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1
프롤로그
자신이 특별한 인재라는 자신감만큼 그 사람에게 유익하고 유일한 것은 없다.
-데일 카네기, 세일즈맨, 인간관계전문가, 성공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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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ERP (1)
“상반기 일등 영업지점은 바로…… 서울 강서지점입니다! 축하합니다. 강서지점 지점장님은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저기 계시네요. 모두 큰 박수 보내 주세요!”
커다란 박수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이백 명 정도가 모여 있는 회의장 단상 위쪽으로 백서제약 상반기 그랜드 미팅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40대임에도 몇 가닥으로 가린 앞머리가 안쓰러워 보이는 강서지점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단상 위로 힘차게 올라갔다.
오늘만큼은 대머리 콤플렉스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쳇. 웃음꽃이 피었구먼. 젠장, 이번에는 우리 지점이 일등일 거로 생각했는데…….”
박수 소리와 함께 강북지점 푯말이 걸려 있는 테이블에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지점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야, 김유빈. 네가 이번 분기에 실적 잡아먹지만 않았어도 우리 지점장님이 저기 올랐을 거 아니야!”
지목당한 유빈을 향한 팀원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말을 꺼낸 차석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유빈을 노려봤다.
“최 대리. 그만하지.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 목소리 낮춰.”
“하지만 지점장님, 억울해서 그런 걸 어떡합니까.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됐어. 하반기에 분발하면 돼.”
‘가식적인 놈.’
김유빈은 대놓고 뭐라 하는 최 대리보다 점잖은 척하는 지점장의 태도에 몸서리가 쳐졌다.
지난 반년 동안의 서러움과 억울함에 유빈의 큰 눈에 독기가 서렸다.
170cm 정도 되는 왜소하게 마른 몸이 어딘가 허약해 보였지만 하얀 얼굴 위 검은 뿔테 안경 사이로 나오는 유빈의 눈빛은 당당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자기를 힐난하는 팀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마주 봤다. 그러자 오히려 몇몇 사람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단상 위의 강서지점장은 사장님이 주신 금일봉을 들고 조금 전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면 무표정하게 있던 강동지점장의 얼굴은 불편할 정도로 딱딱해졌다.
실적 발표에 이어 임원진의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사장님의 뻔하고 긴 훈화가 끝나자 대회의장은 금방 술판으로 변했다.
직급이 낮은 사원들은 소주 한 병과 술잔을 양손을 들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본부장님은 물론이고 단 한 명의 지점장님이라도 빠뜨렸다가는 무슨 뒷말을 들을지 몰랐다.
“지점장님, 축하드립니다!!”
영업 사원들의 줄이 가장 긴 테이블은 단연 강서지점이었다.
“역시 지점장님이십니다. 존경합니다.”
아부가 술에 녹아 지점장에게 건네졌다.
“야, 야! 마셔, 마셔! 이 주임 뭐해! 소맥 제조 안 하고!”
최 대리는 이미 눈이 시뻘게져 술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다만, 같은 팀원인 김유빈에게만큼은 술잔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보면서 살살 그를 피했다.
‘하아, 왕따라니…….’
김유빈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따돌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끼리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된 모양이었다. 이미 모든 테이블을 돌며 본부장님과 지점장님들에게 술을 돌리고 그만큼 받아 마셨지만, 씁쓸한 기분에 취기마저도 유빈을 외면했다.
유빈의 머릿속에 지난 6개월이 떠올랐다.
*
대기업은 아니지만, 국내 회사 중에서는 규모가 꽤 큰 백서제약에 입사한 지 2년하고도 6개월. 제약영업이 힘들다고는 들었지만, 소문 이상으로 궂은일이 일상이었고 을의 위치는 당연한 자리였다.
오리지널 약이 없고 제네릭(카피, 복제약) 약만 취급하는 중소 제약회사 사원이 할 수 있는 영업 방법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이 백서제약에 기대하는 것도 제품 디테일이 아니라 처방 인센티브, 소위 말하는 리베이트였다.
리베이트(rebate)는 일종의 판매장려금 제도로 거래에 대한 대가로 지불대급의 일부나 이자 등을 지불인에게 되돌려 지급하는 행위를 말한다. 제약회사에서는 의사가 회사의 약품을 처방하는 대가로 금품을 지급하거나 이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물론 정직하고 대가를 원하지 않는 의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원장이나 의사들은 대개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제품 발표회로 포장된 식사와 술 접대는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차로 픽업하는 일부터 시시콜콜한 심부름까지……. 제약회사 직원인지 개인 비서인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깡과 악. 그리고 유일한 장점인 성실함으로 버티기를 이 년. 조금은 노력을 알아봐 주었을까?
마지막 분기의 실적이 전 분기와 비교해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유빈은 결과가 나타나자 숨길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고생에 대한 보상을 이제야 받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김유빈, 이번 분기 실적 좀 올랐네?”
“네, 지점장님. 디디디(DDD, drug distribution data, 도매상에서 약국으로 판매된 약품 집계)로 봐서는 한강대 브릭에서 숫자가 늘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강대병원 심 교수님이 저희 제품으로 교체 처방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심 교수님? 흐음…… 그 양반은 꽤 까다로운 분인데…….”
강동팀의 지점장인 이동우는 의외란 표정으로 유빈의 DDD 자료를 훑어봤다.
“현재 병원 부원장님이시고 학회에서도 영향력이 있으시니까 다른 교수님들도 처방을 바꿔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강대병원은 유빈이 이 년간 가장 공을 많이 들인 병원이었다. 특히 산부인과의 심우창 교수는 산부인과 학회의 부회장일 뿐만 아니라 과 내에서 약 처방량도 가장 많은 분이라 다른 의사들보다 두 배 이상의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음, 그래. 아무튼, 수고했어.”
지점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더 묻지 않고 미소와 함께 유빈의 등을 두드려 줬다. 지점장의 칭찬은 처음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왔다. 이런 맛에 회사를 다니는구나 생각하며 유빈은 더 열심히 한강대병원에 대한 영업 계획을 세웠다.
일주일 후.
유빈은 회사 생활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되었다.
“네? 지역 변경이요?”
“왜? 싫어?”
지점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점장의 표정은 일주일 전과 달리 냉랭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뭘 묻느냐는 그런 식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지금 지역을 맡은 지 이 년밖에 안 되었고 이제야 실적이 조금 나오고 있는데…….”
“한강대병원 이야기라면 네가 잘못 추측한 거야. 내가 알아보니까 이번에 도매상 쪽에서 약국 프로모션 하면서 밀어 넣었나 봐.”
그럴 리가 없었다. 심 교수님에게 직접 들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교체 처방은 펠로우 교수님에게 확인한 내용이었다.
“김유빈 씨라면 성실하니까 다른 지역을 맡아도 잘할 거야. 그렇지? 내년부터는 강북구하고 광진구 쪽 맡아서 잘해 봐.”
영혼이 담기지 않은 칭찬에 속은 더 타들어 갔다.
“그럼 노원구는…….”
유빈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한강대병원이 있는 노원구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노원구는 최한솔 씨한테 맡길 거야.”
“……!!”
갑자기 닭살이 돋고 오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유빈은 최한솔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입사하고 난 뒤부터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대하는 것과 달리 날라리 같은 최한솔을 지점장과 차석이 감싸고 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확인된 소문은 아니었지만, 동기들 사이에 최한솔이 회사와 거래하는 대형 도매상 사장의 외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이번 지역 변경에 작용한 것 같았다. 결정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유빈은 재빨리 강북구와 광진구의 실적 추이를 떠올려 봤다. 강북구와 광진구도 나름 괜찮은 지역이긴 했다.
항생제 쪽은 작년보다 처방 실적이 잘 안 나오기는 했지만, 산부인과 쪽에서는 자궁내장치의 실적이 예상외로 잘 나오고 있었다.
올해 마감은 목표 대비 80% 정도로 평타는 아니어도 망한 실적은 아니었다.
“최한솔 씨도 들었지? 내년부터 지역 바꿔서 열심히 해 봐.”
“알겠습니다. 지점장님.”
최한솔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득의만만해 보였다.
“지점장님, 그럼 다른 팀원들은…….”
차석인 최 대리가 이야기가 마무리될 듯하자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올해는 입사 동기인 두 사람만 바꾸기로 하지. 이제 영업 경험도 어느 정도 쌓였을 테고 진정한 영업은 지금부터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들 해 보자. 두 사람은 서로 인수인계 철저히 하고. 올해는 우리 지점이 일등 한 번 가야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올해는 기필코 지점장님이 단상에 오를 수 있도록 팀원들과 똘똘 뭉쳐서 해내겠습니다.”
“그래. 최 대리가 팀원들 잘 다독여서 같이 해 보자고. 그런 의미로 오늘은 회의 끝나고 회식하지.”
“넵!! 알겠습니다. 장소 물색해 놓겠습니다!”
술 좋아하는 최 대리의 얼굴이 벌써 발그레해졌다. 지점장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주 일품이었다.
그런데도 유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트북 화면의 디디디 엑셀 파일만 멍하니 바라봤다. 한강대병원만 잘 뚫으면 내년에는 베스트MR(Medical Representative: 제약영업사원)도 꿈이 아니라 생각했다.
허탈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유빈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지역 변경은 다가올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