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41
그리고 다시 새로운 제물이 지하실로 들어왔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이제 대공은 텅 빈 눈동자로 제물을 바라보았다.
제물은 죽음을 예견하고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지만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생명이 다한 것이다.
대공은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지만 조금도 흥이 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마법진으로 향했다.
원탁 위에 고여있던 핏물이 떨어지며 마법진이 허공으로 올라왔다.
전보다 더 많은 제물을 먹이고 있지만 마법진은 헤레이스에게 공격당한 이후 예전 같지 않았다.
마법진은 겨우 제물만 받아먹고 스르르 바닥으로 내려가 달라붙어버렸다.
황자와 헤레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물어도 마법진은 힘을 쓰지 못했다.
이대로 마법진의 기능이 모두 사라지는 건가 했지만 다른 것을 물으면 그럭저럭 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유독 황자들이 있는 곳, 그리고 헤레이스가 있는 곳만큼은 말하지 못했다.
마법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고귀한 혈통의 귀족들을 잡아다 그 피를 뿌려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쓸모없는 것!’
대공은 짜증스러운 눈으로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치워라.”
그의 목소리에 대공의 수하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공은 망토를 펄럭이며 미네른으로 향했다.
미네른에 있던 자들은 대공을 보고 급히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알아낸 것은 없느냐!”
어떤 대답이 나올 거라는 것은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헤레이스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진 지 수일이 지났지만 그들은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소식이 있을까 해서 자주 가봤지만 매번 허탕을 쳤다.
“말씀하신대로 용병과 상단들을 중심으로 해서 찾아보고 있습니다만 황자라고 추정되는 인물들은 없습니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자들이 최근까지 같이 머물렀다는 보고는 여럿 있었습니다만 늘 저희가 찾아내기 전에 모두 그곳을 떠난 후였습니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늘 사라진 황자와 헤레이스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황제를 봐야겠어.’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보고를 듣던 대공이 돌아서며 생각했다.
그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별수 없이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선황제의 황자들을 먼저 제거해야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친 날개를 쉴 수 있는 곳을 모두 없애버리면 결국 그녀도 쓰러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면 그때는.’
대공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그가 황궁으로 가기 위해 미네른을 나섰을 때 여러 명의 정보원이 미네른으로 들어왔다.
영지를 약탈하기 위해 나섰던 병사들과 페이먼 용병대에 대한 소식을 가져온 그들은 정보를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 알지 못한 채 그것들을 한쪽으로 몰아두었다.
* * *
황제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정무 회의 내내 귀족들을 몰아세웠다.
귀족들은 자기들이 올려놓은 황제가 자신들을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서 언제까지 그를 두고 볼 것인지 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제였고,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럴 때 그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이아노브 대공이었다.
그는 여러 이유를 들어 황궁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었지만 일단 그가 와 주기만 한다면 그를 중심으로 의견이 모일 터였다.
“전쟁을 통해 얻은 건 많지도 않소. 전쟁을 치르느라 돈이 들어갔는데 귀족들은 전혀 비용을 부담하려 하지 않으니 황실의 재정으로 하라는 것인가. 황실의 재정이 열악한 것을 모르지 않을 사람들이.”
황제는 귀족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인 듯했고 꼬장꼬장한 귀족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루한 평행선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터였다.
아무 소득도 없이 정무 회의가 끝나고 귀족들은 짜증스러움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궁을 나왔다.
“잘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황제 폐하께 너무 덕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불충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선황제 폐하께서는 이렇게 말이 안 통하지는 않았어요.”
“뭐가 중요한지를 몰라요. 줄다리기를 할 줄도 모르고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탐욕만 강한 분을 황위에 올렸으니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일인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참으라는 겁니까.”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인데 어떻게 그렇게 선황제 폐하와 다를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형의 반만 닮았어도 좋았지 않겠습니까? 그 고집은 닮으면 안 되겠지만요.”
“허어. 그건 너무 나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말이 너무 심하지요.”
“심하기는 뭐가 심합니까.”
귀족들은 쓸데없는 얘기로 목소리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의 눈에 아주 익숙한 마차가 보였을 때 모두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저것은 이아노브 대공의 마차가 아닌가. 마침 잘 오셨군.”
한두 사람이 마차에 새겨진 화려한 황금 음각 문장을 알아보고 마차를 향해 다가갔지만 마차는 그 옆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러나 무안한 일을 당한 귀족들도 대공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제국에서 황제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대공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잘된 일입니다. 이제 뜻을 모을 수가 있겠습니다.”
“대공 전하야말로 적임자가 아닌가 하는데, 우리가 먼저 중지를 모으고 그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황제 폐하보다는 대공 전하께서 그 자리에 훨씬 더 어울린다고 보지 않습니까?”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말하자 몇몇 사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참으로 딱하시오. 지금의 황제 폐하는 우리가 몇 가지만 포기하면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소. 그런데 대공 전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오? 키에로드 백작가를 한순간에 멸문시킨 분이 대공 전하이신 것을 잊었소? 그분이 그 자리에 오르신다면 우리는 단순히 본보기를 위해서 죽고 멸문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거요?”
“…그렇군요. 내가 잠시 그 일을 잊었소.”
귀족들의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 복잡해져 가기만 했다.
“일단은 기다려봅시다. 오랜만에 황궁에 오셨으니 폐하를 뵙고 나오셔야 할 것이오. 그 후에 대공 전하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지 않겠소? 그때 다들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 봅시다.”
그들은 조금만 있으면 대공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가 귀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주고 황제와 대항해 주기를 바랐다.
대공이 황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이 탄 마차는 황제궁의 근처까지 달려갔다.
그렇게 가까이까지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라면 대공마저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마차를 멈추고 내려야 할 지점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차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은 창문 밖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위상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런 권력 따위.
지금까지 질리도록 누려왔던 그것이 새삼스럽게 달갑지는 않았다.
혹시나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서 헤레이스 아르시아가 존경하는 눈빛을 보내기나 한다면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누릴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런 것은 이미 수백 년이나 누려 왔었던 것이다.
대공이 마차에서 내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대공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가 황제의 궁으로 들어가자 황제의 비서가 멀리에서 그를 발견하고 황급히 나와 그의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대공 전하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를 뵙겠다.”
사전에 말도 없이,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와서 알현을 청할 경우에 그날 황제를 바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황제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대공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그의 청을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 대공 전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고하고 오겠습니다.”
대공이 보겠다는 말에 비서는 서둘러 황제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들어갔다.
“폐하. 대공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비서의 말에 황제는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건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마도 귀족들을 압박하지 말라는 말을 할 것 같은데 대공과는 동등하게 얘기를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황제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대공에게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들라 해라.”
그는 착잡한 기분으로 말했다.
비서가 대공을 황제의 집무실로 안내하자 대공은 그에게 공손히 예의를 갖추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불충한 신하를 용서해주십시오.”
황제가 예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황제는 대공이 자신에게 예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쭐해졌다.
“아니오. 대공이 여러 일로 바쁘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소. 제국이 이만큼 태평해진 것이 전부 대공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거늘.”
황제는 그에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대공은 과분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 같은 것은 없이 묵묵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무안함을 숨긴 채 말했다.
“그래. 어쩐 일로 여기까지 걸음을 하셨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오늘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기탄없이 말하도록 하시오. 대공이 하는 말이라면 어려운 얘기라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소.”
그의 좋은 기분은 대공이 입을 열기 전까지 계속됐다.
“폐하. 선황제의 황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대공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선황제의 황자들. 폐하의 조카인 그들이 살아있다는 말씀입니다. 로젠비크 에버쿠젠과 레이아스, 루엔피스 에버쿠젠. 그들이 모두 살아 있습니다. 폐하.”
“아니오. 그것은 대공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오. 나는 분명히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들었소.”
“그것은 벌을 받고 싶지 않았던 놈들이 지어낸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심장도 직접 확인했다고 했소.”
“짐승의 것을 떼 왔을지도 모르고, 심장을 확인했다는 그 말조차 거짓일 수도 있겠지요.”
“그럴 리가 없소. 감히 누가 나에게 그런 불충한 짓을 한다는 말이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폐하. 천한 것들이라도 자기들의 목숨은 소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뭐가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건….”
황제는 의미도 없는 고집을 부렸다.
대공은 싸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계속 부인을 한다고 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폐하. 믿고 싶지 않으시더라도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부정하고 싶으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방법을 강구하셔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뭘 하라는 말이오. 대공에게는 혹시 특별한 계책이라도 있소?”
그도 계속해서 부인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물었다.
“그들을 잡아야겠지요. 죽은 선황제의 황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어떤 화가 미칠지 모릅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녔는지 사람들에게 알리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잡아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한다면 사람들이 황제 폐하를 더 두려워하고 깊이 충성할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소?”
황제가 슬그머니 물었다.
대공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전부 자기가 다 알아서 해 줘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거기까지 발을 들인 이상, 괜히 황제에게 맡겼다가 일을 망치는 것보다는 자기가 끝을 맺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폐하께서는 인가하셨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당연하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지금부터 대공이 하는 말은 모두 나의 말이며 나의 뜻이오. 그것을 증명해 주도록 하겠소.”
“황공합니다. 폐하. 곧 폐하의 모든 근심이 사라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공만 믿겠소. 이럴 때 내 곁에 대공이 있어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르겠소.”
“황자들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도 되겠는지요. 폐하.”
“그렇게 하시오. 아주 목숨을 다 끊어버리지는 말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고통스럽게 죽도록 하시오. 내 황위를 위협하는 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사람들이 모두 알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렇게 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생포하려고 하다가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대공은 황제가 하자는 대로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 대공이 원하는대로 하시오. 웬만하면 나는 그렇게 해 주었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이해하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의 뜻이 어떤지 알게 됐으니 가능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대공. 일이 끝나면 내가 대공에게 크게 치하할 것이오. 가장 좋은 영지를 대공에게 줄 곳이고 여러 작위를 더 내릴 것이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런 것이야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도 얻을 수도 있었다.
대공이 지금 당장 황위를 원한다고 하면 황좌라고 해도 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를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씁씁한 기분을 삼켰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그에게는 여러 가지 욕망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뭐든 가질 수 있었다.
그 오랜 경험과 지식, 막대한 부와 세력.
어떤 것을 원했건 그는 그것을 가질 수 있었을 터였다.
단지 원하지 않았을 뿐.
그러나 이번에는 한번 원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