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71)
472화 대척점 (1)
수호는 저릿한 탈력감에 비틀거렸다.
몸 안에 내재된 조화력을 밑바닥까지 모두 써냈다.
지구로 귀환하고 깨달은 두 가지 힘.
야성과 조화.
나무정령.
생명에너지인 그 조화력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나서 이토록 비워낸 적은 처음이었다.
지구가 모두 침식되어 검게 물들었을 때도, 그것을 되돌리려 조화력을 사용할 때에도 이토록 남김없이 쓴 적은 없었다.
“후우, 후우.”
거친 호흡에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이거 웃긴 구조네.”
조화력은 바닥나도 서서히 차오른다.
주변의 나무가, 풀이, 바람이…….
자연의 기운을 담은 그 모든 것에서 에너지가 옮겨오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 그가 발을 딛고 선 곳은 죽은 행성.
정지된 듯 검게 굳은 주변 세상은 한 줌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하나가 있었다.
“시스템이라고 온전히 내 편은 아니라 이거지?”
실시간으로 자신의 생명력이 깎이는 기분에, 불쾌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바닥난 조화력은 유일한 생명에너지인 수호의 생명력을 갈아먹기 시작했다.
도구는 주인의 쓰임에 그 역할이 있는 것인데, 이는 숫제 반대가 된 기분이다.
상태창은 어쩌면 자신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족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일단 움직여야겠네.”
이대로 있다간 생명력이 다 빨려 미라가 될 판이다. 아직 체력이 쌩쌩할 때 이동해야 한다.
그나마 침식된 죽은 행성이지만 단 두곳.
생명이 살아있으며, 시간이 흐르는 곳이 있었다.
“일단 가까운 데로 가자.”
휘리리릭.
수호의 몸이 갈색 연기에 휩싸였다가 매로 변해 하늘을 날았다.
이곳에서 검객이 있는 곳까진 한 달음이다.
조화력은 차츰 늘고 있고, 생명력은 점차 깎이고 있다.
슈슈슉.
갈색 매의 주변 풍광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검은 명암뿐인 공간이 휙휙 뒤로 밀려났고, 저 멀리 푸른 점이 보였다.
녹음의 점은 순식간에 다가왔고, 매는 순간 연기로 화해 착지했다.
타탁.
“뭐, 뭐야!”
수호가 착지하자 그 안에 앉아 있던 개돌검객이 깜짝 놀랐다.
날아온다 싶더니 어느새 옆에 와 있을 정도의 속도다.
“다, 당신이 그랬소?”
“뭘?”
수호는 개돌검객의 말을 대충 한 귀로 흘리며 서둘러 상태창을 켜 보았다.
쭉쭉 내려가던 생명력은 더 이상 감소하지 않았다. 그 이유라는 게 별게 없었다.
‘멈췄네.’
서너 걸음 정도 되는 원형의 공간.
나풀거리는 풀들에 맺힌 생명의 기운이 수호에게로 이끌리듯 흡수되고 있었다.
그 양이 아주 미약하긴 하나, 조화력으로 삼기에 충분한 에너지다.
‘이거 골때리네.’
한 번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없었기에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침식된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적이 없었고, 조화력을 바닥까지 모두 사용한 적이 없었으니까.
조화력이 0이 되는 순간, 그것은 에너지원을 갈급하기 시작했고, 살아있는 생명체.
수호를 탐했다.
순하디순한, 주인에게 복종만 하던 애완견이 먹이가 끊기는 순간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사료가 되는 생명의 정령이 자리한 공간에 오니, 얌전해졌다.
수호는 차츰 오르는 조화력을 보며 한 걸음 내디뎌 침식된 공간으로 이동했다.
조금씩 증가하던 조화력이 멈췄다.
더불어 생명력도 더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게걸스럽게 물어뜯던 녀석이 다시 얌전한 척 구는 것 같아 수호는 입맛이 썼다.
“하긴…….”
시스템 메시지가 자신에게만 보인다고 이것이 어찌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일까?
기원을 모르고, 의도를 모르며, 방식을 모르는데.
그냥 보였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했을 뿐이다.
손에 쥔 칼이 어찌 적에게만 향할까.
“이보시오. 형님.”
수호는 개돌검객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감옥에 갇힌 듯 몇 평 남짓의 녹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녀석.
저곳과 이곳은 온전히 다른 세상이라 불러도 다르지 않을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막상 말은 통하니 어이가 없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자신이 휘두르는 검은 저곳을 통하는데, 저곳에서 개돌검객이 휘두르는 검격은 이곳에 닿지 않는다.
녹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무정령들이 갇힌 듯 이곳으로 오지 못하고, 바람 한 점 이곳에 불지 않는데 또 말은 오고 가니 이만한 모순된 세상이 어디 있나 싶었다.
저벅.
수호는 발길을 옮겨 개돌검객 옆에 앉았다.
멈췄던 조화력은 다시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까 세상이 흔들렸소. 혹시 느끼지 못했소?”
개돌검객의 물음에 수호가 피식 웃었다.
느끼기만 했을까, 그것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안다.
개돌검객의 눈빛엔 옅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저 확인하고자 던진 물음이다.
“쿠로를 불렀지.”
“쿠로? 그게 누구요?”
“응? 몰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어찌 알겠소?”
“왕 아니었나?”
“허, 침략자의 입에서 어찌 그 신성한 자리를 입에 담는가?”
질문이 편향되다 보니 검객의 자아를 이루는 낙송의 주도권이 커진 모양이다. 녀석의 음성엔 적개심이 가득했다.
“쿠로가 왕 아니었어? 커다란 호랑이 말이야.”
“……!”
개돌검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멸망의 시대.
아직 소년에 불과했던 나이.
시대는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에게도 무기를 들게 하였고, 먼발치에서나마 왕이 이끈 전쟁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다.
“왕을 아시오?”
“잘 알지.”
“왕은 어디 계시오?”
수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곳엔 빛을 잃은 회색 하늘만이 자리했는데 어쩐 일인지 밝은 태양만은 그 강렬한 빛 그대로였다.
“저 어딘가 있겠지.”
“…….”
“어쨌든 내가 그놈을 불렀는데 대꾸가 없네.”
그 외침이 닿았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이 루나가 실재하는 이유가 쿠로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다 여기니, 어쩌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행성에서 탈출하자면 해볼 건 다 해봐야 하니, 발악해 볼 뿐이다.
“조금 지쳐보이오.”
“어, 힘들어.”
수호는 까끌한 풀숲에 벌러덩 누웠다.
“아이고, 소리 한번 쳤다고 진이 다 빠지니, 이거 재식이 몸뚱이 데려올 수나 있나 모르겠네.”
“흐음.”
개돌검객은 덩달아 심각해져 철퍼덕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래도 둘이 있어 영 쓸쓸하진 않소.”
“웃기는 놈이네.”
수호는 피식 웃었다.
개돌소년 낙송은 어쩌면 여린 놈일지도 모르겠다.
“셋 아니냐?”
“모르겠소. 점점 시일이 지나다 보니 이제 내가 개돌족인지 인간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오.”
어쩌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낙송도, 장재식도 아닌, 개돌검객으로 온전히 융화되어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지구에 누워 있을 장재식의 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조화력이 바닥을 쳤고, 회복을 위해 기다리는 동안 이것저것 방법을 강구하는 그때 수호의 의식 한 자락을 두드리는 의지가 있었다.
“음? 차이?”
수호는 망설이지 않고 뱀파이어 차이를 소환했다.
변신과 흉내내기, 야수소환 같은 계열의 스킬은 야성 스탯의 영향을 받으니 조화력이 많든 적든 상관없다.
파팟.
소환된 검은 코트의 여인은 수호 앞에 공손히 무릎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야?”
“구천 행성으로 당가주를 호송하는 중에, 회귀자 이성우를 함께 데려갔습니다. 그가 말하길 시 으으으…….”
차이는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감에 정신이 어질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임무를 잊지 않고 보고를 이어가려 애썼다.
“신이 자신을 보호한다 하며……. 최, 최초 회귀를 가르쳐 준 것 또한 그가 말하는 신일 가능성이 크윽!”
차이는 무릎 꿇은 그 자세에서 그대로 엎어졌고 수호가 부축했다.
“뭐야? 괜찮아?”
수호는 서둘러 조금 차오른 조화력을 나눠 기운을 북돋아 주려 했으나 조금의 기운도 흘려보낼 수 없었다.
꽉 막힌 병에 물을 부어도 속이 채워지지 않는것과 같았다.
파파파팟!
수호는 차이의 몸이 환한 빛에 휩싸일수록 손에 느껴지는 무게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파팟!
일순 빛이 사라지며 품에 든 것은 검은 코트의 뱀파이어도, 박쥐도 아닌 정체불명의 수인이었다.
“허! 라미족의 아이가 어찌!”
“얘 알아?”
개돌검객의 말에 수호가 물었다.
“내 어찌 알겠소? 그냥 그 생김새가 라미족이니 그리 말할 뿐이지.”
수호는 품에서 축 늘어진 라미족 아이를 바닥에 눕혔다.
엘프와 비슷한 묘족과는 또 생김새가 다르게 생긴 것이, 머리칼 한중간에 뾰족한 귀가 솟아나 있었다.
볼에 자란 푹신한 털과 복슬한 꼬리까지 달린 것이 꼭 다람쥐를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허, 헌데 어찌 라미족이 날개가 있을꼬?”
축 처진 날개는 털 대신 피막으로 이뤄져 있어 영락없는 박쥐의 날개였다.
수호는 가만히 누운 차이를 보다가 개돌검객을 보았다.
“넌 원래 개였나?”
“모욕적인 질문이오.”
“재식이하고 섞이기 전의 낙송 네 모습은 어땠냐고.”
“지금과 같았소.”
“넌 거울도 없잖아?”
수호는 인벤토리를 열어 거울을 꺼내려다가 닫았다. 인벤토리에 여러 아이템이 있다지만 거울 같은 하찮은 아이템까지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지는 않는다.
업적 상점을 열어 흔한 거울 하나를 사서 내밀었다.
“네 기억 속 모습이 맞아?”
“으음? 조금 가냘파지긴 했지만…… 본래의 나의 모습이다.”
의아한 개돌검객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넌 재식이 몸은 저쪽에 있으니까, 정신머리만 그런가 보다. 얘는 아예 다 섞여버렸고.”
인간 차이, 뱀파이어 박쥐, 다람쥐인간인 라미족과 버무려진 듯했다.
“골때리는 세계네.”
침식된 구역에 생명이 닿으면 그저 소멸하고 마는데, 신의 힘이 닿은 이는 이렇듯 수인으로 변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사제로 임명받은 장재식이 그러하고, 신수의 반열에 오른 차이가 증거다.
이들은 루나에 현신하고도 존재 자체가 소멸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존재와 융합되었을 뿐.
축 처진 차이를 보며 물었다.
“넌 며칠이나 기절했냐?”
“기절에서 깨어난 사람이 그걸 어찌 아오?”
“그러네?”
“…….”
수호는 픽 웃곤 차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와의 유대관계는 아직도 확고하다.
신과 사제로 연결된 장재식과의 관계보다 야수와 주인의 관계가 더 끈끈한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몸과 정신 모두 이곳으로 온 탓에 그 연결이 아직 유효한지도 몰랐다.
“흠.”
수호는 차이를 역소환해 보았다.
파팟.
“……이게 되네?”
다람쥐인간이 끼어들었다지만 그녀는 여전히 수호의 야수로 취급받는 모양.
아마 지금쯤 수호시티의 어느 곳에 소환되어 회복을 시작할 터였다.
“너도 그냥 심플하게 날 따라라.”
“난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소.”
“꼴통이네, 이거.”
수호는 벌떡 일어섰다.
조화력이 날뛰던 것도 잠잠하니, 본격적으로 회복하자면 넓은 면적의 호주방면의 비침식구역이 좋았다.
홈트리도 하나 키워두었고, 주변 초원도 넓으니 나무정령을 보충하자면 그곳이 이곳보다 월등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려봐라.”
개돌검객이 자신을 따라오길 거부하니, 방법은 장재식의 몸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아 개돌족 낙송과 인간 장재식이 분리되면 다행이지만, 차이처럼 아예 외형까지 변해 둘이 하나가 되는 것도 배제할 수는 없게 되었다.
휘리릭.
매로 변한 수호가 홈트리까지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고 충만한 자연의 기운에 조화력이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수호의 한계 조화력이 워낙 높아 며칠은 회복해야 전부 채울 성싶었다.
나뭇가지에 늘어져 쉬던 수호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묘한 위화감을 쫓아 고개를 돌리니 초원의 경계에 붉은 포탈이 생겨나고 있었다.
츠츠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