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8
헤레이스는 언덕의 외진 곳까지 말을 달리고서야 멈췄다.
대체 뭘 하는 걸까 하고 기다리자 어느새 헤레이스가 활을 들었다.
그녀가 활을 사용하는 일은 드물었기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헤레이스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대의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항아리 수십 개를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마차였다.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른 채 헤레이스를 바라보던 그들은 그녀가 순식간에 화살을 날리는 것을 보았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바람도 강하고 거리도 멀었다.
그들은 헤레이스가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아직 감도 못 잡고 있었다.
그들이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화살이 곡예를 하듯이 마차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화살이 항아리 하나를 꿰뚫자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항아리가 깨졌다.
마차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세이든 용병대의 용병대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얼마전 페이먼 용병대를 탈퇴한 이들도 보였다.
로젠비크와 쌍둥이 황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페이먼 용병대의 임무 성공률을 낮추려고 헤레이스가 특별히 이곳으로 온 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헤레이스는 이어서 몇 발의 화살을 더 날렸다.
전부 다 부술 필요는 없다. 그중에 수십 개 정도만 깨뜨려도 세이든 용병대의 명성에 금을 내기에는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씨익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황자들은 자기들이 그동안 너무 착하고 순진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헤레이스는 가자는 말도 않고 먼저 달렸고 황자들은 괜히 거기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남의 죄를 덮어쓰겠다고 걱정한 듯 서둘러 따라갔다.
* * *
세이든 용병대의 대장은 집무실에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한동안 일이 잘 되는 것 같고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의뢰는 폭주하다시피 했고 용병대는 다시 없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페이먼 용병대를 흡수하면 훨씬 더 잘 풀릴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성과도 충분히 자축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다가 불편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몇 주 전부터였다.
상단 호위 업무를 맡았는데 도중에 상단 마차가 습격을 받아 물건을 강탈당했다.
그 인근에는 산적도 없었기에 그가 받은 충격은 컸다.
운반한 물건은 2만 골드어치였고 용병대는 미리 보증금을 걸었다.
물건을 제대로 운송하지 못했을 경우에 내기로 한 보증금이 2천 골드였다.
용병대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과 별개로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했다.
상단주는 길길이 날뛰며 당장 물건을 대지 못해서 생긴 손해까지 배상하라고 난리였다.
자기는 평생 신뢰 하나를 가지고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인데 감히 용병대 따위가 상단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용병대장은 5백 골드를 더 얹어주는 것으로 간신히 상단주를 달랬다.
앞으로 일을 의뢰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 손해가 더 클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주 긴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세이든 용병대에게 일을 맡긴 곳은 수없이 많은 공격을 당했다.
공격을 하는 게 누구인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차마 자기들이 가녀린 몸집의 여자아이 하나에게 당했다고 말을 할 수 없었던 이들이 미리 입을 맞추고 새로 생겨난 산적 같았다는 둥 말을 지어냈다.
세이든 용병대의 신뢰도는 점점 추락했고 그들에게 일을 맡긴 거래처 상당수가 의뢰를 취소했다.
새로 수주를 받는 것도 어려웠다.
이제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보증금을 걸어야만 간신히 일을 얻을 수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용병대장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비용이 조금 더 많이 들더라도 상단 마차를 호위하는 일에 전보다 더 많은 용병대원들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률을 다시 높여야 했다.
상주 용병대원이 5인이 되지 않는 페이먼 용병대는 새로 생긴 규정에 따라 일거리를 수주하지도 못할 것이니 인근에서 독점 체제를 굳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눈앞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듯했다.
그가 독한 술 몇 잔을 빠르게 비워갈 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님. 페이먼 용병대의 대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에이바르가? 들여보내.”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 에이바르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에이바르가 들어왔다.
놈의 몸에서는 늘 미약하게나마 술 냄새가 풍겼는데 웬일인지 아주 오랜만에 맨정신인 것 같았다.
“뭐지? 돈을 마련했나?”
“돈을… 빚을 조금 탕감해준다면 빠른 시간 안에 갚겠다고 약속을 하겠습니다.”
에이바르는 최대한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이 일은 성공시키고 싶었다.
헤레이스에게 당당한 오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단지 굴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패배자를, 아니 인간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헤레이스의 경멸 어린 눈빛을 견디는 일에도 이제 질려버렸다.
그 생각을 하자 의지가 한층 강해졌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뭐지?”
용병대장은 에이바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다.
머리에 헛바람만 가득 차서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온갖 망상을 다 하던 작자였다.
자기는 귀족도 될 수 있고 부자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온갖 허튼 꿈에 부풀어서 용병대를 팔아치울 생각밖에는 없던 인간이 갑자기 왜 이렇게 절박해진 건가. 그는 에이바르를 바라보았다.
“제발 부탁입니다. 3만 골드로 탕감해주신다면 정말 빠른 시간 안에 갚겠습니다.”
에이바르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비굴한 모습을 그가 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용병대장은 잠시 턱을 문질렀다.
어차피 너무 많아서 받을 가능성이 없는 돈보다는 공돈으로 3만 골드를 챙기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용병대원이 모자라서 앞으로 일을 수주받지도 못할 테니 페이먼 용병대는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도 저절로 몰락할 터였다.
용병대를 인수하는 것은 그때 가서 하는 걸로 하고 당장은 현금을 받는 것으로 해볼까 하고 생각이 기울었다.
“3만 골드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은 모양이군.”
그의 말에 에이바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3만 골드를 먼저 받는 걸로 하지. 나머지는 변제 기간을 유예해 주기로 하고 말이야.”
“그렇게는 안 됩니다.”
탕감해주지 않는다면 그 돈도 주지 않을 거라는 듯했다.
실제로 빌려준 돈도 없고, 만들어준 서류들도 전부 다 위조였지만 에이바르가 그렇게 나오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황당하기는 했다.
용병대장은 잠깐 사이에 머리를 다시 굴려야 했다.
빚을 전부 탕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3만 골드는 어떻게든 융통을 해 볼 의지가 있다는 말인 것으로 느껴졌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간을 오래 주지는 않았다.
“사흘 후까지 3만 골드를 전부 갚는다면 남은 빚은 모두 탕감해주지.”
“사흘 후는… 어렵습니다. 보름만 기한을 주십시오.”
에이바르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정말로 빚을 갚을 마음이 있는 건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갚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며 용병대장은 그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일단 3만 골드로 줄여주고, 그 돈을 일시에 받은 후에 다시 에이바르를 도박장이나 술집에 끌어들여서 같이 어울려 놓게 하고 빚을 늘리게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에이바르는 허락을 받아내고 후련한 듯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그러면 기존의 차용증을 폐기하고 새 차용증을 써 주시죠.”
용병대장은 기꺼이 그렇게 해 주었다.
차용증은 완벽했다.
기한 내에 3만 골드를 일시금으로 갚을 경우 기존의 채무를 모두 탕감한다는 내용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3장
3만 골드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에이바르는 자기가 그 협상을 성공시킨 것으로 수십만 골드를 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처음부터 돈을 빌리는 짓을 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겠지만, 뒤늦게라도 마음을 다잡는 에이바르였다.
‘그런데 헤레이스는 나만 보내놓고 진짜 안 온 거야?’
깊은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나이도 어린 여동생의 도움이나 기다리고 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새 차용증을 들고 돌아가는 에이바르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 * *
헤레이스는 한동안 차용증을 바라보았다.
에이바르는 칭찬 한마디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하며 약간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아무 말도 없이 차용증만 노려보았다.
거기에 시선을 둔 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헤레이스. 참아.”
레이아스가 조용히 그렇게 말을 했을 정도였다.
헤레이스는 모자란 용병대원을 어디에서 충원해서 일을 의뢰받아 돈을 마련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집 안에 팔 수 있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돈 되는 다른 물건들은 에이바르가 일찌감치 처분했기 때문에 내다 팔 물건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일단은 가봐야겠네. 용병대원은 차차 채울 거라고 하고.”
헤레이스가 중얼거리자 에이바르는 죄인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나도… 있으니까 셋만 구하면 되겠다. 헤레이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고 확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헤레이스는 일단 참았다.
그래도 늦게라도 속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스럽기는 했다.
헤레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헤레이스가 에이바르를 지하실에 가둬놓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이바르에게 술을 먹여온 사람들은 가끔 그의 술에 다른 약도 탔는데 그 약의 중독 효과가 전부 사라지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술을 찾지만 지하실에 갇혀 있던 에이바르는 그러지 못했다.
그도 몇 번이나 지하실을 탈출해서 다시 술집으로 가고 싶었었다.
약에 중독된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술을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았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러 가려고 했던 것이다.
에이바르는 우연치 않게 중독에서 벗어났고 기왕 그렇게 된 바에 헤레이스를 도와서 용병대를 지키고 새 삶을 시작해보자고 생각했다.
속 썩이던 가족이 갱생했다는 것은 헤레이스에게 엄청난 축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에이바르의 일로까지 신경 써야 했다면 헤레이스는 이미 한참 전에 폭발했을 터였다.
에이바르는 오랜만에 검도 손질하고 말에게 직접 건초를 먹이고 용병대원들이 생활하던 건물을 직접 청소하기도 하면서 사람 구실을 했다.
헤레이스는 그런 그가 딱히 미더운 것은 아니었지만 사고뭉치가 잠잠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았다.
이제 요리와 집안일도 그가 맡아 해서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다.
다음 날 그녀는 에이바르가 만든 기괴한 수프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어디에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일로 가려는 건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세 황자와 에이바르까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거래를 한 적이 있었던 곳에 가서 일을 의뢰받아보려고 했다.
이날을 위해서 세이든 용병대의 명성에 흠집을 내 오고 있었기에 조금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간 주류 제조업자 프랫에게서 헤레이스는 야멸차게 냉대를 당했다.
“용병대원도 없으면서 뭘 하겠다는 거야? 페이먼 용병대가 망할 거라는 소문이 제국 전역에 퍼져있는데 본인만 모르나 보지?”
프랫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지만 헤레이스는 굴하지 않았다.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별로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의 항아리를 깬 적이 있는 덕에 그 일을 생각하면 괜찮아졌다.
“그 소문이 난 지 꽤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 용병대는 아직 안 망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소문이 헛소문인 거라는 걸 바보가 아니면 알 텐데요.”
“뭐?”
그는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헤레이스를 노려보았다.
“믿고 맡겨보세요. 저희가 실망시킨 적 있던가요? 저희 성공률 모르세요?”
헤레이스가 다시 한번 말하자 프랫이 코웃음을 쳤다.
“일거리를 맡은 적이 없으니까 성공률이 그대로인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일거리를 달라고요.”
헤레이스도 고집이 생겼다.
“상주 용병대원을 다섯 명 이상 두고 있지 않으면 일을 의뢰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용병대 설립을 너무 쉽게 하니까 폐해가 생겨서 그런 거라던데.”
헤레이스는 옛정에 호소해볼 생각이었다.
몇 번만 일을 맡으면 돈을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헤레이스가 다시 프랫을 설득하려 했을 때였다.
“우리 다섯 명인데. 뭐가 문제지? 숫자 못 세나?”
헤레이스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나는 것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