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9
선제후란 이름은 투표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그들의 신성한 권리를 의미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선출권이다. 제국에서 얼마나 끗발이 세겠는가.
선제후 정도면 그 위엄이 일국의 왕이나 마찬가지다. 하여 황제 다음가는 존칭인 ‘존귀하신 전하’라 하여 예를 갖춰야 한다.
“그대가 군기를 탈취했다는 용병인가?”
강철 선제후 필립이 날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임에도 그 눈에는 비범함이 가득해 보였다. 마치 번들번들 빛나고 있는 용의 눈 같았다.
“그렇사옵니다. 이리 직접 불러주시니 소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광이나이다.”
내가 예법에 맞게 말하자 그는 살짝 웃는다. 일개 용병 주제에 하는 짓이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발러슈테드 발러. 맞나?”
“네, 전하.”
“그대의 용기는 실로 놀라웠다. 방진으로 육탄 돌격하여 군기를 빼앗다니 실로 성난 사자와 같구나.”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니다. 무훈을 세운 자는 그에 해당하는 상찬을 받아야 하는 법. 이번 일의 수훈자에겐 모두 상금을 내리겠다. 그대와 함께한 병사들에겐 100플로린을, 그대에겐 300플로린을 하사하겠다.”
100플로린이면 장창병의 1년 연봉이다. 그 세 배를 받았으니 큰돈이었다.
“내려주신 은혜, 망극하나이다. 전하.”
“당연한 조치일 뿐이다.”
“전하, 한데 소인이 송구스럽지만 한 가지 청이 있나이다.”
필립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소인들이 심한 부상을 입었나이다. 전투가 한창인 때이지만, 동료들과 비텐바이어로 물러나길 청하나이다.”
비텐바이어는 여기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도시다. 오늘 일이 단순히 전투의 승패를 파악하는 걸 넘어 발푸르기스의 목숨이 걸렸단 걸 안 나는, 한 발 빠져 대비할 작정이었다.
“상처를 입었다니 의당 그래야지. 걱정하지 말거라. 안 그래도 그리 조치할 생각이었다. 짐수레를 내줄 테니 동료들과 타고 가도록.”
그나저나 이렇게 필립을 만남 김에 군사적인 조언을 해야 할까? 나는 이후 하르프하임 전투의 전개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 오늘 싸움에는 두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필립이 그걸 극복하면 승리고 극복하지 못하면 패하게 된다.
“흠….”
사실 이대로 그냥 물러나는 게 제일 현명하다. 쓸데없는 소리 해 봐야 강철 선제후 필립과 그의 가신들의 신경을 긁을 뿐이다. 그렇지만 말이나 해보자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발푸르기스도 발푸르기스지만, 다른 용병들도 걱정됐다.
“전하.”
“더 바라는 게 있는가?”
“은상(恩賞)과 자비가 충분하신데 제가 뭘 더 바라겠나이까. 다만 전하께 이 미천한 소인이 한 마디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평소라면 이 지엄한 존재 앞에 이렇게 나설 수 없겠지. 군공을 세운 입장이라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벌써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받고 꺼지지 주제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안 될 건 없지. 무슨 얘기를 할 생각인가?”
“전하. 소인이 보기에 전하의 군대에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게 있어서 그렇나이다.”
순간 필립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내 말에서 무언가 조언하려는 기색을 민감하게 느낀 것 같다. 아마 그는 자신의 완벽함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신분도 낮은 자가 염려 가득한 말투로 무언가 꺼내려고 하자 기분이 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최대한 예의바르게 행동했는데도 이렇군.
게다가 나는 그가 열정적으로 꾸려온 군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필립은 살짝 빈정거렸다.
“호? 그것은 무슨 관점에서이더냐? 전술적 관점이냐? 정치적 관점이냐? 아니면….”
그는 날 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사람 좋은 인상 뒤에 숨겨진 야비함이 일순간 엿보인다.
“금전적 관점인가?”
주변의 귀족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내가 주제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겠지. 몇몇은 노골적으로 날 씹기 시작했다. 비웃음을 터뜨리는 자도 보였다.
“군공을 세운 건 좋다. 하지만 네까짓 게 감히 전하의 군대를 걱정해?”
“어디서 알량한 정보라도 얻은 모양이지요. 받은 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더 타낼 속셈인가 봅니다.”
나는 기분이 상한다기보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강철 선제후는 수호자가 분명할 텐데 왜 저리 소인배 같은 모습일까? 도저히 수호자 클래스의 배포가 아니었다. 오늘 그와 혹시나 인연을 맺을까 싶어 온 나는 커다란 실망감을 느꼈다.
왜 이런 걸까? 내가 일반인을 택한 탓에 나타나는 특이점인가?
문뜩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일반인을 택한 탓에 수호자 캐릭터가 모조리 세계에 출현한다면, 마왕 쪽은 대위기에 처하겠지. 그들 하나하나로도 전쟁의 흐름을 바꿀 정도였으니까.
하면 밸런스가 조정될 필요가 있다. 수호자 여럿이 한 마음, 한뜻으로 마왕과 싸운다면 인류 평화가 금방 올 것이니까. 하지만 초지성체 아퀼라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 놨을 리가 없다.
순간 나는 무서운 가정이 들었다. 그 강력한 수호자들이 사리사욕에 물든 이기적인 자들이라면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까?
아마 내가 겪었던 방향과 아주 다르게 진행될 거 같았다. 어쩌면 나는 마왕뿐 아니라 그 날고 기는 수호자들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걱정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일단은 현재 상황에 대해 경고하는 게 우선이었다. 강철 선제후는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지만. 난처해 하고 있는데 뜻밖의 인물이 끼어들었다.
“전하. 모르는 사람 셋이 함께 길을 가도 그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데 어찌 전하를 위해 봉사하는 검객의 말을 흘려 들으려 하십니까?”
더없이 기품 있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것은 불량배 같은 비아냥과 천박함으로 가득 찬 이곳의 귀족들을 꿈에서 깨어난 것 마냥 화들짝 놀라게 했다.
“흐음!”
“크흠!”
귀족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괜히 헛기침했다. 자존심 강한 귀족의 특성상 저런 대놓고 다 들으라고 하는 일침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누구하나 따지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입을 연 게 발푸르기스이기 때문이었다.
“영애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니 알겠소.”
그녀의 신분 때문에 필립도 조심스러웠다.
“영애라 칭하지 마시지요. 이 자리에 저는 한 명의 창기병으로 종군하고 있습니다.”
“미안하오. 발푸르기스 경.”
“전하. 저자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바른 말을 한다면 포상하고 그른 말을 한다면 군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입니다.”
“그 말이 맞소. 내 그리하지. 크흠!”
한 번 헛기침을 한 필립은 날 바라본다. 나는 발푸르기스의 도움에 눈빛으로 감사했다.
“용병이여. 무례를 사과하지.”
“당치않나이다. 전하. 그저 소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좋다. 말해보게. 과인이 꼼꼼히 준비한 전장에서 무엇이 그리 걱정스러운지.”
필립의 말에 그의 가신단과 기병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쏠렸다. 일순간 그 압박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려 필립의 뒤에 있는 음험한 사내를 쳐다봤다. 매부리코에 다소 신경질적일 것 같은 인상.
저자가 바로 오늘 필립이 패배하는 원흉인 프리드리히다. 필립의 숙부인 그는 오늘 조카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린다. 적과 내통한 배신이었다.
그는 필립의 자리를 오랜 세월 노려왔다. 지금까지 잘도 사람 좋은 친족 행세를 해왔는데, 드디어 오늘이 본색을 드러내는 날이다.
그의 진갈색 눈동자가 마치 뱀처럼 날 훑어보고 있었다. 눈은 마치 ‘이건 뭐하는 버러지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그의 배반을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누가 믿겠는가? 프리드리히는 성격이 고약하지만, 제국 최고의 거부 중 하나다. 제국에는 돈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진 금화의 높이만큼이나 주변의 신망을 쌓고 있었다.
반면 나는 일개 낭인에 불과하다. 군기를 어지럽히고 고위 귀족을 모독한 죄로 참해질 게 뻔하다. 나는 감히 프리드리히에 관해 얘기할 수 없었다.
대신 전술적 관점에서 경고하기로 했다. 오늘 그가 패하는 원인은 배신과 매복이란 두 가지 요소 때문인데, 배신에 대해 얘기할 수 없으니 매복에 대해서라도 말하려는 거다.
“저길 보시옵소서. 전하.”
나는 적의 우익이 자리 잡고 있는 구릉지를 가리켰다. 놈들은 거기서 아군을 향해 마법을 날리고 총질을 해대는 중이었다.
“전술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나이다. 아군이 저곳에 자리를 잡으면 마왕군에게 포격을 가하기 좋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길 지키는 구릉지의 병력은 허술하나이다.”
내 말에 한 기병장교가 코웃음을 친다.
“흥! 누가 그걸 모를 줄 아느냐! 그 알량한 지혜를 자랑하러 왔나 본데, 우리는 이미 저 구릉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한 뒤다!”
기병장교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깔보는 분위기가 다시 피어나던 그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나리. 저곳은 사지가 될 것입니다. 한데 어찌 들이받으시려고 하십니까?”
“뭐? 뭐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당황하는 그. 설마 평민인 내가 귀족인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면박할 줄은 몰랐겠지. 그는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뭐라 폭언이라도 쏟아부을 듯 입을 열려는 그를 필립이 손을 들어 막는다.
“호오, 어찌 그리 생각하느뇨?”
필립은 흥미를 보였다. 그렇지만 그 눈빛은 매우 날카로워 허튼 소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색이 다분했다. 아마 여기서 저 구릉지가 수상한 이유는 그냥 소인의 감이옵니다, 라고 했다가는 목이 남아나질 않겠지.
“전하, 소인의 생각으로는 저 언덕 너머에 매복이 있음이 틀림없나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필립의 물음에 실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기로 했다. 나는 오랜 시간 이 세계에 상주하면서 숙적인 마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서열 12위의 마왕, 피와 죽음의 페자무트 역시 마찬가지. 나는 그가 인간을 상대로 벌였던 전투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었다.
“전하. 페자무트는 다른 마왕에 비해 제국의 군대와 회전을 치른 경우가 적사옵니다. 하오나 몇 차례 그 회전에서는 연전연승이었나이다. 이는 그 자가 매복에 실로 능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해 보거라.”
“10년 전 토아 왕국의 국왕 로드리고 4세와 페자무트가 싸왔 던 전투 역시 매복 작전이 승패를 갈랐습니다. 6년 전, 안할트 변경백과 페자무트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말을 그때 필립이 받았다.
“2년 전 황제 폐하의 대리장군, 오이겐 공작을 패배시킬 때도 마찬가지였지. 그대는 전사戰史에 밝구나.”
“과찬이시옵니다.”
“그래, 과찬이겠지. 큭큭. 그대의 염려는 이해하나 과인은 당연히 그런 매복도 극복할 수 있느니라.”
역시 이 새끼는 재수가 없구나.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저놈 목소리가 심히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매복에 굴하지 않는다는 저 자신감이 허세가 아닌 건 맞다.
강철 선제후의 능력이면 당황하는 군대를 추슬러 적에게 반격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 권력에 눈이 먼 숙부가 널 조질 예정이란다. 그걸 모르고 웃고 있으니 보는 입장에서 속이 터지겠다.
수호자라고 해도 그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 강철 선제후라고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까 세상이 다 자기 것 같겠지. 이 빡대가리 같은 새끼.
속으로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결정했다. 일찌감치 그를 버리는 게 좋겠다. 나는 필립에 대신 발푸르기스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필립은 실망감을 줬지만 발푸르기스는 영웅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연을 맺으면 앞으로의 행보에 커다란 도움이 될 터.
결정을 내린 나는 빠지기로 했다. 오늘 이 전쟁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수녀기사 발푸르기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할 게 많았다.
“전하. 소인이 주제넘게 나섰나이다. 이만 물러가고자 하옵니다.”
나는 강철 선제후의 가신단 뒤쪽에 있는 한 늙은 장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 사람은!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이 아닌가!
저 전설적인 장군이 지금 여기 왜 있는 거지?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중요한 인연은 필립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틸리와 안면을 터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그는 내게 관심을 보였다.
늙은 틸리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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