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49)
450화 루나 (6)
파팟.
수호가 사라졌다.
김미소는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그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장재식은 여전히 누워 있고, 별 방법도 없다.
“세계수 야누르는 방법이 없다고 하고, 정령왕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엘프들은 죽음의 저주라면서 얼른 죽이라고 하고.”
김미소는 그녀 나름의 역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수호 길드 부사장은 그녀가 없으면 길드가 돌아갈까 싶을 정도로 일이 많은 직책이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길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호 길드는 이미 세계를 지키는 포지션.
8성 던전에 대응 가능한 팀이야 여럿이지만, 애초에 던전이라는 것이 한두번 공략에 성공한다 하여 소멸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브레이크 타임까지 완전한 공략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터지게 되어 있고, 8성 던전은 신수를 내보낸다.
신급 군주. 혹은 신수.
이들은 마력과 다른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신성력은 물리, 마법적 방어력이 어마어마하기에 핵폭발도 견디는 무식함을 자랑한다.
지금 지구에서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전력은 수호 길드가 유일무이하다.
G급 각성자를 보유한 그들은 이미 지구에서 반신반인으로 불리며 히어로 대접을 받고 있다.
수호 길드. 아니, 신을 따르는 반신들.
그들의 수좌격인 대사제 김미소의 위치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신이 부재중이라도 그녀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다.
그런 중요한 역할의 그녀가 수호를 따라나선 것은 이 일도 그것만큼이나 중요해서다.
인간, 혹은 대사제로서 수호를 따라다니며 그의 의지를 가늠하고, 새로운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하며, 신의 생각과는 다른 시선에서 내는 조언을 해 주는 것.
이미 그녀 스스로 인간으로 불려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수호를 제하고 세계의 비밀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확보하고, 세계의 근원에 가장 접근한 게 본인이다.
“애매하네.”
이번 아루카 행성의 여정에서 많이 이룬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수호가 원하는 건 하나다.
인류 존속을 위한 방법.
지구라는 터전을 외계 종족에게 뺏기지 않는 방법.
처음 수호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지구를 지켰으나, 결국 대부분의 땅이 침식당해 회귀해버렸다.
그 이후 침식을 막기 위해 신계로 가 적극적으로 무덤을 파헤치며 죽은 신들을 선제적으로 처리했다.
그사이 지구의 방호는 회귀한 백사가 주도해 김미소 등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수호 길드가 담당했다.
사제 임명과 기사 임명으로 수호의 힘이 간접적으로 닿았고, 결국 지구에 또 침식이 일어났다.
‘사실 침식만 막으면 되는데.’
침식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수호가 지구에 있으면서 던전도 막고, 신수도 막고 하면 된다.
계속되는 던전 생성을 멈추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꽤 많은 영역을 필드라는 이름의 무법지로 뺏기고 도시에 모여 생활 중인 인류다.
여기서 더 번성하지 못하더라도, 멸망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자리 잡을 수는 있었다.
‘전제조건은 하나. 사장님의 개입.’
박수호가 건재한 한, 그의 비호아래 놓인 인류는 멸망의 위협에서 비껴가 존속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침식을 차단하거나, 침식된 땅을 되돌릴 방법을 알아내야 할 터인데.
한 가지 열쇠라 할 수 있는, 침식된 인간 장재식의 상태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
“흐음.”
장재식과 비슷하게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당진철은 구천 행성으로 옮기면 깨어난다고 하였다.
‘관리자로 임명했다고?’
구천 행성 관리자가 되었는데 뜬금없이 아루카 행성이기에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거다.
“차원이 달라.”
봄이 와야 새싹이 돋는 등의 시기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공간의 문제다.
북극에 씨앗을 던져 놓고 발아하길 바라는 건 무리니까.
당진철은 구천 행성에 가야 깨어난다.
김미소의 시선이 장재식에게 머물렀다.
‘죽음의 저주.’
엘프들이 한 말은 기억에서 지웠다.
그건 정령왕 야누스에게 영향을 받은 말일 테니까.
사장님의 관심사는 인류 보호, 침식의 박멸.
야누스의 목표는 초기화 후에 인류 재건, 차원 충돌의 억제.
야누스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길 원한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인류를 다시 재건하려 한다. 하지만 그 인류가 지금의 이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아마 최초의 인류일 터.
‘어딘가에 있을 백업 데이터.’
루나를 뺏어 그 행성에 다시 지구를 열었다.
원시시대부터 시작했을까?
아닐 터다.
‘머지않은 과거야.’
김미소가 추리하기에 그렇다.
아마 사장님이 원래 살았던 그때 당시겠지.
‘사장님은 처음 가는 장소마다 기절하신다.’
동기화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마, 그것은 사장님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달라서일 것이다.
최초의 지구가 있었고, 인류는 번성했을 것이다.
지금의 지구는 본디 수인족들의 행성인 루나를 뺏어온 것이다.
여기에 지구의 어느 한 지점을 덧씌웠다.
회귀도 가능한 세상에, 과거의 지구 어느 한 지점을 재현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 데이터가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면 말이다.
‘야누스는 알겠지.’
창조주의 의지대로 야누스가 행했다고 하였다.
야누스가 바라는 세상이 그거다.
최초에 세팅해 둔 인류 문명 그대로.
던전이 터지고 대격변이 일어나기 이전의 지구. 사장님도 신계에 눈뜬 신이 아닌, 지구를 살아가던 대학생이던 그 시절의 데이터.
지금의 지구는 루나 위에 덧씌워진 인류 문명의 지구.
확실히 여기에 사장님은 없었다.
‘신계에 계시는 동안 이 지구가 다시 열렸다.’
그래서 지구에 처음 귀환하셨을 때 기절했을 터다.
동기화를 위해.
이어서 구천 행성을 갈 때도, 아루카 행성을 방문할 때도, 미드얼 행성에 갈 때도…….
“하아.”
김미소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었다.
얻은 정보를 취합하는 와중에 본질을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마치 나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라는…….
야누스가 원하는 건 초기화.
그리고, 새로운 시작.
지금의 지구를 세이브하지 않고, 과거의 데이터를 로드하길 원한다.
뺏어온 루나에 지구가 다시 열리고, 다른 외계 문명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지구.
‘사장님은…….’
나아가길 원하신다.
이대로.
장애물을 피해 돌아가는 것이 아닌, 장애물을 넘어, 아니 깨부숴서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신다.
지금의 지구를 세이브하길 원하신다.
지나온 과정을 양분삼아 이어가려 하신다.
야누스가 성공하든, 박수호가 성공하든 인류는 존속할 것이다.
‘전자는 모두가 기억을 잃을 것이고, 후자는 기억하겠지.’
김미소가 원하는 것도 후자다.
대격변 이전의 그녀의 삶은 평화로웠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모르는 것처럼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이 삶이야.’
기억을 삭제하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대격변 이후의 기억이 없는데 새로 시작한다고 그것이 나일까?
신이 불멸한다지만, 그들도 죽으면 기억을 잃는다.
그래서 야누스와 사장님이 다르다.
야누스는 기억이 어떻든 인류의 존재 자체를 이루려 하고, 사장님은 인류의 발전을 이루려 한다.
김미소 또한 대격변 이전의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것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지 과거가 아니다.
평화로웠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협적인 적과 현실을 이겨내고 미래의 평화를 쟁취할 것이다.
야누스가 쥐고 있을 대격변 이전의 백업데이터가 궁금했다.
‘어딘가엔 있을 텐데.’
김미소가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사장님.”
“응? 건우야.”
“저기…….”
언제 왔는지, 지구에서부터 함께 온 수호 길드의 일원들이 근처에 와 있었다.
“아.”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김미소가 주변을 보니 여기저기서 엘프들이 포위망을 형성한 채 슬슬 조여오고 있었다.
수호에게 정령은 모조리 뺏겼지만 그들의 손엔 여전히 위협적인 창과 활이 들려 있었다.
김미소가 앞으로 나서자 일행이 절로 뭉쳤다. 당진철과 장재식을 챙기곤 모두가 김미소만 보았다.
확실히 수호가 부재중일 때 사람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뭉친다.
“뭐죠?”
김미소의 날카로운 음성에 엘프들의 수장인 신녀가 나서서 물었다.
“더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둘수 없습니다.”
신녀의 축객령에 김미소가 미소 지었다.
“사장님이 사라지니 해볼 만하다 생각이 들던가요?”
여태 찍소리 못하고 있다가 나서는 꼴을 보니 우습다.
김미소가 조화력을 끌어올리자 여기저기 공터에서 나무넝쿨들이 자라나 그들을 옭아매려 했다.
“아앗!”
잽싸게 피하려 했으나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부지기수가 넘어져 그대로 나무넝쿨에 얽혔다.
운 좋게 칼로 쳐내는 이들이 있었으나, 곧 예측할 수 없는 돌풍이 불어 이리저리 균형을 잡지 못해 나무넝쿨에 붙잡혔다.
콰드드드득.
성난 기세로 자라난 나무넝쿨에 여기저기 붙들린 엘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으윽, 너무 단단해.”
신전 기사들도 속수무책으로 붙잡히자 엘프 신녀 리오라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온 김미소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손님 대접이 별로라 더 있고 싶지도 않네요.”
애초에 점령군 행세 따위 할 생각도 없었다. 김미소가 신녀를 지나쳐 걷자 일행이 뒤따랐다.
공터를 지나, 다시 숲의 초입에 이르자 멀뚱히 서 있는 가즈라가 보였다.
복잡해 보이는 그를 보며 김미소가 물었다.
“가죠.”
“어딜 말이오?”
“집에 가야죠.”
“집…….”
아루카 행성에서 태어나 대마법사로 성장한 가즈라다. 지구에서 산 지는 고작 10년 정도다.
김미소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자신에게 집에 가자니.
가즈라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가 다시 그곳에 가도 되겠소?”
“안 될 게 뭐예요?”
김미소가 어깨를 으쓱하곤 지나쳤다.
엘프 알리어드가 가즈라를 지나치며 말했다.
“사명이 뭔들 털어내시구려.”
로매드가 그 옆에서 말을 받았다.
“나도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소. 중한 건 내가 가이아 일족이란 거지.”
기록되지 않은 엘프의 역사 따위, 이제 알았다고 하여 달라지는 게 무엇이겠나.
알리어드와 로매드는 최초 공주를 모셨던 때를 떠올리며, 숙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곳 고향에 그들이 남는다 한들, 저기 엮인 이들이 자신들을 여전히 형제로 받아들이겠는가?
이제 그들은 같은 종인 엘프가 아니라 인간신을 모시는 이방인으로 배척당할 것이다.
드워프 융이 가즈라를 툭 치고 지나쳤다.
“당신들 귀쟁이들은 항상 그랬소. 우리는 고민이 있거든 쇠를 두드리지.”
“…….”
늘 고민하던 가즈라가 고민을 멈추기 쉬울까?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숲지기로 사는것과 일족의 미래를 위하여 지구로 향하는 것 사이에 늘 고민해 오던 그다.
선택이 두려워 고민을 이어가던 그가, 이제 와 선택을 내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답 없는 고민이야 집에 가서 계속하시구려.”
융의 말에 가즈라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어, 허허.”
어쩐지 조금 부담감이 가신 얼굴의 가즈라가 나무넝쿨에 얽힌 엘프들을 하나씩 빼내고 있는 신녀를 잠시 눈에 담다가 뒤돌았다.
지구로 가자.
*
파팟.
수호는 잠깐 사이에 바뀐 시야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훑었다.
“어?”
손엔 여전히 묘족 야누르가 사용했을 귀환지팡이가 들려있다.
“이거 좀…….”
분명 루나 행성으로 돌아왔을 터다.
그리고, 루나 행성이라 함은 지금의 지구를 뜻하리라.
“으음.”
온통 검은색 일색의 기묘한 숲에 홀로 서 있게 된 수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익숙하고 낯선 기분의 이곳은…….
“지구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