸고 있던 진형은 금세 날선 포위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휴.”
“허허, 이거 어쩔 수 없게 됐구만.”
시에나는 이마를 짚은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곁에 선 비요른도 나직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폭약을 꺼내들었다.
반면 댈런은 도끼에 묻은 피를 옷에 대충 닦고 허리춤에 꽂았다. 오늘은 피를 더 묻힐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머리의 팔을 잘라버리기 직전부터 느껴지던 기척이, 어느덧 광장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다그닥! 다그닥!
“정지! 탐험가들을 향한 적대를 멈춰라!”
마력을 실은 외침이 광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말을 탄 기사 하나가 포위망을 쏜살같이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왔다.
“귀관들도 무장을 내려주시오! 우리는 귀관들을 적대할 생각이 없소!”
댈런과 일행을 향해서도 외친 기사는, 달리는 말에서 물 흐르듯이 몸을 날려 바닥에 착지했다.
철컹!
갑옷의 무게와 말의 속도에서 오는 충격량이 어마어마할 텐데도, 아침 구보라도 하던 것마냥 가볍게 멈춰서는 모양새.
허세만 가득하던 민머리 기사와 달리, 그 자연스러운 동작에서 느껴지는 능력은 결코 거짓이 아니겠지.
“기, 기사대장님! 이 굼벵이 같은 하층민 놈들이 저를···!”
“닥쳐라, 앙겔. 방자한 행실로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뻔한 죄, 추후 규율에 따라 징계하도록 하겠다.”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는 민머리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기사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일행에게 다가왔다.
“내 부하가 결례를 끼쳤소이다. 너그럽게 대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깊게 숙이는 허리. 진심이 느껴지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
이내 투구의 바이저를 걷어올리자, 그 안쪽에서 드러난 건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뵙게 되었소, 댈런.”
“오랜만이오. 침묵중대장.”
댈런이 먼저 손을 뻗었고, 기사대장은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맞잡았다.
청동 경비단과 사교도 집단의 전쟁에서, 가장 앞서 싸우던 침묵중대장 가웨인.
먼 미래에 영웅이 될 우직한 전사가, 경비대를 넘어 기사들을 이끄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
가웨인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황금 구역으로 이동했다.
알고보니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은 연행이나 체포가 아니었다.
근래 벌어진 어떤 사건의 중요한 증인으로 추정되니 극진히 모셔오라는 내용이었던 것.
‘원혼의 밤 사태?’
‘그렇소. 원혼들이 차르국 남부 전역에 걸쳐 풀려나 벌어진 학살 사건이오. 소행은 알려지지 않은 흑마법사 단체의 짓으로 추정되고, 사망자는 집계된 것만 수천에 달하고 있소.’
‘······그렇군.’
짐작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정황이 있지만, 명령을 내렸다는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묵하는 게 좋겠지.
모셔오라는 말은 가감 없는 사실이었는지, 광장 근처에는 미리 준비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은 기사단의 정성스런 호위와 고급 마차의 푹신한 좌석을 한껏 누리며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앞서 벌어진 불쾌한 사건에 대해서는 시에나를 통해 명확하게 짚고 넘어갔고.
‘모셔야 할 사람들 앞에 칼부터 빼들고 본다니, 확실히 순은 기사단이 콧대가 높긴 높구나. 우리는 탐험가에 청동 구역 하층민, 저 북쪽에서 온 외국인들 무리니까 그런 태도로 모시겠다는 거지?’
‘···미안하오. 내 부하의 실책이었소. 귀족가 자제 출신에 제국 유학까지 다녀온 놈이라, 탐험가들을 기다린다는 사실 자체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오. 이번 일로 놈은 해임당할 거니 이해를 부탁드리오.’
‘그게 끝? 징계 내리고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돼? 가웨인 기사대장님, 참 많이 변하셨네요.’
‘···금화면 되겠소?’
‘금화는 우리도 많거든요, 기사대장님.’
짧지만 강렬한 협상 끝에 얻어낸 건, 황금 구역에 있는 황금 경매장의 일회성 입찰권이었다.
한 해에 딱 한 번 열리는 황금 경매장의 입찰권.
그 자체로 수십 골드의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돈이 아무리 많아도 개인적으로 구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 같이 어렵다던가.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들어오는 물품의 희소성과 품질, 그리고 참여자들의 지위 때문이었다.
“황금 경매장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물건이 분명 있을 거야.”
“내가 원하는 물건?”
“체력을 증진시키는 비약이나 비전 주문을 원했잖아.”
마차의 흔들림에 나른하게 눈을 감은 채 시에나가 읊조렸다.
댈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야 말았다.
반 년도 전에 의뢰를 선별하며 했던 요구를,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염두에 두었던 건가.
“···그랬지. 기억해줘서 고맙소.”
“내가 누구야. 청동 구역 최고의 정보상이라니까.”
중얼거린 시에나는 이내 스르르 선잠에 빠져들었다.
‘황금 경매장의 입찰권이라.’
귀찮은 기사 하나 손봐준 것 치고는 과할 정도로 괜찮은 보상이었다.
황금 경매장에는 금강궁의 귀족들뿐 아니라, 대륙 각지의 왕실이나 그에 버금가는 귀족가 일원들까지 경매에 참가했다.
수백 회차의 삶을 살아온 댈런도, 이 경매에 참가할 기회를 얻은 건 열 번 남짓뿐.
부족한 체력 수치 문제는 진작에 해결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경매장에서 입수할 수 있는 영약은 체력 증진에 대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능력치를 올려주는 영약보다는, 다른 쪽을 파보는 게 좋겠지.’
이번에 미궁에서 얻게 된 수확은, 단순히 능력치 몇 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능성의 발아였으니 말이다.
‘상태창.’
댈런을 턱을 쓰다듬으며 상태창을 띄웠다. 반 년 전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진 수치와 목록들이 주르르 늘어졌다.
그러나 댈런의 눈길을 잡아끈 건, 그동안 두 배 이상 급등한 능력치도, 두 자릿수를 넘어가는 스킬의 목록도 아니었다.
상태창의 최하단.
스킬 목록보다 아래에 새롭게 떠오른 알림창.
[획득한 고유 스킬이 다섯 개를 초과했습니다.] [고유 스킬 목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수백 회차의 플레이에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두 줄의 문장이야말로, 지옥을 부순 그가 얻어낸 가장 큰 성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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