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존재
길모퉁이에 이르자 등롱 몇 개가 보였다. 선두에 있는 사람은 도씨였고 그 옆에는 임근음이 있었다. 두 사람은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는데 임근용을 보자마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도씨는 임근용을 살짝 감싸 안고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한참을 임 삼노야와 이야기했지만 임 삼노야에게서 돌아온 건 그저 이 몇 마디뿐이었다.
“당신은 이제야 나한테 부탁할 생각이 들었나 보오? 이제야 내가 당신 남편인 게 생각났나 보지? 이 혼사가 어디가 나쁘단 말이오? 육씨 가문에서 납채를 못 줄까 봐 그러오? 육함이가 공부를 못하오? 아니면 어디가 모자라오? 이런 혼사를 할 수 있는 건 복이지! 체면을 세워주는데도 뭘 모르는구먼.”
이 말은 맞는 말이었다. 임옥진의 성격이 별로고 육함의 신분이 복잡한 것을 제외하면 이 혼사가 그다지 나쁠 것은 없었다. 더구나 육씨 가문은 부유했고 육함은 어린 나이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당당하고 대범해 아주 괜찮은 혼사처럼 보였다. 그래서 임씨 가문 사람들은 도씨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고 여기며 임근용을 너무 예뻐한 나머지 버릇없이 키웠다고 생각했다. 또 누군가는 도씨와 임근용이 괜한 트집을 잡아 콧대를 세우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고립무원이었다.
임근음은 임근용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느낌에 놀라 황급히 물었다.
“왜 이래?”
임근용은 가볍게 그녀의 손을 치우고 도씨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가요.”
도씨와 임근음이 눈을 마주쳤다. 그녀들은 서로의 눈빛에서 초조함과 불안함을 읽고 절로 복전 쪽을 돌아보았다. 복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태야께서 노비에게 넷째 아가씨를 방으로 데려다 주고 쉬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명령이 없으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만약에 넷째 아가씨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아가씨를 모시는 시녀들을 사는 게 죽느니만 못 하게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도씨는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임근음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말없이 어머니와 동생을 감싸 안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얘기해요.”
모두들 조용히 걷기만 해서 텅 빈 정원에서는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근용의 집에 도착했고 복전은 공 마마를 시켜 시녀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임근용 앞에서 사람들에게 임 노태야의 명령을 전달했다. 복전은 사람들이 안절부절해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며 도씨 모녀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도씨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 아가씨께서 받아들이실 수 있도록 삼부인께서 좀 더 살펴주십시오.”
도씨의 얼굴이 확 하고 하얗게 질렸다.
외부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도씨가 눈물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임근용을 달랬다.
“우리 착한 딸, 너무 조급해하지 마. 어미가 바로 네 외삼촌한테 서신을 보내서 방법을 찾아달라고 해 볼게. 절대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어리석은 짓 하면 안 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어미가 어찌 살겠니?”
임근용은 도씨의 울어서 붉게 부은 눈과 눈가의 잔주름을 보다가 또 다시 임근음의 찡그린 미간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그녀가 죽거나 그녀에게 뜻밖의 사고가 생긴다면 가장 힘들어하고 슬퍼할 사람은 바로 자신을 가장 아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아마 식사 후 차를 마시며 나누는 화젯거리로 잠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 뒤 마치 낙엽이 바람에 쓸려 가 버리는 것처럼 그녀의 존재를 철저히 잊을 것이다. 그녀가 왜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임근용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머니, 언니, 돌아가세요. 나 안 죽어요.”
도씨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보면 전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임근음이 비파에게 지시했다.
“가서 내 물건들 좀 가져와. 오늘 여기서 넷째 아가씨랑 함께 있을 거야.”
임근용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그럴 필요 없어.”
임근음이 입꼬리를 힘껏 끌어 올렸다.
“언니가 조금 있으면 시집을 가잖아. 너랑 같이 자면서 이야기도 좀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설마 너 싫어?”
그녀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자 임근용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임근용은 도씨와 임근음이 자신을 돌보도록 내버려 둔 채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든 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임근용이 차분해질수록 도씨와 임근음은 더욱더 불안해했다.
여지가 옷을 가져와 임근용의 옷을 갈아 입혔다. 그녀는 임근용의 어깨가 약간 빨개진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가씨, 아프세요?”
임근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위 기름을 좀 바르면 될 거야, 괜히 어머니와 언니까지 놀라게 할 필요 없어.”
왜 아프지 않겠는가? 옷이 닿기만 해도 쓰라렸다.
* * *
한밤중이 되자 임근용이 도씨를 내쫓았다.
“어머니, 외삼촌께 서신을 보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빨리 가 보세요. 정말 마음이 안 놓이시면 언니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요.”
도씨는 그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집으로 돌아갔다. 임근용은 조용히 시녀들에게 물을 가져오라 한 뒤 비녀와 장신구들을 풀고 세수를 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임근음이 화장을 지우는 것을 지켜본 뒤 함께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세심한 임근음은 그녀가 바깥쪽에서 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굳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임근용은 마음이 따뜻해져 고분고분하게 임근음의 말을 들었다.
“언니가 마음을 못 놓는 것 같으니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할게.”
임근용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뻣뻣해진 몸을 뒤집고 싶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임근음의 평온한 숨소리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고 참았다. 임근용은 온몸이 쑤시고 아파 꼭 나무토막이 된 것 같았고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임근용이 한참 동안 평온한 숨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임근음이 살며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그윽한 달빛에 의지해 임근용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는 임근용이 정말로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며 다시 조용히 잠을 청했다.
* * *
임근용은 밤새도록 꿈을 꾸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밝아 있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임근음은 책 한 권을 들고 창가의 침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임근용을 확인했다. 마침내 두 자매의 눈이 마주쳤다. 임근음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탐색하듯 물었다.
“배고프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수정 만두 만들어 놨어.”
단식을 해야 하나? 임근용은 어제 오후부터 계속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지금 밥을 먹는지 아닌지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임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임근용은 무릎을 끌어안고 잠시 침상에 기대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렇게 갇혀 있으면 딱 하나 좋은 점이 있어. 자고 싶을 때까지 늦잠을 자도 된다는 거야. 누구한테 문안을 드릴 필요도 없고 웃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그러더니 다시 침상에 누우며 말했다.
“난 아직 다 못 잤어. 좀 더 잘래.”
임근음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앉았다.
“철없는 짓 하지 마. 싸우려면 밥을 먹어야지. 몸 상하면 너 자신만 괴로워지고 괜히 어머니랑 내 마음만 아파져.”
임근용이 말했다.
“그럼 몰래 먹으면 안 돼?”
임근음이 잠시 침묵했다 말했다.
“알았어.”
* * *
얼마 지나지 않아 임씨 가문의 넷째 아가씨가 이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단식투쟁을 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라씨는 임 이노야를 향해 냉소하며 말했다.
“저것 좀 보세요, 대체 뭐 하는 짓이래요? 자기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저러는지 아주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것처럼 구네요? 육씨 가문에서 이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죽을지언정 그 집으로 시집가는 건 싫다는 거잖아요!”
임 이노야도 속으로 화가 치밀어 그녀에게 화풀이를 안 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당신이 남들한테 괜히 약점 잡을 거리를 만들어 준 덕분 아니오. 육 노태야가 뭐라 말씀 하셨는 줄 아시오? 넷째가 조용하고 침착해서 시비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아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더군!”
라씨는 참지 못하고 쓰라린 눈물을 흘렸다.
“그건 내가 계략에 걸려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나도 셋째 동서가 오씨 가문에 혼담을 꺼내는 걸 왜 그렇게 죽어라 거절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걸 어쩌란 말이에요? 셋째 동서는 처음부터 절대로 성사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내가 가서 혼담을 꺼내도록 부추겨 망신을 당하게 만들고 아가씨와 내 사이를 이간질 한 거라고요.”
임 이노야가 그녀를 호되게 질책했다.
“당신이 그런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았으면 누가 당신을 음해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게 욕심이 많으니 탈이 나지!”
라씨가 그의 품에 머리를 부딪치며 울었다.
“딸이 억울한 일을 당해 아직도 방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데 당신은 나서서 따져줄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 내 탓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탓을 하려면 당신 여동생 마음이 간장 종지마냥 작은 걸 탓해야죠. 나라고 뭐 아가씨한테 미움을 사고 싶었겠어요?”
임 이노야는 짜증을 참을 수 없어 그녀를 밀쳤다. 그는 발을 구르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당신 정말로 나더러 가서 따져달라는 거요? 그럼 그 식량은 육 이노야한테 보내지 마시오! 그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을 도와준 게 무엇 때문인지 정말 모르겠소?”
라씨는 손수건을 움켜쥐고 눈물을 훔치며 잠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최 마마를 부른 뒤 이런 저런 지시를 했다. 최 마마가 막 중문 앞에 도착했을 때 주씨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 그녀를 막더니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 마마, 어디 가느냐? 어머님께서 널 부르신다.”
* * *
비록 최 마마가 말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육씨 가문에는 이 소식이 전해졌다. 임옥진은 얼굴색이 확 변해 육 노태야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그 아이가 이렇게 철이 없습니다. 억지로 딴 참외는 달지 않은 법이라 했으니 그만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부를 보고 있던 육 노태야가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임옥진을 응시했다. 그가 계속 쳐다보자 임옥진은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했고, 그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직 어린 아가씨 아니냐, 철없는 쌍둥이 동생이 그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당연히 체면을 좀 세우고 싶겠지. 이건 결국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탓이다. 넌 아직 아운이 보다도 더 철이 없구나. 이 얘기는 그만하자. 참, 날짜를 보니 내일모레가 길일이더구나. 그날 사람을 시켜 구혼계(*求婚启: 남자 집에서 서면을 통해 여자 집에 혼인을 청하는 것)를 보낼 것이다. 그때 가서 허둥대지 말고 너도 준비할 것은 준비해 두거라.”
그는 이번에 임옥진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근주는 절대 안 된다는 것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임옥진은 순간 몸에 있는 피가 얼굴에 다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넋을 놓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임옥진은 육운을 보자마자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이 못된 것!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
누구든 그녀를 속일 수 있었지만 육운만은 그러면 안 됐다.
육운은 당황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왜 또 그러세요? 제가 어머니를 속인 건 맞지만 그건 어머니를 위해서였어요. 그날 제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할아버지께서 보낸 사람이 중문 앞에서 가로막더니 바로 집현각으로 데리고 갔어요.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께서 무릎을 꿇으라고 하시더니 가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만약에 제가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찌 지금 여기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수 있겠어요? 또 어머니께서 지금 여기서 딸을 혼내실 수 있겠어요?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건 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그분들의 마음을 잃으면 우리한테는 둘째 오라버니밖에 안 남는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둘째 오라버니의 혼사는 어머니나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육 노태야 부부에게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완전히 밀어낼 것인가? 그들을 밀어내면 모든 희망을 육함에게 걸어야 하지 않은가? 임옥진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