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56
총독의 말마따나 어린 위르겐에게도 악마가 필요했다. 속에 담긴 증오를 토해 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다.
형제, 어머니, 유모, 벗들.
떠나간 사람들을 곱씹으며 슬퍼할 생각은 없었다.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차피 사람을 잃은 건 자신뿐이 아니었다. 그러자 슬픔 대신 분노가 자라났다. 해소할 길 없는 슬픔에 비하면 분노는 차라리 나았다.
위르겐은 세르게이를 증오했다.
그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타당한 명분이 있었다. 잠시나마 믿었던 여자의 가족. 머뭇거리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길 때 지어 보인 미소, 시체 위로 담뱃불을 내던져 짓밟던 행태.
차라리 적군의 총에 맞아 형제를 잃었다면, 죽은 형제를 향해 명예로운 죽음을 맞았다며 칭찬이라도 건넸을 것이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지 않나.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시절이었다. 원래 죽음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위르겐은 어린 시절의 증오를 오래도록 간직하지 않았다. 괴로웠던 마음조차 점차 잊어 갔다. 그대로 잊었다면, 그 또한 다른 이들처럼 평온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스볘타…….’
사랑인지 증오인지 모를 마음이 자라나 뿌리를 내렸다.
스볘타에게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건 진작 깨달아 알았다. 배신감을 느꼈어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복수하고자 했다. 어리고 순진해서 뜻 없이 내뱉은 말일지라도 죄를 묻고자 했다. 어쨌건 세르게이가 총구를 당긴 까닭은 스볘타 때문이었다. 스베타가 울면서 제 형제의 이름을 부르짖지만 않았어도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형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도 다른 이들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위르겐은 자신이 미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어느 순간 미쳤는지 집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광기에 휩싸여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지 못했다.
역겨운 소유욕을 감추기 위한 명분이고 핑계였다. 처음으로 느낀 온기를 우악스레 붙잡고 놓치지 못했다. 그 애정을 못 잊어 쫓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수치심에 구역질이 일었다.
하필 네가, 그 남자의 여동생일 건 없었잖아.
패륜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끝까지 자신을 책임지고자 했던 형제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여자를 손에 쥔다 해도 그것은 아주 찰나여야만 했다.
“세료자, 죽여 버려.”
그러나 지친 얼굴, 빌어먹게 야윈 몸. 당장 사그라진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위태로운 스베틀라나. 그의 스베틀라나.
애초에 마음먹은 한 놓아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열두 살의 그에게 스볘타는 친구였지만, 스물한 살의 그에게 스볘타는 여자였다.
여태껏 그의 세상은 잿빛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술에 절어 길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한심하다기보다는 가련했다. 스볘타는 젖어서 눌러 붙은 옷가지를 걸친 채 벌벌 떨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빛을 토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의 스볘타 또한 잿빛이었다.
위르겐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우산을 놓쳐 위르겐 또한 비에 젖었다. 젖은 머리칼이 늘어져 이마를 덮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차가운 빗물을 옷소매로 훔쳐 냈다.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무릎을 굽혀 스볘타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각하진 못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아. 내가 너를…….
평생 색을 알지 못했던 그는 처음으로 색을 읽어 냈다. 스볘타의 젖은 뺨은 옅은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입술이 발갰다. 그녀가 기댄 담벼락은 회색이었고, 담벼락에 달라붙어 자라나는 넝쿨은 갈색이었다. 그의 단조로운 세상은 색을 찾아갔다. 그럴수록 위르겐은 견디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평생 몰랐어야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독주를 삼킨 것처럼 몸과 정신을 가눌 수 없었다. 휘청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싶었다. 제 자신을 저 여린 몸뚱이에 박아 넣고 싶었다. 더러운 욕정이 영혼 위에 새겨졌다. 그는 종일 그것만을 생각했다. 꿈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칠 길이 보이질 않았다.
형을 죽인 남자의 여동생이다.
역겨웠다. 징그러웠다. 욕정을 느끼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벼락처럼 내리꽂혀 자신을 뒤흔든 그 감정이, 그 감정이 하필이면 사랑인 것 같았다. 동정도 아니었다. 오직 욕정뿐인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욕정이 전부였다면 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니었다.
무엇이든 퍼붓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제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 위르겐은 스볘타를 증오하려 애를 썼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은 깊이를 더해 갔다. 내뱉지 못해 추하게 썩어 갔다. 어느덧 스볘타는 그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는 감상적인 부분은 도려내고 싶었고, 스볘타에 관해서는 뿌리까지 뽑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영혼 위에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았다. 도려내도 다시 돋아나는 새 살점처럼, 매번 고통스레 돋았어도 어떻게든 다시 차올랐다. 벌어졌다가도 다물리고, 패였다가도 채워지며 그렇게…….
차라리 이 눈앞에서 부서져라, 스볘타.
미련조차 남길 수 없게 네가 내 앞에서 죽어라.
스볘타를 향한 갈망으로 위르겐의 전신이 발작했다. 그는 온몸을 떨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죽일 수가 없었다. 그것만 죽어 없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음에도.
그녀를 괴롭히는 모든 순간에는 복수가 없었다. 그는 복수하지 못했다. 관심을 구걸하며 애새끼처럼 애원과 욕정을 퍼부었다. 그녀가 제게 품은 감정이 증오라 할지라도 눈길 한 번, 손짓 한 번 얻어 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여자 또한 저를 머릿속에 담아낸다면.
그것이면 족해서…….
모든 것을 인정한 위르겐은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게 그의 성미에 맞았다. 역겹고 추잡해도 그는 스볘타를 가지고 싶었다.
사람들은 뿌리부터 이기적인 인간을 이타적으로 만든다는 유일한 매개체가 사랑이라고 떠들었다.
그렇다면 위르겐은 스볘타를 사랑하지 않았다.
***
숲을 헤매게 되었다.
해가 짧아 금세 어둠이 내리깔렸고,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사방은 캄캄해졌다. 길을 찾아 헤매던 스볘타는 결국 돌부리에 걸려 무릎을 박고 넘어졌다. 무거울 만큼 바구니를 채웠던 차가버섯 또한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괜찮습니까?”
스볘타는 몸을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위르겐은 스볘타를 붙잡아 일으킨 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주저앉아 흩어진 차가버섯을 다시 바구니에 담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문 것은 아니기에 그나마 버섯을 주워 담을 수는 있었다.
“이제 곧 해가 완전히 질 겁니다.”
“…….”
“입으세요.”
위르겐이 열없이 스볘타의 어깨 위로 자신의 코트를 던져 주었다. 바들바들 온몸을 떨던 스볘타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긴 싫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추위에 질린 스볘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안색이 파리했다.
“당신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추위로 형편없이 떨렸다. 온기가 묻은 코트를 바닥에 내던지는 팔도 그러했다. 위르겐은 자신의 코트를 다시 쥐어 들어 그녀에게 억지로 입혔다. 몇 번 저항하던 스볘타는 곧 인형처럼 힘을 잃었다.
“그럼 그냥 죽을 생각인가?”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추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넘어지며 삐끗한 발목이 욱신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그래도 위르겐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 스볘타.”
위르겐은 바닥에 늘어진 스볘타를 또 한 번 억지로 일으켰다.
“내가 싫거든 복수할 생각을 해야지.”
“복수…?”
“여기서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나?”
그에게 매달리듯 서 있던 스볘타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나더러 당신처럼 살라는 거야?”
스볘타는 비웃음을 삼키지 못하며 온몸을 뒤틀며 깔깔깔 웃었다.
“지금 당신 꼴이 어떤 줄은 알아?”
위르겐은 불쾌한 기색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얌전히 안긴 스볘타가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얼굴을 바싹 붙여 그를 조롱했다.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
위르겐은 스볘타의 조롱 섞인 말을 무시하며 적당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날이 저물었으니 길을 찾는 건 무리였다. 횃불을 만들어 길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스볘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추위만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위르겐은 적당한 곳을 찾아 불을 피우고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바닥에 요처럼 깔았다. 그 위에 스볘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가 피워 둔 장작불 앞에 바싹 몸을 붙이고 앉았다.
“난 분명 오늘 죽을 거야. 위르겐, 여기서… 난 죽을 거야…… 죽을 거야…….”
목소리가 꿈에 잠긴 듯 몽롱했다. 스볘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벌벌 떨며 꾸벅꾸벅 졸았다. 그에게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저대로 두면 얼마 못 가 동사할 것이다.
위르겐은 그녀를 등진 채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 내렸다. 겉옷뿐 아니라 꽉 잠갔던 셔츠까지 벗어 냈다. 근육 진 상체를 완연히 드러낸 채 위르겐은 스볘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벗어.”
스볘타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위르겐의 벗은 몸 위에 머물렀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이 가득한 낯빛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굼뜬 손으로 옷가지를 벗어 내기 시작했다.
위르겐은 그녀를 감싸 안고 옷가지를 덮었다. 그는 차가운 스볘타의 몸을 품에 품고 눈을 감았다.
“위르겐.”
잠든 줄 알았던 스볘타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온기를 되찾은 살갗이 부드러웠다. 위르겐은 감았던 눈을 떠 버둥거리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아침까지만 참아.”
덮고 있던 흐트러진 옷가지 속으로 냉기가 끼쳤다.
“아파…….”
스볘타가 버둥거리며 신음했다. 위르겐이 지나치게 억세게 껴안은 바람에 허리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뒤늦게야 실수를 깨닫고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딱딱한 팔이 닿았던 부위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스볘타는 위르겐을 용서하고 싶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설픈 객기였음을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위르겐은 미안하다는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스볘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그를 용서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가족들을 빼내 준 일… 거래.
거래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거래…….”
곱씹듯 중얼거린 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거래, 거래. 그럼 위르겐과 나눈 행위들은 전부 매춘일까. 그것들이 전부 매춘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까.
“만일 내가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럼 아무 일도 없었을까?”
“아니.”
위르겐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스볘타 또한 직감했던 사실이었다. 스볘타는 몸을 뒤척여 하늘을 보고 누웠다. 별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구름이 짙게 끼어 있었고,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녀는 하늘을 보고 누운 뒤에야 자신이 그의 팔을 베고 누웠음을 눈치챘다. 당장이라도 치우고 싶었지만 지친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종일 걸었던 몸은 너무 지쳐 힘을 쓰지 못했다. 주먹을 쥐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제 그녀에겐 정비소에서 소처럼 일할 때만큼의 체력이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몸을 쓰지 않아 체력이 형편없었다.
그런 몸으로 종일 걸었다. 위르겐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고,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볘타는 버섯을 따 내 바구니에 담으며 시장에 내다 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그녀가 걸음을 멈추지 못한 이유가 되진 않았다.
탈진할 때가 다 되어서야 모든 피로가 밀려왔다. 추위로 덜덜 떨며 정신을 반쯤 놓을 지경이 되어서야 넘어져서 주저앉았다. 어쩌면 주저앉는 것은 그녀가 원하던 바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위르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몸을 섞던 시절처럼 나체였다.
“진짜 거래였다면…… 당신이 증오스럽진 않았을 텐데.”
씁쓸한 음성이 위르겐을 파고들었다.
“당신이 처음으로 정비소에 찾아왔던 날이 기억나.”
그녀는 다시 한번 몸을 뒤척여 위르겐을 바라보았다.
“물을 주려고 했었잖아. 그렇지?”
“그랬지.”
“실은… 받아 마시고 싶었어. 그동안 나는 너무 목이 말랐었거든.”
투명하게 흔들리던 물이 담긴 유리병을 바라봤을 때, 견디기 힘든 갈증이 일었었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