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133)
134화 심검 (4)
콰콰쾅!
무림맹이 무너지고 있었다.
담이 무너지고 가옥이 무너져내렸다.
한참을 뒤흔들린 땅은 주변 일대를 모조리 폐허로 만들고 나서야 멈췄다.
“딱 보기 좋네.”
역사의 눈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이 무너지며 같이 떨어져 내린 현판을 수호가 집어들었다.
맹주전이라 쓰인 그 널판을 들고 칼로 글을 새긴 뒤 장순필에게 주었다.
“대충 못질해서 여기 박아놔.”
“예에.”
글자가 바뀐 현판을 공손히 받아든 장순필은, 거기에 장대를 달아 남궁장천의 시체 옆에 세웠다.
흐릿해진 맹주전 위에 한글로 쓰인 그 글에, 장순필이 눈물 짓지 않으려 애써 참았다.
벌게진 눈알은 다시금 새 주인을 보며 충성을 다짐했다.
‘저분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일이 일어나 버렸다.
무려 무림맹이다.
구천 행성 두 축의 하나다.
생각지도 못한 복수를 이렇게 할 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무너져 먼지뿐인 무림맹 본단을 보며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만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정도로,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주리라.
“증명을 하시겠습니까?”
“으음.”
수호는 돌이 아닌 옥으로 만들어진 증명의 비석을 보았다. 사실 옥으로 만들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것이 야명주처럼 보이기도 했고, 옥처럼 푸르게 비춰지기도 했다.
“이건 왜 다르게 생겼어?”
“역사의 눈이라 합니다. 마몬족 진영에 하나, 여기에 하나. 세계에 둘뿐인 증명의 비석이지요. 저 또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수호는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을 보면서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거 뭐 엄청 아프고 그러진 않겠지?”
“이전 증명의 비석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흠,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두 종족이 지배하는 구천 행성.
그중에 딱 두 개뿐이라는 역사의 눈인지라, 조사해보지 않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호가 손을 가져다댔다.
…….
수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든 칭호?”
수호가 궁금해하든 말든 아직 정산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1092였던 내력이 1875로 올랐고, 295였던 기공이 610이 되었다.
보너스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수호는 새로 얻게 된 스킬을 끝으로 역사의 눈에서 손을 뗐다.
“이거 만지면 심검 주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심검은 현경의 고수만이 쓸 수 있는 절대경지요. 그리고 대륙엔 현경의 고수는 오직 한 명뿐이오.”
“흠.”
절대자라는 칭호가 아무래도 행성의 넘버원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본래 절대자였던 남궁장천을 죽이며 얻게 된 모양.
베고자 하면 벨 것이다.
마음만으로 상대를 벤다.
수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현경의 고수만 심검을 쓴댔지?”
“그렇습니다.”
행성 최강이 되었지만 아직 자격은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수호의 레벨은 여전히 58레벨.
굳이 구천 행성의 수준으로 치면 이류였으니까.
“별로 다른 건 없는 것 같은데…….”
역사의 눈이라 불리는 증명의 비석을 더 살펴봤으나 다른 비석과 기능적 차이가 크지 않았다.
“대강 할 일 다 했네.”
애초에 구천 행성에 온 목적은 거의 이뤘다.
남은 게 있다면 조카의 무공 유학을 조기에 마무리 짓기 위해 무공 선생을 모셔 가는 일.
수호는 당진철을 보았다.
“살생부 줘봐.”
“아니오.”
“응? 복수 안 해?”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싶었는데 당진철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모두를 제거할 필요는 없소. 한 놈. 단 한 놈만 없애주시면 되오.”
“누구?”
“모용적산.”
전대 무림맹주.
당가 멸문의 총 책임자.
어차피 이 살생부가 당진철의 삶을 지탱하는 목표다. 천천히 자신의 실력을 길러 도전해도 되지만, 남궁적산만은 한시라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게 불쾌한 존재.
“그 위선자만은 당장에 죽이고 싶소.”
“좋아. 그놈만 죽이고 같이 지구로 가자.”
“알겠소.”
고향을 떠나게 되어도 상관없다.
당문이 멸문하며 더 이상 그에게 고향은 없었으니까.
“그럼 그놈부터 잡고 쫑파티 하자.”
소환된 비룡이 다시 마차를 들고 격전지로 향했다.
*수호는 격전지로 돌아왔다.
시체들과 피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 도착한 수호는 야수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야수들 중 절반은 부상이고 절반은 죽어 돌아오지 못했다.
“가서 치료하고 있어.”
숲의 기운을 빌려 야수들의 상처를 돌봐줄 수도 있지만, 그 정도 기운을 뺏어가면 일대의 모든 식물들이 말라 죽는다.
야수 사육장에만 가 있어도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니 일단 야수들을 모두 역소환시킨 후, 수호는 주변 식물들의 기억을 읽어들였다.
야수들 절반이 죽을 정도의 치열한 격전이었고, 무림맹 무사들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이놈들 확실히 처리하고 갈걸 그랬네.’
수호의 식물 고속성장 스킬에 묶여 있던 세 명의 고수들이 풀려나며 우왕좌왕하던 무사들이 뭉쳤고 조직적으로 퇴각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을 야수들이 쫓으며 꽤 사냥해냈지만, 대부분 뒤쳐지는 하급무사들이었고 일류 이상의 고수들은 대부분 탈출해버렸다.
‘일곱.’
한둘 흩어진 걸 빼면 일곱 경로로 무리가 이탈했다.
“모용적산이 어떻게 생겼다고 했지?”
“나무에 묶여 있던 백발의 늙은이요. 큰 도를 쓰는 자요.”
“아, 걔구나.”
수호는 모용적산이 도망친 경로를 보았다. 무림맹과는 반대되는 방향.
“저쪽으로 갔네.”
수호가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당진철이 뒤따랐다.
“너도 오게? 마차에 타지 왜.”
“아니오. 함께 가겠소. 대협께는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나 나의 복수요. 돕겠소.”
“같이 가면 느린데.”
“놈의 최후는 내게 맡겨주시면 더는 여한이 없겠소.”
“음, 뭐 좋아.”
지금 와서 그리 급할 게 뭐가 있나.
한 놈만 처치하면 되는 일인데.
“가자.”
파팟!
땅을 박차고 튀어나가는 수호의 신형이 정말 쏘아진 화살처럼 빨랐다.
“허읍.”
당진철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재빨리 신법을 펼쳤다.
‘무슨 신법이…….’
외공만 익혔을 때도 엄청난 근력으로 신법에 맞먹는 빠르기를 자랑하던 수호다.
내가기공의 핵심은 내력의 운용으로 본인의 신체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움직임마다 내력의 운용법이 다른 것이다.
최대한 적은 양을 내력을 써 최대의 효과를 보는 것이 상승의 신법.
파파팟!
당진철이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주변 풍경이 쭉쭉 멀어졌다. 그렇게 달리는데도 도무지 수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짐이 될 수는 없다.’
파파팟!
공력을 더 과하게 일으켜 속도를 높였다. 그제야 수호와 어깨를 나란히 두고 달릴 수 있었으나 내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일각도 못 버틴다.’
신법은 속도도 중요하지만 내력의 소모를 낮추는 것 또한 중요하다. 상승의 심법으로도 이 속도를 내려면 극심한 내력 소모 때문에 유지시간이 극도로 짧아진다.
그에 반해 수호는 워낙에 강화 전의 기본 신체능력이 우수하니, 조금의 내력만 더해도 엄청난 속도를 발휘한다.
‘으읍.’
당진철은 울컥하는 속을 다잡았으나 비릿한 피 맛이 나는 것이 무리를 한 듯했다.
“잠깐 여기 서봐.”
수호는 단번에 착지하듯 몸을 멈췄으나 당진철은 관성에 못 이겨 한참을 더 뛰어가다 돌아왔다.
그사이 수호는 나무 한 그루에 손을 대고 기억을 읽었다.
이 나무가, 그 주변의 풀들이 기억하는 아까의 상황이.
서른 명 정도의 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후퇴하는 모습이 보인다. 추격을 염두한 듯 흔적을 지우며 빠르게 도망치고 있지만, 사막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수호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쪽이네. 응?”
다시 출발하려던 수호는 하얗게 변한 당진철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세상 걱정 다 하고 사는 놈이 자기 몸 걱정은 왜 안 하냐?”
수호는 이미 기억을 읽은 나무와 주변 숲에서 정령을 불러들였다.
파파팟.
초록빛 정령들이 당진철에게 스며들며 숲의 가호를 내렸다.
“어어?”
내상은 물론 떨어진 체력까지 단번에 회복되자 당진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찌된 영문이오?”
“뭐가? 치료해 준 거지.”
“어찌, 어찌…….”
당진철이 혼란스런 얼굴로 수호를 보았다.
이것은 역사의 축복과 다를 게 무엇인가?
‘지구는 대체 어떤 곳이기에.’
구천행성의 중원인과 마몬족의 삶의 목적이랄 수도 있는 역사의 축복을 개인이 쓸 수 있단 말인가?
“됐고, 타라.”
휘리릭.
수호가 전에 길들인 말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말과 합체한 것이 아니고 흉내 내기로 외형만 변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당진철을 태우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허허, 이제 대협의 신묘함에 더 놀랄 일도 없겠소.”
당진철은 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위화감 없는 모습에 포기한 듯 웃으며 탑승했다.
안장도 없고 고삐도 없어 갈퀴를 잡았다.
“야야, 머리 빠진다. 살살 잡아.”
“아, 알겠소.”
수호는 숲의 기억을 읽은 곳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파파파파팟!
네 발로 달리는 건 이미 수많은 ‘흉내 내기’ 스킬로 익숙해진 상태.
“와, 내공이 여기서도 되네.”
네 발로 달리는 말은 내공으로 강화된 빠르기로 사람이 달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질주했다.
금방 목적지까지 도착한 말이 앞발을 하나 들어 나무에 접촉했다.
“저쪽이네.”
“허허. 천리마가 안 부럽소.”
어떤 전설의 명마라고 해도 이보다 더 빠를까?
“야야, 살살 잡아.”
“아, 알겠소.”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을 한 번 털고는 살포시 갈퀴를 잡았다.
*파파팟!
서른 명이 넘는 고수들이 움직이는데 아주 미약한 소음만 나고 있었다.
아득한 경지에 닿은 그들의 신법은 밟은 풀이 짓뭉개지지 않을 정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내달리던 고수들은, 전방에서 무리를 이끌던 도제의 손짓에 일제히 멈췄다.
“잠시 쉬어들 가세나.”
“네.”
조금만 더 가면 모용세가다.
서둘러 세가에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쫓겨난 쥐 꼴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용적산은 세가에서 가장 어른이자 우상이니까.
꿀, 꿀.
“흡!”
어디선가 들려오는 돼지 소리에 서른이 넘는 절정고수와 화경의 고수가 화들짝 놀랐다.
“그냥 돼지입니다.”
“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이제 짐승 울음소리만 들어도 혈마가 떠오를 지경이다.
다그락, 다그락.
미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고수 하나가 나무에 올랐다가 급히 내려왔다.
“인마 하나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벌써 꼬리가 잡혔는가.”
“혈마는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모두 대비하라.”
“예, 어르신.”
살기 위해 도제의 뒤를 쫓은 무림맹 후배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준비했다.
파파파팟!
질주하던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모용적산!”
적의가 가득 담긴 당진철의 말에 일행들이 긴장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분기 가득한 목소리에서 아군은 아님을 안 것이다.
“원수는 나의 칼을 받으라!”
말에 탄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했으나 모용적산은 어이없이 되물었다.
“혼자야?”
단기필마로 혼자 내달려 와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지금 주변에 있는 무림맹 후배들도 모조리 절정고수들인데 말이다.
“아니, 둘이 왔어.”
“허윽.”
“헉.”
말의 입에 나온 유창한 말에 고수들이 흠칫 놀랐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랬더냐?”
당진철이 울분에 찬 음성을 뱉었다.
“그래, 얘한테 왜 그랬냐.”
말발 좋은 말이 말을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