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less martial arts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221
220화 남겨진 것들
오래된 꿈을 꿨다.
그것도 자각몽으로.
쏴아아.
비가 쏟아지는 안휘 근처의 황량한 벌판.
그리고 그 벌판을 힘없이 걷고 있는 나.
신기한 건 분명 나였음에도 제삼자의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뭐, 꿈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울 건 없다.
‘저 때가 언제지?’
문득 든 생각에 머릿속을 뒤적여 기억을 떠올렸다.
‘식구들을 묻어 주고 오는 길이었군.’
전염병에 걸려 힘없이 죽어 버린 이 세계의 가족들.
제대로 먹지 못해 깡마른 몸으로 네 식구를 하나하나 끌고 가 야산에 묻었던 기억이 난다.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묻을 수는 없어 나름 양지바른 곳을 찾아 작게나마 봉분을 만들었다.
그나저나 한번 찾아가 본다, 찾아가 본다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여태 가지 못했다.
‘깨어나면 가 봐야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꿈을 지켜보고 있으니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주위 풍경이 달라졌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광경.
안휘성에 있던 시전거리의 모습이었다.
“강에서 잡은 생선이 세 마리에 한 문!”
“국수 먹고 가시오! 닭 뼈로 육수를 내어 맛이 기가 막히다오!”
“한중에서 가져온 비단이 세 필에 은 한 냥이오!”
“한 푼 줍쇼! 아이고 나으리. 배고 고파 죽겠습니다요! 제발 한 푼만…….”
우렁찬 목소리로 동냥을 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사이 더 굶었는지 깡마르다 못해 반쯤은 스켈레톤이 되어 버렸다.
불쌍함이 철철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99.4% 정도는 그런 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니, 저 정도면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어냐? 며칠 있으면 죽게 생겼는데?’
차가운 안휘의 인심과 거지 같았던……. 아니, 그냥 거지였던 하루하루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제일 개 같았던 건 왕초 새끼였지!’
내가 있던 거지 패의 두목으로 세 문을 벌면 두 문을 뺏어 가고 두 문을 벌어도 두 문을 뺏어 가는, 정말 개 같은 놈이었다.
심지어 한 문을 벌어도 두 문을 내놓으라고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무슨 사납금 제도도 아니고.’
부모님 묘에 찾아갈 때 겸사겸사 놈을 이승에서 하직시켜 주리라 결심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어차피 지금쯤 굶어 죽었겠구나.’
하도 X 같아서 놈이 자는 동안 아킬레스건을 끊어 버렸거든.
아파서 울부짖던 놈의 모습이 떠올라 새삼 통쾌해졌다.
잠시 웃고 있자 다시 한번 지직거리며 꿈속의 모습이 또다시 바뀌었다.
“…….”
졸졸 흐르는 하천 옆에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내가 보였다.
심지어, 아까보다 더 굶었는지 이제는 눈에서 생기마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실, 이건 이유가 있었다.
꼴에 조직이라고 왕초 새끼를 찌른 뒤에 거지 패에서 나에게 현상금을 걸었던 것이다.
그걸 피해서 안휘를 떠나 쫄쫄 굶은 탓에 저 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저 때 진짜 배고팠지…….’
왜 하필 이 거지 같은 무림에 환생시켰냐고 원망도 많이 했다.
그렇게 죽나 싶었을 때.
“나를 따라오겠느냐?”
낚싯대를 든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저 모습을 보니 기억난다.
‘더럽게 못 잡았지…….’
묵룡당 시절 할아버지는 종종 고기를 먹여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낚시하러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물고기를 낚는 걸 본 적이 없다.
‘뭐, 그래도…….’
나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낚았으니 어찌 보면 대단한 강태공이긴 하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할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누워 있던 내가 미동도 없이 답했다.
“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거야 네가 어떻게 하냐에 달렸지. 무림의 영웅이 될 수도 있고, 한낱 외당 무사로 썩을 수도 있고.”
사실, 저 때는 영웅이고 외당 무사고 들어도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건 생존이었으니까.
“밥은 잘 주나요?”
“삼시 세끼 꼬박꼬박 나오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럼 따라갈게요.”
벌떡 일어난 나.
그런 내 손을 꼬옥 붙잡은 할아버지.
씨익.
예전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변은 조금 있다가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느냐?”
할아버지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되돌아왔던 것이다.
과거에는 없던 일.
의아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훌쩍 다가온 할아버지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느냐?”
“……응.”
갑작스러운 인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제나 그리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쯧쯧. 일가의 수장이란 놈이 이리 눈물이 많아서 어찌하려는 게냐. 이래서야 수하들이 널 믿고 따르겠느냐.”
타박하는 할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렇단다.”
그거 손을 올려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어릴 적의 나를 돌아봤다.
“저 깡마른 아이가 대문파의 수장이 되다니. 정말 잘 자라 주었다.”
“그만큼 할아버지의 안목이 훌륭했다는 거지. 벌판에서 주운 꼬마가 이렇게 성공할지 누가 알았겠어?”
“내 안목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검선 그 친구만 봐도 알지 않느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친구 젊었을 적엔 도에만 관심이 있어 무공이 형편없었다.”
“정말? 그런데 어떻게…….”
“뭐든 극에 이르면 통한다고, 깊은 도를 깨우친 덕분에 검도도 깨달은 것이지.”
“아…….”
감탄을 하다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사실…….”
“이미 며칠 전에 만나 곡주를 나눠마셨다. 그 친구답게 아주 장렬하게 전사했더구나. 경지에 오른 뒤에도 도에 빠져 수련을 등한시할 때부터 알아봤지.”
“…….”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잠시 말을 잃었다.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후회 없는 삶이라 하더구나. 그리고 네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도 했고.”
“도망쳤는데…….”
“자책할 필요 없다. 내가 보기에도 넌 최선을 다했어. 덕분에 저만큼이나 살지 않았느냐.”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커다란 구멍이 열리며 사람이 가득한 한중이 보였다.
이번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려는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구멍 쪽으로 나를 밀쳐 냈다.
“그만 가 보거라.”
“아니, 얼마 만에 만났는데. 얘기도 좀 하고…….”
“산 사람이 선계에 오래 있으면 하계로 못 돌아간다.”
“……!”
꿈이 아닌 선계라는 말에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하, 할아버지 신선 된 거야?”
“정식은 아니고……. 그래, 예비 신선이라고 보면 되겠구나.”
세상에나, 할아버지가 신선이 되다니.
기쁨을 표현하려던 찰나, 할아버지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구나.”
구멍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었다.
“그럼 안 되지.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그놈의 장가 타령은…….”
할아버지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팠던 어릴 적을 잊지 말거라.”
“뭐?”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기울였다가 곧 의미를 깨달았다.
“알았어.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래, 그거면 되었다.”
착.
한중을 보여 주던 구멍이 나를 빨아들였다.
“잘 있어! 장가가면 색시 보여 줄게!”
저 멀리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꿈에서 깨어 눈을 번쩍 떴다.
꿈에서 뭘 봤는지 기억이 전부 날 듯하면서도 잘 나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자 익숙한 실내 구조가 보였다. 침상에 머리를 파묻은 청소소도.
“으음…….”
전왕문 공식 메딕답게 밤새 나를 치료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음?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메딕이 치료했다 해도 내 몸 상태가 너무나도 멀쩡하다는 데 있다.
지옥경을 펼친 반동으로 찢겨 나간 혈도는 완벽히 복구되어 있었고, 완전히 부서졌던 가슴뼈는 이미 자리를 잡아 붙기 시작했으며 찌그러졌던 단전에는 내공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마치, 죽었다가 풀 피로 되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어? 깼어요?”
청소소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 나는…….”
순간, 있어서는 안 되는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내 예상이 맞는지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대라활선단을 드셨어요. 그게 아니었으면 족히 사오 년은 요양하셔야 할 뻔했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내가!”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저분이 그렇게 하신 거라. 저는 그저 부러진 가슴뼈만 맞췄다고요.”
청소소가 방 한쪽을 가리켰다.
“……!”
있는지도 몰랐던 전왕이 바닥 한구석에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말해 주랴?”
소란을 듣고 깼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탕약 끓일 시간이 돼서 이만 나가 볼게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두 분께서 잘 푸세요.”
눈치 빠른 청소소가 자리를 피하자 전왕이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네가 준 약을 들고 구룡성주에게 가긴 했다.”
“그런데 왜……?”
대라활선단을 받은 전왕.
그는 한눈에 이게 보통의 단환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성주에게 먹이려 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는 걸 어떻게 하냔 말이다.”
성주 본인이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냥 강제로 먹이면 되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태청진인을 강제로 깨워서 함께 설득했는데도, 손주 곁으로 가겠다며 들어먹질 않았으니까.”
“아…….”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는 이렇게 가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내부에서 온갖 정치질이 난무해도 구룡성이 중심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구룡성이 안정되어야 사천과 운남, 앞으로 편입될 감숙과 청해, 신강을 안정시킬 수 있을 터다.
이렇게 되면 이번 전쟁은 진 것이나 다름없다.
구룡성과 정도맹의 수많은 무사들이 죽은 건 물론, 양측의 수장이 죽었다.
어디 그뿐인가.
태청진인의 오른팔이 날아갔으며 정도맹은 두 명의 장로를 잃었다.
심지어 나머지 일곱 역시 족히 이, 삼 년은 요양해야 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다.
전왕문 역시 이런 타격을 피해 가지 못했다.
다행히 간부들 중에는 중상을 입거나 죽은 사람이 없었지만, 이백에 가까운 무사를 잃었다.
“여하튼, 최선을 다했으니 나는 죄가 없다.”
“…….”
전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궁금한 게 풀렸으면 이만 가 보겠다. 한 군데 있으면 좀이 쑤셔서 말이지.”
“아직 여쭤볼 게 남았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왜? 내가 전왕류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서?”
내 마음을 짐작했는지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예. 북궁가의 전왕류를 어찌 알고 계시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성주의 죽음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이었다.
사부는 분명 전왕류의 전승자는 나 하나라고 못을 박았으니깐 말이다.
“맞춰 봐라.”
흥미가 생겼는지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앉았다.
“북궁가의 일원이십니까?”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 않냐? 북궁가의 일원이 아니고서야 전왕류의 비급을 어떻게 봤을까.”
“……저 역시 짐작은 했지만 영 믿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하긴.”
“그럼 왜 북궁가를 재건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전왕과 투왕, 두 사람이 있으면…….”
“크크크큭.”
내 질문에 전왕이 웃기 시작했다.
“전쟁을 겪고도 모르겠냐?”
“무얼 말입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과연 십마련주가 출정 전에 일곱 종주만 죽였을까?”
“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천하오패는 제각기 전력의 일부를 숨기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정도맹의 장로들이 은거한 전대의 인물들을 불러 모으려 한 게 그 증거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건 구룡성도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구룡산맥 심처에 은자림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북궁가의 재건을 방해할 게 뻔한 사자맹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무재는 쓸 만한 것 같지만 이리 아둔해서야……. 아무리 봐도 백이 놈이 후계자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그제야 이 영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북궁가의 제자 진무전이 사조님을 뵙습니다!”
북궁 사부의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