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Corpse-Collecting Warrior RAW novel - Chapter 300
시작의 빛(5)
꽈광! 꽈르르르―!
물안개 안쪽에서 터져나오는 뇌성.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크고 작은 파편들.
거대한 옥좌였던 것의 잔해들이 길거리의 돌멩이마냥 날아다닌다.
천구 아래 포물선을 그린 짧은 비행의 끝은, 어두운 수면에 처박히는 결말이었다.
첨벙! 쏴아아아!
비산하는 파편들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댈런은 쏟아지는 물세례를 맞으며 검을 휙 털었다.
“좋은 검이군.”
악신의 옥좌를 두동강내고서도 용골검은 이 하나 빠지는 일 없이 멀쩡했다.
두껍고 널찍한 날 아래 이어지는 넉넉한 가드. 물이 잔뜩 묻었음에도 불구하고 착 붙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길쭉한 손잡이.
아무리 미스릴 제련자 불리는 르베론 아하킴이라 하더라도, 대룡의 뼈와 부산물을 이정도까지 다뤄내기까지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겠지.
성기사단에서 때려잡은 대룡들의 뼈를 가공해 만든 역작은, 용살자 본인이 직접 개조한 성검 토르타니스에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돌아가면 값을 치러야겠어.”
검을 가볍게 휘둘러보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을 채운 건 수십만 개의 별이 아득하게 수놓아진 천구 아래, 사방팔방 굴러다니는 잔해들과 자욱하게 꽃을 피운 물안개의 향연.
거대한 흑색 옥좌가 있던 자리는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허나 옥좌가 박살나는 일격에도 악신은 죽지 않았다. 댈런은 물안개 안에서 뿌옇게 퍼져있는 놈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댈런. 움직임이 느껴진다.]“확인했소.”
적창의 경고와 함께 곤두서는 감각. 오른발은 조금 뒤로, 왼발은 앞으로 내디딘다.
이곳 성간옥좌는 에낙사구스의 본진이다.
적진 한가운데서는 아무리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어도, 단 한 순간 방심하면 그걸로 끝.
애초에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 외딴 섬처럼 놓인 옥좌가 박살났다 해서, 대지옥 전역에 걸쳐 드리운 놈의 권능까지 사라지는 건 아닌 법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창백한 손이 물안개를 안쪽에서부터 걷어내기 시작했다.
쉬익─
곧바로 검을 눕혀 겨눈다.
놈은 용신에 버금가는 주문의 대가.
그리고 주문쟁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뿐이다.
입을 나불대건 수인을 맺건 간에, 좌우지간 주문이 튀어나오기 전에 찔러버리면 그―.
찰박―
수면 위에 겹쳐지는 세 개의 동심원.
물안개가 흩어짐과 동시에 등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댈런! 뒤쪽···.]대비하고 있기에 반응할 수 있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배후에서 쏘아졌던 열두 줄기의 보랏빛 광선이 정면에 나타났다.
───────
빙글 회전하며 여섯을 흘리고.
─────┤!!!
검면을 세워 셋을 흘려낸다.
촤르르르― 화륵!
아르보르의 사슬로 하나. 적창의 불길로 둘.
푸른 냉기가 마력을 얼려 튕겨내고, 검붉은 화염이 광선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붉고 푸른 권능이 자줏빛 색채와 충돌하며 파괴적인 무지개를 그려낸다. 형형색색 반짝이는 이슬 사이로 악신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세 걸음.
사라지는 신형.
위에서부터 짓누르는 저릿한 살기에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밤하늘을 유영하던 별들이 일제히 그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 ··· ··· ··· ···.
수십만의 이글거림 속에 녹아나는 소리 없는 살의와 저주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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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평선 너머까지 점철된 적개심이 아릿하게 피부를 찔러온다.
“···이런 시발.”
딛고 선 세계에게 거부당하는 게 이런 느낌일까.
턱턱 막혀오는 폐부를 열고 간신히 욕을 뱉은 순간, 별과 바다가 동시에 반짝였다.
천구의 별들이 수만 줄기의 광명을 직선으로 쏘아내리고.
보랏빛으로 물든 망망대해의 수면에서 위협적인 마력이 끓어넘친다.
‘피하는 건 불가.’
찰나의 찰나를 다시 쪼갠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판단을 내린다.
눈에 보이는 공간 전부를 채우는 공세. 몸을 움직일 여백은 없다. 내딛는 순간 세계에 짓씹히는 결과만이 존재할 뿐.
두근.
상관없다. 부재한 여백은 개척해내면 되는 일.
두근.
오랜만에 거세게 약동하는 심박을 느낀다.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후우.
오래 전 악마에게 빙의된 대사도를 상대했을 때처럼.
미궁에서 성기사를 타락시킨 악마를 찢어발겼을 때처럼.
그러모은 호흡이 산소와 마력을 폐부 깊숙한 곳까지 채우고.
타는 듯한 열기가 혈관을 따라 온몸의 근섬유 하나하나에 퍼져나간다.
끓어넘치는 용의 혈액과 근골을 기점 삼아, 발끝에서부터 폭발적으로 터져올라오는 순수한 힘.
두웅━━━
내디딘 진각이 수면의 보랏빛 마력을 찍어눌렀고.
쩌━━━━━━━!
휘두른 검끝이 내리쬐는 별빛을 부쉈다.
* * * * * *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암흑.
시끄러운 정적이 사위를 가득 메웠다.
억눌린 바다와 부서져내린 별빛 너머, 거대한 애벌레 같은 악신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에 달하는 창백한 손아귀는 전부 축 늘어져 있었다. 놈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신위를 넘어섰나.]악신의 전성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가면 같은 얼굴이 댈런의 검을 지그시 바라봤다.
검신에서 희미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그 곁으로 부서진 별빛이 가루처럼 흩날리며 떨어지는 광경.
세계의 힘을 정면에서 받아치는 일격이라. 악신은 고개를 저었다. 놈이 중얼거렸다.
“······.”
[허나 네가 나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를 죽일 수는 없어. 나는 지옥과 합일을 이룬 존재다. 이 무한한 세계가 곧 나의 본체라는 말이다.]대답은 없다. 검을 늘어뜨린 채 놈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천천히 내딛는 걸음마다 여백과 떨림이 더해지는 전성.
주춤주춤 물러서는 악신 표정 역시 조금씩 일그러진다.
[설령 내 육신을 찢고 영혼을 깨뜨린다 하여도 마찬가지. 이 지옥의 정경이 단 한 뼘이라도 존재하는 이상, 나는 다시 한 번···.]“그럼 여기가 없어지면 되나?”
[······뭐?]댈런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악신도 뒷걸음질을 멈추고 흠칫 떨었다.
“네가 통합한 대지옥이 문제라며. 그럼 이걸 없애면 너도 사라지는 거겠군.”
[지금 무슨 생각을···.]“어려운 일은 아니지. 세계와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그만큼 양쪽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니까.”
무어라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검을 휘두른다.
검면에 묻은 별빛 조각이 흩날리고, 그 끝에서 종이처럼 구겨지는 물안개.
───━━━
이제는 익숙해진 이격감이었다.
뭉그러지고 찢어지는 세계의 경계. 그 틈으로 파고드는 다른 세계의 법칙과 질서.
──━━│││
공기가 달아오르며 식는다.
둥실 떠오르는 물방울 속 기포는 아래로 침잠한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해수면.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는 별의 바다.
[너······!]┃┃││││┃┃
「영역 강림」
「설산에 내리쬔 시작의 빛」
빛의 기둥이 먼저 어둠을 밝히고.
「닫힌 설산의 하늘」
검붉은 먹구름이 별빛을 지워버린다.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
중력에 뒤집혀 솟구치는 바닷물.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수평선 끝에서부터 뒤덮이는 잿빛의 색채.
「이색의 비룡」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창공 위 서릿발의 수호자」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전격과 화염의 용이 오색 번개의 바다를 유영한다.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고 솟은 대장간에서 수만 정의 병장기가 쏟아져 나왔다.
거침없이 드리워지는 영역의 정경에, 천구가 조각나고 암흑의 바다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세계 한가운데. 입을 쩍 벌린 악신이 소리쳤다.
[너···너! 지금 네가 벌이는 일의 대가를 아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은 하고 있냐는 말이다!]악신의 전성은 불안정했다. 대지옥이 붕괴하며 놈 역시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뭄 속 나뭇가지처럼 비쩍 말라 바스라지는 팔들. 찐득하게 녹아내리는 둔중한 애벌레의 동체.
[신위가 무엇이냐. 세계를 뜻대로 움직이기에 신이라 일컬어지거늘. 그 세계를 정면에서 맞부딪히겠다고? 소멸하는 건 나의 대지옥만이 아니다!]댈런은 말없이 무너져가는 놈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영역과 영역이 충돌할 때 어떻게 되는지. 서로 다른 질서와 법칙이 부딪히면 어떤 결과물을 만드는지.
[너의 세계 역시 무너질 것이다! 너의 위계도, 너의 영역도!]그림자가 아닌 진짜 세계에 남은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다.
미궁에서 댈라인의 영역과 격돌했던 몇몇 설산의 봉우리들은 여전히 무너진 채였다.
영역의 개방이 그림자를 소환해 덧씌우는 것이라면, 강림은 말 그대로 본체를 움직이는 거니까.
세계를 움직이는 신의 권능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아까운 줄도 모르는 건가. 네가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질 텐데!]“아깝지, 새꺄.”
악신이 흠칫 굳었다. 댈런은 픽 웃었다.
“이 빌어먹을 중세랜드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특히 너 때문에.”
아쉬움이 없는 게 아니다.
미련이 남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에 변함은 없었다. 댈런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어 들었다.
“결과를 봤거든.”
시선의 끝은 검붉은 먹구름과 뇌전의 바다 너머, 별이 요동하는 천구를 지나 거꾸로 펼쳐진 대지옥의 정경을 향해서.
하나로 합쳐진 네 개의 지옥도 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각자의 영역을 개방하고 힘을 끌어내며는 수백의 영웅들.
부상과 죽음마저 도외시하고 지옥의 군세에 맞서는 각 세계선의 결말들.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봤어. 수백 번이나.”
그들 중 일부는 지킬 힘조차 얻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모두가 무력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아니다.
태산을 옮길 힘과 권능을 얻은 이도 있었고, 인간의 몸으로 신을 죽인 업적을 달성한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힘을 얻었음에도 무엇 하나 지킬 수 없었기에, 오히려 더 비참한 결말의 주역이었고.
사령술사나 투신의 회차를 제외하고도 멸망 이후까지 살아남아본 적 없는 게 아니었다.
멸망한 뒤의 세계에서 목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더 이상의 육성을 포기하고 캐릭터를 삭제했을 뿐.
“내가 힘을 키운 건 지키기 위해서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주객이 전도된 자의 결말은 비참했다.
전생의 지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다 쓸 수 없는 돈과 끝없는 영예와 명성을 얻은 이들 중에, 우울감과 실의에 잠긴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술과 약에 절여진 채 침잠하는 하루하루를 견디다, 종국에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까지 내몰린 사람들도 드물지 않았다.
“···그래.”
육신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악신이 말했다.
전성이 아니었다. 녹아내린 허물 안쪽, 사람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육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결의는 인정하마. 허나 인간, 나는 지금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네 목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음?”
“글쎄.”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말했다.
“해봐야 알겠지.”
조용히 읊조린 말. 기다렸다는 듯 뒤따르는 발소리.
검붉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오랜만에 보는 무복 차림이었다.
[댈런.]“카멜리아.”
[이번만큼은 되묻지 않겠다. 나는 너의 창이다.]「다시 태어난 고룡이 몸을 뉜 절벽」
창을 뽑아든 여인이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변하고.
「묘지에 퍼져나가는 위령의 메아리」
수십만의 원혼이 귀곡성과 함께 별빛을 향해 날아오른다.
「인세를 불태우는 검은 태양」
검은 태양이 불길한 노을을 비췄다. 바다를 넘어 합일을 이룬 네 대지옥에까지 닿는 황혼이었다.
어느 순간 댈런은 단단한 지면을 딛고 있었다. 뽀득거리며 발밑에서 부서지는 눈. 설산이었다.
“···협상. 협상을 하지.”
악신이 말했다. 녹아버린 육신 안쪽에는 사람의 형상이 서있었다.
댈런은 어깨를 한 번 더 으쓱하고 검을 들었다. 그는 별 말없이 놈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뭘 원하나. 부와 명성은 아니겠지. 이미 신위에 올랐으니 영생도 아닐 터. 그러면 지고지순한 여인들의 사랑은 어떤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역산하고 그 이면마저 상고할 수 있는 지혜는?”
허물이 완전히 벗겨진 악신은 체격 좋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새까만 가면을 쓴 청년은 손사레를 치며 열변을 토했다.
“그래. 그럼 다른 거. 너는 이계에서 왔지. 허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어떠냐? 세계와 세계를 잇는 통로를 개척하는 건 나에게도 큰 도전이지만, 너와 함께라면 못할 일도 아닐 테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발걸음은 눈밭에 길게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물론 댈런의 발걸음 역시 눈밭에 자국을 남기는 건 동일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앞으로 걷는 속도가 뒷걸음질보다 빨랐다. 둘 사이의 거리는 어느새 십여 걸음 안쪽이었다.
“자, 잠깐! 이게 해결책이라 생각하지 말아라! 지옥은 인세의 죄업과 악의가 쌓인 침전물이다. 단순한 무력으로 끝나지 않는 굴레야!”
다섯 걸음.
뒷걸음질치던 청년이 넘어졌다.
“내 민낯이 지금과 같은 건 그 때문이다. 테모므론이 그랬고 쑴이 그랬듯이, 우리의 근원은 인간의 죄업이란 이야기···아악!”
세 걸음.
검끝이 호선을 그렸다.
잘려나간 발은 더이상 땅을 밀어내지 못했다.
청년의 등이 눈밭에 파묻혔다.
“인간이···타락을 유지하는 이상···악은 언제고 다시 범람할 거다.”
“알아.”
“······뭐?”
한 걸음.
검끝이 땅을 파고들었다.
폐와 심장이 잘린 청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빈손이 허리춤을 더듬었다. 도끼는 잘 달려있었다.
“너네들 수천 년 전에 이미 한 번 뒈졌잖냐. 지금 죽여도 수천 년쯤 뒤면 비슷한 놈들이 또 생기겠지.”
걸음을 멈춘다.
허리춤의 손이 움직였다.
청년의 이마에 길쭉한 뼈 손잡이가 돋아났다. 용골제 도끼였다.
“그때 되면 누가 또 일하겠지. 게임이든 소설이든 뭐든.”
“······.”
“역천의 우물인가 걔가 알아서 하지 않겠냐. 내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댈런은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새 엉덩이가 축축하게 시려왔다. 저기 보이는 오두막에 들어갈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불 땔 나무도 없는 오두막. 곰팡이 핀 육포 따위나 몇 조각 있을 뿐이다.
한숨을 푹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먹구름이 보였다. 그 위에는 번개의 바다도 있었고, 새까만 태양과 별 가득한 천구도 있었다.
꽈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세계와 세계가 점점 겹쳐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풍경들이 충돌하고 소멸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반짝 하고 빛이 나면 먹구름 한 주먹이 날아가고. 다시 반짝 하면 별의 바다가 한 움큼. 또 반짝에 파멸궁전의 첨탑 하나. 잿빛으로 물든 설산의 봉우리가 하나.
반짝임은 조금 지루할 정도로 한동안 이어졌다. 차갑고 축축하던 엉덩이가 적당히 따뜻하고 축축해질 무렵까지.
그렇게 얼마간이 지나자 잠시 모든 반짝임이 멈추고.
━━━━━━━
밝은 빛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수많은 심상이 모여 하나가 된 세계와, 수많은 죄업이 모여 하나가 된 대지옥.
두 세계가 완전히 겹쳐지면서 터져나온 빛은 백색이었다.
마치 게임 시작 때의 모니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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