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41
441화
【 일단 저질러 】
성층권보다 높은 고도에서 하늘을 나는 셋.
“와…… 우!”
트라칸은 다두에 관해 물어볼 것도, 할 이야기도 많았지만, 초고도가 선사하는 전능적인 풍경에 넋을 잃었다. 그가 대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현실적인 경치를 한참이나 구경하더니 탄성을 터트렸다.
“장난 아니군! 과거에도 초장거리 비행 마법을 몇 번 탄 적이 있지만, 이만한 높이를 이만한 속도로 나는 마법사는 없었어!”
“흐흥.”
“당신은 대체 누구요? 이종족 연합지역에서도 이만한 높이까지 올라온 마법사는 없는 걸로 아는데.”
트라칸의 칭찬에 드물게 쉘리 반데스의 콧대가 올라갔다. 그가 어깨를 활짝 펼쳐 으스대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니, 소개하려 했다.
“이 몸은…….”
“뭐, 상관없겠지. 마법사란 인종은 괴팍하고 성격이 그지 같던데, 궁금증 해결됐다고 얌체같이 떠나지만 않으면 된다.”
‘일이나 열심히 하쇼.’라며, 쉘리 반데스가 대답하기 전에 말을 끊는 트라칸. 실로 왕의 아버지다운 폭거에 해가 갈수록 점잖아지는 쉘리 반데스도 머리 뚜껑이 열렸다.
“이, 이……! 이 쌍놈의……!!”
“쌍놈이라니? 마법사, 왕의 아버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어? 내가 약속한 데로 노친네라고 안 부르잖아. 이쪽이 선을 지키면 그쪽도 지켜야지.”
이 개새끼. 당장 초장거리 비행 마법을 풀어서 추락사시킬까? 지금이라면 완전범죄 완성인데? 쉘리 반데스는 트라칸을 죽일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두는 쉘리 반데스가 안면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원 일이래? 저 노인네가 왜 저리 성질을 내지?’
그는 만날 때마다 머릿속에 능구렁이가 한 천 마리쯤 들어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쉘리 반데스가 이토록 감정을 드러내는 게 신선했다.
‘자식 앞에선 늘 고상한 척하던 할아버지가 동창생 앞에선 있는 욕 없는 욕 다 하는 거하고 비슷한 건가?’
절반은 맞는 추측이다. 만난 적은 없지만, 한창 현역으로 활동할 때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두 사람이다. 그 시절에는 소문만 들은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동세대 동료는 이런저런 일로 죽거나 어긋난 선택을 해서 스스로 죽여, 과거를 공유할 친구가 거의 남지 않은 쉘리 반데스. 트라칸을 만나고 오랜만에 과거의 향수를 느껴서 그런지 말투도 옛날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두가 추측하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정답이 쉘리 반데스의 말투를 심하게 공격적으로 바꾸었다.
“선은 무슨? 너만 왕 아빠냐? 나는 아들에 손녀까지 2대 연속 왕이거든? 왕의 아빠에 여왕의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쏠트리먼 같은 시골 촌락에서 권력 잡은 게 뭐 그리 잘났다고 고개를…….”
“시골 촌락? 야, 너 말 다 했냐?”
“다 했다. 어쩔래? 불만 있으면 여기서 내리시던지. 마법도 못 쓰는 무식한 위인이 구름보다 높은 고도에서 혼자서 살아날 방법이나 있어?”
가만 냅두니 주고받는 말이 심해진다. 다두는 둘의 감정싸움이 이 이상 격해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거 노인네들끼리 유치하게 그만 다투시고 중앙에 간 이후에 어떻게 할지나 얘기합시다.”
“누가 노인네냐!” “너, 내가 죽인다고 했다.”
“노인네 맞죠. 트라칸 님은 이백 살이 훌쩍 넘었고, 이짝 어르신도 내일 모래면 세수 이백입니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제 입장에는 두 분 다 살아있는 역사서나 마찬가지입니다만.”
“…….” 다두의 진실을 어느 정도 아는 쉘리 바데스는 기가 차서 입을 다물고, 트라칸은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트라칸은 만난 지 1시간도 안 되어서 카멜레온처럼 확확 변하는 다두의 말투가 영 적응되지 않는 듯했다. 말투가 너무 격의 없는 것 같은데 어디 한적한 곳에 잠깐 내려서 주먹의 대화를 나누어 버릇을 고쳐줄까?
‘아니야.’
트라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션의 검술을 익혔다. 그는 백 년 전, 사건이 끝나고도 알테어에 몇 개월을 머물렀고, 해피에게 한 수 가르쳐주면서 은근슬쩍 션의 검법을 빼먹었다.
몇 개는 성공적으로 훔쳤고, 몇 개는 일부만 빼먹었지만, 치욕적이게도 아예 감조차 잡을 수 없던 검법이 몇 개 있었다.
그만한 수준의 검사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해도 단서조차 잡지 못했고, 지금도 드문드문 생각이 날 때마다 시도하는데 여전히 모르겠는 빌어먹을 검법들. 그 난해함의 끝판 왕이 바로 유수화접이다.
검사로서의 자존심을 휴지조각처럼 구겨버린 검법. 차라리 유수화접이 거짓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쓰러진 척을 하고 최후의 특공을 노릴 때, 션의 검술을 지켜보았기에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심지어 백년의 세월을 넘어, 다두가 자연스럽게 쓰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보지 않았나.
‘션은 소드 마스터가 아닐 때도 유수화접으로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막았다. 다두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니, 유수화접을 뚫으려면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해도 힘들 거야.’
즉, 버릇 고치려고 주먹 들었다가 유수화접에 성질이 나서 생사결로 번질 수 있다. 주먹질이 생사결이 된다니, 그게 웬 망신일까. 솔직히 그럴 확률이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아니, 더 솔직해지자면 버릇을 고치는 걸 핑계로 한 판 시원하게 뜨고 싶다.’
다두의 유수화접을 직접 느끼고 싶다! 백년 동안 답이 나오지 않는 검술의 정리를 알고 싶다! 백년 동안 머리 싸매고 정리한 유검술의 묘리를 션의 유수화접과 비교하고 싶다!
트라칸은 생각이 정리되자 몸이 근질근질했다.
‘어디 가서 한 판 붙자고 할까? 대련으로 하루 시간 쓴다고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검사 아니랄까 봐 에일의 일은 까맣게 잊고 다두와 대련해서 유수화접을 맛볼 기회를 노리는 트라칸이었다. 그가 욕심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다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막 트라칸이 입을 열어 ‘야, 중앙이고 나발이고 한 판 뜨자.’ 라고 다두에게 시비를 걸기 전.
“안 된다.”
적절한 순간에 나온 쉘리 반데스의 유들유들한 말이 트라칸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늘한 눈. 낮게 가라앉은 안광은 다두에게 티클만한 해도 끼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쉘리 반데스가 조곤조곤한 어투로 경고했다.
“아직 이 친구하고 약속한 게 남아있어서. 그걸 정산할 때까지 애는 내 거야. 그러니 건드리지 마라.”
트라칸은 경고와 함께 전해지는 눈빛을 보고 남몰래 긴장했다.
‘미친. 이거 아무리 봐도 그 괴물 새끼보다 윗줄이잖아.’
트라칸이 만난 뛰어난 마법사는 많지만, 가장 악몽 같았던 마법사를 고르라면 단연코 울타르의 대장로였다.
수천, 수만이 넘는 레이스를 손짓으로 부리는 괴물. 레이스를 인공 마법 회로로 개조해서 소낙비가 쏟아지듯이 광역 공격 마법을 쏟아 붓는 인외의 존재.
이종족 연합지역에서 울타르 대장로보다 높은 경지에 들어선 (것 같은) 마법사를 몇몇 보긴 했지만, 그보다 소름이 돋지는 않았다. 그 누구와 마주해도 그때의 괴물이 떠오르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쉘리 반데스의 눈빛에서 백 년도 더 전에 싸운, 울타르의 대장로가 떠오르는 걸까. 트라칸은 본인도 모르는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며 쉘리 반데스를 경계했다.
‘잠깐, 근데 조금 전에 뭐라고? 건드리지 마? 시발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트라칸이 누구인가. 천재검의 전인에게까지 시비를 건 게 트라칸이라는 위인이다. 아무리 하늘 위에 떠있다고 해도, 상대가 나보다 고수라고 해도 얌전히 고개 숙이는 건 성질에 맞지 않는다.
트라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쉘리 반데스에게 입을 벙긋했다. 말없이 벙긋거리기만 한 입의 모양은 ‘싫다면?’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트라칸의 입 모양을 읽은 쉘리 반데스의 기색이 한층 딱딱하게 굳었다. 어디 가서 자존심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둘이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둘의 신경전이 말싸움을 넘어서 마나의 다툼으로까지 이어지려 하는 그때. 분위기를 모르는 다두의 태평한 말이 파국으로 치달으려는 둘의 사이를 말렸다.
“또 그러신다. 노인네들이 참 자꾸 왜 이리 투닥거리실까.”
젊은 놈이 말리니 대놓고 성질을 부리기가 뭐 해진다. 그나마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아는 쉘리 반데스가 먼저 눈을 흘겨 싸움을 피했다.
“…흥.”
(죽어도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보다 고수가 먼저 양보하자 달아오른 트라칸의 머리가 조금은 식었다.
‘말투가 엿 같다고 굳이 싸울 필요까진 없잖아? 다두 녀석의 말투도 뭐…….’
생각해보면 션도 말투가 참 건방졌다. 몇 분 후면 죽을 놈이 오늘 처음 만나 할 말이 없으니 알아서 볼일 보라고 말했을 땐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지.
그런 션의 기질을 이어받았으면 다두의 말투는 자연스럽다. 유수화접도 같은 쏠트리먼 출신인데 언젠가 견식할 날이 올 테고.
‘참자. 트라칸아. 용병 생활 청산하고 왕 아버지가 됐는데 옛날 버릇 드러낼 필요가 없잖아? 마법사 말버릇이 개 같은 거야 저 실력이면 그만한 자격이 있지.’
“흥!”
트라칸이 콧바람을 불며 싸움의 원인, 다두의 말투에 관한 고민을 털어 넘겼다. 다두는 투기가 가라앉자 아무렇지도 않게 중앙에 도착한 이후의 일을 물었다.
“대화를 바로잡죠. 트라칸 님은 중앙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뭘 하실 예정입니까?”
“…지금 막무가내로 쳐들어가 봤자 의원들도 얼마 없을 테니 있는 사람이라도 찾아봐야지.”
“다음은요?”
“일단 가서 누가 있나 보고, 친한 사람한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야지. 아마 순탄치 않을 거다. 네가 에일의 환생이라는 걸 직접 확인한 나도 긴가민가한데 그들이 쉽게 믿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예.”
“라코아 녀석도 적임이겠군. 녀석을 통해서 성자단에게 은근슬쩍 정보를 흘리면 일이 더 쉽게 진행될 거다. 그들을 통해서 네 비밀… 아, 다두. 네 비밀을 아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냐, 아니면 적을수록 좋은 거냐.”
“딱히 숨길 필요까진 없지만, 너무 동네방네 알려도 곤란합니다.”
“무리한 부탁을 하는군. 일단 알겠다.”
트라칸이 팔짱을 끼곤 지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다. 다행히 트라칸가 쉘리 반데스는 더 이상 아까처럼 서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두는 깊은 눈으로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둘을 유심히 관찰했다.
‘장난 아니네.’
다두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자존심이 센 두 대가를 억지로 만나게 하니 만난 지 1시간도 안 되어서 죽고 죽이는 싸움이 펼쳐질 뻔했다.
‘얼른 내려서 떨어뜨리려야겠어. 아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분들이 자기 위치도 모르고 왜 저렇게 눈을 부라린대?’
사실, 두 사람이 싸우는 원인을 제공한 건 다두의 탓이 컸다.
다두가 둘이 티격태격하는 원인을 노인네의 동창회로 추측한 게 절반만 맞는 이유는 고수 간의 신경전을 계산에 넣지 않아서였다.
고수일수록 본인의 간격을 편집적으로 중요시한다. 별로 친하지 않은 트라칸이나 쉘리 반데스 수준의 고수가 초장거리 이동 마법이라는 좁은 공간에 부대끼면 신경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상대를 좋게 대하려 해도 고수의 본능이 상대방을 경계하는 거다. 나는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너도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상대의 경계를 느끼고 나는 경계도를 더 올리고, 상대도 똑같이 올리고.
이 반복되는 과정의 끝은 피를 보는 전투다. 쉽게 말하면 가위바위보로 진사람 귀싸대기 때리는 장난이 초반에는 훈훈하게 시작하다가 나중에 가면 멱살 잡고 싸우는 일로 번지는 것과 비슷하다.
즉, 쟈기가 알테어에서 한 것처럼 대놓고 협박하지 않는 이상, 친하지 않은 고수를 한 공간에 몰아넣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싸움이 일어난다. 아니, 알테어 때도 일이 일어났으니 확률은 사실상 100%였다.
오히려 트라칸과 쉘리 반데스가 말싸움과 작은 신경전만 펼치고 끝낸 것이 두 사람의 자제심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네…….’
수십 번 죽다 보니 머리가 반쯤 맛이 간 탓에 고수의 신경전을 모르는 다두만 ‘저 둘은 아까까지는 말장난하면서 잘 지내다가 갑자기 왜 이럴까.’ 하면서 노심초사할 뿐이었다.
“…….”
복잡한 상념 속에서, 셋은 대화를 그만두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하늘을 날아 중앙으로 향했다.
* * *
몇 시간 후.
공중 감시 마법진을 피하고자 중앙에서 동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인적 드문 대로에 착지한 세 사람.
쉘리 반데스는 둘을 내려주자마자 지친 얼굴로 가까운 돌무더기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이제 때려 죽어도 못 간다. 어떤 빌어먹을 젊은 녀석이 노인네 배려도 없이 대륙 횡단을 두 번이나 시키는 바람에 녹초가 되었어.”
그가 내려오면서 본,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상단 마차 무리를 가리키며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저 치들이 오면 마차 타고 뒤따라 갈 테니까 먼저 가거라.”
트라칸이 품에서 인장을 꺼내 쉘리 반데스에게 던졌다. 쉘리 반데스가 인장을 받자 그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쏠트리먼의 귀인(貴人)으로 인정받은 외부인에게 주는 인장이다. 이걸 보여주면 맨몸으로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단 더 좋은 대접을 받을 거요.”
“허…. 고맙군. 잘 쓰겠네.”
“흥! 누구 말대로 시골 촌락이라서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다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거, 소드 마스터가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어여 가기네 하게.”
“…조심하쇼.”
둘 다 앞서의 불똥이 왜 발생한지 알기에 최소한의 화해는 하고 헤어진다. 그렇게 쉘리 반데스를 두고 다두와 트라칸은 새처럼 날아 중앙으로 향했다.
트라칸의 명성으로 중앙 성문을 빠르게 통과한다. 그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는 거리를 고수 특유의 걸음걸이로 부드럽게 통과하며 다두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먼저 의견을 낼 테니, 너는 딴 사고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아니,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니 가까운 여관을 잡고 기다려라.”
“저는 안 따라가도 됩니까? 가서 바로…….”
“나도 그러면 좋겠다만, 워낙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 네 첫 등장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가 적절할 거다. 여관에서 그때 할 말이나 미리 생각해두고, 이거 받아라.”
짤그락!
트라칸이 황금빛이 번쩍이는 금화를 다두에게 건넸다. 왕 아버지 되고 나서 씀씀이가 커진 트라칸이었다.
탓!
다두에게 숙박료를 주곤 몇 가지를 더 당부한 트라칸이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트라칸은 옥상을 건너며 중앙의 중심, 지구라트로 달렸다.
“바로 가? 너무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데?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뭘 생각해두라는 거야.”
홀로 남겨진 다두는 앞날이 캄캄했다. 그도 꽤나 무리하게 일을 진행한 감이 없잖아 있기에 다음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일단 생각부터 정리하자. 다두는 이종족 연합지역에서 할 주장, 그럴듯한 거짓말, 그가 할 부탁 등을 정리했다.
그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를 계산해서 최상과 최악의 가정을 정하고, 가정마다 해야 할 일을…….
“어? 잠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중앙의 구불구불한 계단을 걷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워낙 머릿속이 복잡해서 깜빡 잊고 있었는데 중앙의 모습이 예전하고 다르다.
‘막 왔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못 썼는데, 지금 보니 많이도 바뀌었네.’
중앙의 건물은 쟈기가 왔을 때하곤 또 다른 양식을 했다. 30년 전에는 초록색, 파란색 등으로 외벽이 화려하게 칠해진 석제 건물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그때 당시 건물 중 절반이 무너지고 새로 지어졌다.
새로 지어진 건물 중 대다수는 현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삼차원적 마법 회로가 적용된 최신형 건물이다.
하지만 일부는 전통적인 목재 자재로 지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전통적이지만은 않다. 목재 건물에 들어간 나무는 특이하게도 살아있었다.
‘살아있는 나무? 저걸 어떻게 한 거지?’
다두는 살아있는 나무 건물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 건물들은 마치 나무 수십 그루를 찰흙처럼 뭉개서 건물의 형태로 바꾼 것만 같았다.
초능력 파동으로 살펴보니 수관과 체관이 1층부터 10층 옥상까지 탄탄하게 이어져 있다. 영양분 공급이 잘 되는 것을 보여주듯이, 옥상 모서리에 자란 ‘일반적인’ 나무와 그에 핀 잎에 생명력이 넘쳐났다.
외벽은 반질반질하다. 목재 표피의 색감과 촉감을 그대로 살린 채로 최대한 깔끔하게 표면 마감질을 한 것과도 같았다. 가지와 잎이 풍성한 옥상과 달리 외벽 부근에 자라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하 수십 미터까지 파고든 뿌리는 건물을 지탱하는 하부 기둥을 칭칭 옭아매었다. 뿌리의 확장을 어떻게 조절했는지 모르겠다만, 지하철이 지나는 길은 철저하게 피하는 방식으로 뿌리가 뻗어 나갔다.
‘성장을 조절했군. 현 시대의 마법만으로 이게 되나? 아니면 정령도 쓰인 건가?’
이건 다두도 모르는 방식이다. 머리가 반쯤 맛이 간 다두. 그는 어느새 본래 목적을 잊고 기이하게 발전한 중앙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중앙을 돌아다니던 다두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저기는…….”
과거, 다두가 서기관 젤 포이만과 대화를 나누던 텅 빈 공터. 아니, 지금은 텅 비지 않았다. 드디어 이세계에도 교육정신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지 작은 놀이터가 공터에 세워졌다.
다두는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인적 없는 놀이터로 들어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코난이라는 열매를 사 먹었던 시장은 세월이 흐르고 장소를 바꿨는지 보이지 않는다.
공터는 놀이터로, 시장은 화려한 건물로 바뀌었지만, 쟈기와 젤 포이만이 대화를 나눈 벤치만은 30년 동안 변치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웃차.”
젤 포이만이 떠오르고, 그와 한 영문 모를 문답이 생각나자 다두는 벤치에 앉았다. 그는 가만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살아있는 나무로 세워진 건물을 구경했다.
저벅. 혼자서만 앉아있던 그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가 다두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나누더니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중앙에 방문한 외국인들은 저 건물을 보고 많이들 놀라더군요.”
다두는 상대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건지 의아해서 가만히 있었다. 전생과 달리 현생에서는 처음 보기에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다.
그런 다두를 보고는 상대는 싱긋 웃었다. 아, 저건 나한테 하는 말이 맞구나. 다두는 난데없이 친한 척을 하는 상대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가 웃으며 살아있는 나무로 만든 건물에 관한 설명을,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 늘어놓았다.
“생목건축학(生木建築學)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내부 기둥이나 몇몇 필수 자제만 무기물로,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살아있는 나무로 감싸 건물을 세우는 작업을 총칭하는 학문이죠.”
“아… 예. 그런가요.” 딱 그게 다두가 내비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교력이었다.
대화 능력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상대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홀로 대화를 이어갔다.
“왜 저런 건물을 연구하자면, 이종족 연합지역의 머리 좋고 수백 년은 기본으로 산 현자들이 이대로 개발이 지속되면 약 150년 후에 환경파괴로 말미암은 전 지구적 자연재해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더군요.”
“150년 후요?”
다두는 대규모 환경파괴의 부작용이 일어날 시기를 150년 후로, 그만큼이나 길게 잡은 것에 놀랐다.
“예. 하하! 역시 믿지 않으시군요. 저도 동의합니다. 말이 됩니까? 겨우 150년 안에 세상이 뒤바뀐다니…….”
“아, 예…….”
하지만 상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150년도 빠르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저도 믿지 않습니다만, 자료를 엄청나게 챙겨와서 뭐라 주장하는데…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냥 그렇다니까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 거죠.”
“아, 아… 으음……. 그렇군요.”
나는 기계다. 나는 ‘아’를 말하는 기계가 되었다. 라고 스스로를 세뇌한 이에게나 나올 법한 사교성 제로의 대답. 다두는 제발 이 어색한 만남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무가 베어질 것을 대비해 건물 자체를 나무로 만들자는 연구를… 후우! 미, 아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바람에 이렇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생목건축학을…… 아, 참. 제 소개가 늦었군요.”
하지만 상대는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길게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더니만, 이제는 악수하자고 손까지 내밀었다.
죽이지 못하는 안 친한 사람한테는 낮을 가리는 다두는 그의 악수를 소심하게 받았다.
조물락! 조물락!
‘뭐야? 이 새끼?!’
다두는 식겁했다. 상대가 악수하고 힘을 푼 다두의 손을 놓지 않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손바닥을 주물럭거린다. 그의 정체를 아는 다두가 아니었다면 상대의 성적 취향을 의심할 정도의 주무름질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다두의 손바닥을 감회 깊은 얼굴로 주무른 상대가 가는 눈을 떠서 다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자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동공을 자랑하며 다두에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중앙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젤 포이만이라고 합니다. 아까 트라칸 대공과 함께 오셨던 분 맞습니까?”
ico_epub_viewer_scroll_ar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