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02
402화
* * *
서서히 지구의 전쟁 공식을 이세계에 적용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펜로스 탈환 작전이 좋은 예이리라. 양측 다 합쳐서 30만을 훌쩍 넘는 정예 병력이 맞부딪혔는데 사상자는 1만을 넘지 않는다.
사실 1만도 과장된 수치고 5천은 넘으려나? 전투가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나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사상자 대다수는 초반의 30분 안에 발생했다. 남은 30분은? 대가리가 무너지고, 위에선 화염집약체가 뻥뻥 터지고, 무너진 성벽에서 게리소님 병력이 밀려오니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지.
열심히 도망치는 적군을 우리가 과연 가만히 내버려 둘까. 전혀 아니다. 나는 도망치는 적군에게 소리쳤다.
“야! 조심히 뛰어가라!”
내가 이렇게 상냥하다.
“발 걸려 넘어지면 너만 아프다!”
어이구. 저 띨띨한 놈들이 식량 실은 마차도 버리고 달려가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장 후열에서 달리는 병사 몇 명을 가리켰다.
“식량 챙기고! 어이, 너!”
손목을 까닥이자 손에 들린 화염집약체가 웅장하게 진자운동을 한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뒤에서 길이 수십 미터짜리 화염이 휘둘러지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최후열에서 도주하던 불쌍한 병사 몇 명이 화염집약체의 열기를 느끼곤 걸음을 멈췄다. 내게 고개를 돌리는 그들의 얼굴에 참담한 절망이 어렸다.
나는 그들에게 버려진 짐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끌고 가.”
“어, 어… 어어……. 예?”
“마차 이 새끼야. 가서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아니면 뭐, 기껏 도망쳤더니 거기서 쫄쫄 굶어 죽으려고?”
“………어……….”
“싫어? 그럼 이 자리에서 죽일까?”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들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마차를 끌고 북쪽의 기지로 도망쳤다.
나는 멀어지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야! 너네 펜로스 위에… 거, 어디냐! 여하튼 거기서 방어전선 칠 거지? 내일 또 찾아갈 거니까 준비 단디 하라고 거기 사령관한테 알려라!”
도망칠 놈은 도망치고, 잡힌 놈은 잡는다.
이번 한 번에 2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원래라면 몇 개월에 걸친 사상 개조를 해야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시점. 예전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게 포로 관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포로들을 펜로스 중앙 공터에 몰아넣었다. 2만 쌍의 불안한 눈빛을 받으며 덤덤하게 그들의 처우를 입에 담았다.
“너희에게 있는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 가진 무기 다 압수한 뒤, 창하고 갑옷만 달랑 입고 앞으로 있을 모든 전투에서 선봉에 선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면 풀어주겠다.”
웅성웅성!
잔인한 폭거에 포로가 된 병사들이 웅성거린다. 곳곳에서 욕설을 내뱉는 놈들이 속출하고, 누구는 차라리 죽이라는 듯이 배를 까뒤집는다.
이놈들이 제 입장도 모르고 배를 가르라고 뻗대고 있네. 너네 잘못 걸렸어. 나는 가르라면 가를 수 있는 사람이다. 내 배도 갈랐는데 남의 배라고 못 가를 것 같아?
나는 칼을 들며 재차 말했다.
“아아! 조용! 그게 싫은 놈들을 위한 두 번째 선택지가 있다. 싫은 이들은 앞으로 나와라. 지금 당장 편하게 해주겠다.”
화르륵!
말이 끝나자마자 검에서 시퍼런 화염이 솟구친다. 화염집약체는 아까 다 소진해서 평범한 불의 검 생성 마법을 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마법은 살아생전 거의 본 적도 없는 일반 병사들이 화염집약체하고 불의 검을 분간한 능력이 있을 리가.
훙! 후웅!
타이밍 좋게 할리가 화염으로 이루어진 검을 몇 개 만들어서 내 주위에 띄웠다. 이것도 덩치만 크게 부풀린 허당에 불과하지만, 포로들 입장에선 어제 그거나 지금 이거나 분간이 안 갈 거다.
나는 드론처럼 내 주위를 일정한 속도로 공전하는 화염의 검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고통은 없을 거라 장담하마. 싫은 자는 나와라.”
싫다고 뻗대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날, 2만 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 * *
아침에 펜로스 탈환전을 시작해, 전투가 끝날 때까지 한 시간. 포로 정리, 무기 수거, 부상자 치료와 사망자 처리, 점심을 먹은 뒤 짧은 휴식 후 뒷정리까지.
싸운 건 한 시간인데 정리를 끝내니 오후가 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북쪽 적군 진지에 도착해야 하니 슬슬 출발해야 할 때.
“정리가 끝났으면 바로 진군한다. 펜로스는 버리고, 위로 올라가서 적 기지를 앞에 두고 야영 준비를 하자.”
반발은 없었다. 애초부터 전쟁이 원활하게 흘러가면 일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 사전 교육을 해 두었기에, 다들 능숙하게 장비를 점검하고 길을 나섰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에 적군 진지를 앞에 둔다. 저기도 무슨 시골 마을이라고 들었는데, 몇 개월 동안 전선이 고착화되자 군기지로 훌륭하게 재탄생했다.
평소라면 삼엄하게 경계를 할 기지. 하지만 오전에 있는 펜로스 패퇴 소식과 10만 명이 넘는 패잔병의 합류에 군기지는 해가 진 지금도 여전히 혼란스럽다.
원래라면 이 혼란을 틈타서 습격해야 하지만… 우리 쪽 병사들도 휴식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내일까지 내버려 둔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내버려 둘 순 없는 법이지. 밤이 왔으니 마검사 쟈기에서 암살자 쟈기로 전직을 할 시간이다.
“간다. 경계 잘하고.”
“예. 조심하십시오.”
나는 야전 전문 이종족 혼성 대대와 마법사들에게 적군의 기습을 경계하라 한 뒤에 진영을 떠났다. 야음을 틈타 적군 진지로 스며들었다.
‘마법이 아주 대중적으로 쓰이는구먼.’
멀리서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빛의 수호자가 대대적으로 관여해서인지 횃불보다 마법등이 훨씬 더 많다.
백열등보다 몇 배는 밝은 마법등이 어둠을 몰아내고, 부대 전체에 열 감지 마법진을 깔아서 일정 크기 이상의 열을 내는 생명체의 움직임을 훤히 파악한다.
하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나는 10만 명이 넘는 패잔병이 합류 탓에 밤이 되어도 소란스러운 적기지를 제집처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펜, 펜로스에……!”
“새하얀 게 날아들더니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위에서 뭐, 뭔가 빛이 이렇게 번쩍! 번쩍! 하더니만……!”
“빛? 무슨 빛을 말하는 거지?”
“모르겠습니다요! 빛이 막 휘리릭! 하니깐 성벽 위에 있는 놈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곤 불이 뻥! 하고 폭발했는데 갑자기 저만치 위에서 후끈거리는 불의 검이……!”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라. 새하얀 무언가, 빛, 그리고 화염의 검. 이 세 개를 누가, 어떻게 쓴 거지?”
“그, 그게…….”
기사들이 패잔병에게 사정을 청취하고, 병사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내 능력을 파악한다. 부상자 치료는 뒷전이고, 패잔병은 길거리 거지새끼처럼 군기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기지를 돌아다니며 적들의 현황, 주요 건물, 기사와 마법사의 수, 물자가 보관된 장소 등의 조사를 끝마친 뒤 기지 중심에 세워진 높은 건물로 향했다.
‘저기가 본부인가 보군.’
기지 가운데 설치된 참모 본부로 들어가자 수십 명이 넘는 상급 지휘관들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린다.
“끄아악! 이게 말이 되냐고!”
참모 본부는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웠다. 병사들의 증언으로 당장 내일 우리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도 기지 앞에 진지를 쳤으니까 머리가 터질 지경이겠지.
나는 편한 마음으로 본부 구석에 숨어서 참모진의 대화를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고위 마법사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방어 마법진을 관통하고 성벽까지 일격에 무너뜨릴 오러라니… 최소한 익스퍼트 최상급입니다!”
“소니아 반데스인가?”
“아닙니다! 남자라고 합니다!”
“게리소님에 또 다른 익스퍼트 최상급이 탄생했다고?”
나에 대해 모르나?
나는 흥미진진하게 참모진의 뻘짓을 들었다.
“인상착의를 들어보면 신성(新星) 쟈기로 추측됩니다. 익스퍼트 상급의 마검사라는 소문이 있는 걸로 보아 신빙성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는 서른에 익스퍼트 상급이 믿어지기나 하나? 시골 촌놈들이 으레 하는 허세다!”
“하, 하지만…….”
“허! 정말 그 말을 믿는 건가? 서른에 익스퍼트 상급도 기가 찰 일인데 최상급에, 지름 수십 미터짜리 화염검을 만들 수 있는 중위 마법사라고?! 진심으로 그 말을 믿어??”
‘너넨 다 죽인다.’
결정했다. 저 새끼는 기필코 죽인다. 어차피 참모진은 극소수만 남겨두고 전멸시킬 계획이었지만, 저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인다.
나는 끌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회의를 계속 엿들었다. 수십 명의 상급 참모진의 대화를 분석하고, 안면을 살피며 그들의 성향을 자세히 파악했다.
전쟁에 적극적이거나 적극적이지 않은 놈.
허세를 부리거나 솔직한 놈.
능력이 있는 놈과 무능력한 놈.
겁쟁이와 무대뽀.
이 외에도 몇 개의 분류로 참모진을 나누고, 죽일 자와 살릴 자를 구분했다. 참고로 이 신성 쟈기님을 의심한 거짓말쟁이는 무조건 죽일 놈이었다.
구분이 끝났으면 들어갈 차례다. 나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는 회의실로 침입했다.
대놓고 회의실을 활보하지만 스칼러 상급에 들어선 기사도, 4결 마법사도 나를 감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와 눈을 마주친 이도 나를 ‘나’라는 객체로 인지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회의실로 들어간 나는 가장 상석, 아까 신성 쟈기님을 남쪽 대륙 촌놈들의 허세라고 일축했던 거짓말쟁이의 뒤에 섰다. 마침 그 타이밍에 그 자식이 탁자를 꽝! 내려치며 일어서서 외쳤다.
꽈앙!
“뭘 이렇게 왈가왈부하고 있나! 기껏해야 악랄한 이종족 놈들의 도움을 받은 거겠지! 패잔병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종족 마검사는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마음이 약해! 당장 해가 뜨면 패잔병을 모조리 내보내고 그 틈을 타서 독과 화염포를……!”
이놈이 선 넘네.
퍼엉!
마음이 넓어지라는 의미에서 초능력으로 심장에 바람구멍을 뚫어준다.
“포, 포……?”
거짓말쟁이가 급작스럽게 포용력이 생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녀석이 망가진 기계처럼 ‘포’ 자만 반복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어?”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거짓말쟁이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 뒤, 모습을 드러내서 히죽 웃으며 검집을 드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헛……!” 챙강! 기사가 신속하게 검을 뽑으며 참모진의 앞을 가린다. 미안하지만, 한참이나 늦었다. 나는 용서 없이 검을 뽑았고, 그날 밤. 참모진의 절반이 내게 고혼을 달리했다.
다음날.
펜로스 사령관과 어제 정찰을 나간 적기지에서 납치한 사령관, 상급 참모 둘을 포박한 채 들고 나간다.
“모, 모여……!”
“어디로? 어디를 막아야……?”
어제 있었던 기습이 효과적이었는지 적군은 아침밥을 먹고 대열을 정비한 지금까지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다.
반면에 우리 측은 준비 만전. 이제 할 일은 어제처럼 돌격해서 다 때려죽이기만 하면 된다.
“우우……!”
“주, 죽을 거야. 우리는 전부 죽을 거라고.”
준비 만전 취소. 포로병의 사기가 바닥을 긴다.
저들은 지난 몇 개월간 빛의 수호자라는 조직이 얼마나 막대한 마법 무구를 보유했는지 보고 경험했다. 이제 그걸 적의 입장이 되어 맞이해야 하니 죽을 맛일 거다.
어떤 놈은 신 성자단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곤 눈물 콧물을 흘려대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서, 성자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 아니 그…….”
“이종족이 적이라니! 제가 미쳤습니다! 착하게! 진짜 착하게 살겠습니다! 전쟁이고 뭐고 지긋지긋하니 집에만 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하아……!”
웨일의 형제, 유난히 마음이 약했던 트라만타가 자신에게 달라붙는 포로병을 보며 어쩌지도 못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장 2.5미터가 넘는 덩치가 저러고 있으니 안 어울리기도 하고, 그런 놈한테 살려달라고 달라붙는 포로도 참 웃기는 놈이었다.
“물러나라!”
뻑!
아, 나만 웃겼나? 성자 호위 기사가 철창을 휘둘러서 포로의 안면을 후려갈긴다. 포로병의 이빨 네 개가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았다.
트라만타가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지 포로병에게 성력을 전해주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딱 좋은 타이밍이군. 적군마저 포함해서, 모두의 시선이 트라만타에게 집중된 틈을 타, 나는 그의 옆자리에 섰다. 그러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봐라! 성자에게 달라붙어 빌어도 통하지 않는다! 너희는 어제 약속한 대로 모든 전투에서 선봉에 서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가 죽을 거다!”
최악의 말. 아군은 물론이고 적군까지 미친놈 바라보듯이 나를 본다. 하지만 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오러를 피운다. 새하얀 오러가 10미터도 넘게 솟구치며 오전의 태양 빛에도 지지 않는 환한 빛을 발했다. 나는 오러를 피운 채, 적군에게 한 발자국씩 걸어가며 외쳤다.
“하지만 그냥 죽이진 않겠다! 너희가 목숨을 걸면 나도 걸겠다! 나도 앞으로 있을 모든 전투에서 선두에 설 거다! 함께 싸우고, 함께 죽자!”
“…….” 나름 감동적인 말을 했는데, 포로병이 ‘어쩌라고’라는 눈길로 나를 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곤 짧고 굵게 외쳤다.
“다 뒈지기 싫으면 이 악물고 달렷!”
두다다다!
역시 말보다 행동이지. 앞에서 내가 달리고, 뒤에서 병사들이 협박하니 포로병도 죽을상을 한 채 내 뒤를 따라 달렸다.
내가 병력 최선두에 서자 적 기지에 소란이 일었다.
“으아! 온다! 또 와! 어제 그 괴물이 또 온다고오오!”
펜로스의 패잔병이 난리가 났다. 병사들이 그들을 달래려고 했지만 오러 블레이드와 화염집약체가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설득이 먹히질 않는다.
결국, 패잔병을 달래는 걸 포기한 적군 병사들이 그나마 있는 이들로 나를 막으려고 활시위를 겨눴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가까워지자 활을 쏘지 못하고 멈칫했다.
“저, 저놈이……?”
“사령관?!”
그래. 나한테 너희 사령관이 잡혀있다.
공격해 보시던지? 최고 사령관 둘이 내 등에 인질로 잡혀있는데 공격할 간 큰 놈이 있기야 하겠어?
“쏴! 쏘라고!”
“하, 하지만 사령관님이…….”
“닥치고 쏴! 이 새끼야!”
있었다. 기사가 망설이는 병사를 발로 차고는 나를 향해 주저 없이 마포를 발사했다.
꽈앙!
“안 돼! 안 돼에에엣!”
어제 포획한 펜로스 사령관이 새 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미안한 말인데, 되거든?
나는 펜로스 사령관을 투포환처럼 집어던졌다. 날쌔게 날아오던 마포가 펜로스 사령관과 찐하게 키스했다.
“끄아아아……! 껙!”
뿌직!
마포와 인간의 정면충돌은 공멸이라는 결과로 끝을 맺었다. 펜로스 사령관은 마포의 충돌에 전신이 으스러졌고, 이후에 있을 폭발에 몸뚱어리는 원형도 남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산산조각 난 살점이 소낙비처럼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드득!
시뻘건 피의 비. 인정사정없는 인질극에 적*아를 가리지 않고 전장에 세 번째 침묵이 도래했다. 나는 피의 소낙비를 환히 맞으며 어젯밤 납치한 적군 사령관의 목덜미를 집어 들었다.
“다음은 너야.”
“으악! 쏘지 마! 쏘지 말라고!”
적군 사령관이 발버둥을 친다. 아이 참. 발버둥 치니까 던지는 각도가 안 나오잖아.
나는 다음 마포를 조준하는 기사를 향해 사령관을 던질 준비를 했다. 사령관이 기겁하며 꽥꽥 소리 지른다. 그에 맞춰서 음성 확장 마법을 그에게 걸어준다. 사령관의 높은 목소리가 침묵이 도래한 전장에 울려 퍼졌다.
“멈추라고! 이 빌어먹을 대보 기사! 네놈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게 나인데 은혜도 모르고 나를 죽일 생각이냐!”
우뚝! 대보 기사라는, 마포를 조작하던 기사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멈춘다.
다양한 마법과 마법 무구로 내 발을 묶으려고 준비를 하던 마법 전단도 ‘사령관이 직접 이름을 불러준다.’라는 은혜가 자신에게 올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며 마법을 취소했다.
“……이런.”
성벽 뒤에서, 마법사가 곤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내 귀에 포착되었다.
너만 이런이니? 나야말로 이런이다. 왜냐하면 너희 지금… 소드 마스터이자 고위 마법사를 앞두고 십 초나 넘게 시간을 질질 끌었잖아.
우우웅!
검신을 감싼, 자글자글하게 일어난 백색의 오러. 오러 블레이드. 10초 동안이나 힘을 비축한 덕분에 어제의 그것보다 족히 세 배는 우람한 녀석이 내 손에 잡혔다.
“…으헉!”
대보 기사라는 이가 오러 블레이드를 보더니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만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들 모두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나는 그들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기에 누가 시간 끌랬냐?
휘익!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날아드는 상냥한 크레센틱 오러 블레이드 5연발. 상냥한 폭발이 성벽 뒤에서 대기하던 마법 전단을 상냥하게 조각내었다.
뒤이은 상냥한 화염포대 발사. 화염포대를 통해 재생성한 상냥한 화염집약체가 적군 기지를 상냥하게 불살랐다. 전투 결과는, 시간이 조금 달랐을 뿐 어제와 거의 똑같았다.
“후, 후퇴! 후퇴!”
어제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참모진 소수가 망설이지 않고 후퇴를 입에 담는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도망을 잘 치는 겁쟁이 녀석들만 살려줬지.
“싸우지 마라! 후퇴! 후방으로 뛰어!”
다행히 제 역할을 잘하고 있구나. 너는 마지막까지 살려줄게.
우르르!
나는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해 상냥하게 외쳤다.
“야! 길 잃지 말고, 엉뚱한 데 새지 말고 적 기지로 날래 뛰어라!”
괜히 뿔뿔이 흩어지면 후방 관리가 힘들어지거든. 너희는 무조건 적 진영을 향해서만 뛰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날 또 뛰어야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식량 실은 마차 챙겨 가라니까! 어이! 야, 너! 못 들은 척하지 말고! 불타 죽기 싫으면 얼렁 와라! 와서 마차… 아, 어제 걔야? 내가 뭐 말하려는지 알지? 어, 사람들 모아서 끌고 가.”
너네는 앞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뛰어야 한다. 정확히는 중앙 대륙 오대 강국 남쪽 국경까지 쉬지 않고 뛰어야 했다. 예상 필요 시간은 최소 3개월이다.
앞으로 3개월 동안 북으로 뛰고, 또 뛸 건데 겨우 이걸로 지쳐서 나가떨어지면 곤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