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2
13화
“이게, 이게 무슨…….”
점쟁이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테이블 밑에서 황급히 움직였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다른 카드들을 마구잡이로 헤집다가 다시 충격에 빠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부산스런 모습을 보고 하나가 물었다.
점쟁이는 그 물음에도 잠시 대답이 없다가 이내 헝클어진 자세를 정돈했다.
고개가 작게 흔들렸다.
“……이것도 내려진 답이라면 답이겠죠.”
또 운명 같은 소리.
점쟁이는 드디어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는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한 타로 덱에 동일한 카드가 두 장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평소에는 섞인 적도 없고…… 정말 철저히 분리해서 관리하는데,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있는 일이라.”
“헐. 그럼 다시 뽑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자기가 더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하나의 물음에 점쟁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드는 같은 질문에 두 번 답해주지 않아요. 자기가 내놓은 답이 틀린 것 같냐면서 토라지기도 하거든요.”
꼭 그 카드에 생명이라도 깃들어있다는 투였다.
하나는 ‘와, 하필이면.’ 하고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면, 나는.
‘그래서요.’
그들의 심각함이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카드 좀 섞여 나온 게 세상이 무너질 일인가? 내 대답은 ‘전혀’였다.
오히려 운명 같은 건 없다는 내 주장에 힘만 실어줄 뿐이었다.
모든 게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굴러간다면 이런 오류도 없어야 했으니까.
그때, 점쟁이의 손이 그림 위를 지그시 눌렀다.
무언가를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양을 따라 그리는 손가락 끝이 신중했다.
팔목으로 무언가 반짝이는 보랏빛이 잠시 비쳤다.
‘보석? 자수정인가?’
제대로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옷소매 사이로 빛이 사라졌다.
베일 겉으로 찡그린 미간과 감은 눈의 음영이 드러났다.
그녀가 읊조리듯 말했다.
“두 세계가 맹렬하게 부딪치고…… 먼지 쌓인 천칭에 새로운 빛을 드리우며…….”
눈을 떴다.
“죽음이…… 턱 끝까지 날을 대고 있네요.”
천체의 사형선고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 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기 빠지듯 새던 웃음은 어느새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번져나갔다.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나는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내 앞의 두 여성들과 상반된 태도였다.
나는 하나의 등받이로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또 없어요?”
관심이라도 있는 태도로 물었지만, 공기 중의 살벌함은 입이라도 벙긋하면 한 대 칠 기세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적대가 잔뜩 섞인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점쟁이는 침묵했다.
나는 하나의 팔목을 붙잡고 거칠게 일어섰다.
보라색 벨벳 의자가 제자리를 잃고 비틀어졌다.
“잠시만요! 잠시만!”
한시라도 저 미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랑이가 찢어질 것처럼 보폭을 벌려 걷던 나를 멈춰 세운 건 또 그 점쟁이였다.
아까는 앉아만 있어서 몰랐는데, 나이트 가운 같은 걸 치렁치렁 걸친 그녀는 여전히 베일을 덮은 채였다.
이번엔 또 뭔 말을 하나 보자.
눈을 치뜬 채 잠자코 자리에 발을 붙였다.
코앞까지 차근히 걸어온 점쟁이가 내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신들이 당신의 길을 굽어살피시길.”
작게 기도한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모든 감각들이 지워졌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웅성거리는 소리들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오로지 내 손에 되돌려진 꼬깃꼬깃한 지폐 다섯 장.
그 버스럭함만 생경이 느껴졌을 뿐.
“이야…… 한 방 먹었네.”
진짜 후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한 입안을 혀로 쓸었다.
겨우겨우 이모아 사망 루트에서 벗어났다 싶었더니, 어리석구나.
너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세상이 손가락질한다.
이 몸뚱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다고.
과욕을 부리지 말라, 알려주지 못해 성화를 부리고 있다.
‘멍청한 놈들.’
그럼 윤채희 말고 운명에 곱게 순응하는 인간을 여기다 집어넣었어야지.
그럴수록 반골 기질이 샘솟는다는 걸 모르고.
“모아야…….”
하나가 팔을 흔들었다.
그제야 모든 스위치가 한 번에 켜진 것처럼 현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기죽은 모습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뒤집혔던 눈깔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
“괜찮아.”
하나의 손등을 달래듯 쥐었다.
“재밌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해이해진 윤채희의 정신을 빠짝 차리게 만들었으니.
***
“아이고.”
분진 가득한 바닥에 대충 엉덩이를 붙인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안전모를 벗었다.
이 일을 족히 몇십 년은 해왔는데 철근의 무거움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시큰거리는 허리를 두어 번 두드리고 있자.
“형님, 벌써 쉬시는 거야?”
장난기를 잔뜩 묻힌 목소리로 홍 씨가 물어왔다.
옆자리에 걸터앉는 모습이 뻔뻔했다.
“그럼 자네는 왜 옆에 앉아?”
“에이. 여기서 나 하는 일이 또 형님 말동무해드리는 거잖아.”
“입만 살아서는.”
타박하는 목소리에는 웃음밖에 없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대충 훔쳐냈다.
날이 추운데도 몸에서 나는 열기는 막을 길이 없다.
믹스 커피 두 잔을 후딱 타와 건네는 홍 씨가 투덜거렸다.
“남들은 다 한 해 마무리다, 뭐다 하는데. 우리는 끝까지 먼지만 먹는구만.”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어. 우리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한테는 일이 있는 게 고맙지, 뭘.”
맞는 말이었다.
마수들과 헌터들이 판치는 각성 시대에도 여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옆집 강 씨네 딸내미가 B+급 헌터 판정을 받아서 로또 맞았다더라.
마트 한 씨가 A급으로 각성해서 장사 접는다더라, 하는 말들은 민간인의 인생과 관련 없는 먼 이야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시대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 공사판엔 한가득했다.
“자기 몸만 한 걸 번쩍번쩍 드네, 그래.”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던 얼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40kg짜리 포대를 들어 옮기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체구가 보였다.
아무리 일용직이 사람 안 가려 받는다곤 하지만…….
홍 씨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각성자라고 하던데.”
“그래도 힘은 엇비슷할 거 아닌가.”
“아이고, 형님. 뭘 모르는 소리. 우리 같은 일반인은 D급한테 한 방 맞아도 이빨 다 나가요.”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건지, 뭔지.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가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가에 붙였다.
“학생!”
“아, 가만히 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왜 불러, 형님!”
홍 씨는 기겁했으나 이미 늦었다.
막 포대를 내려놓은 눈이 이쪽을 향했다.
“이쪽으로 와서 좀 쉬어. 요령껏 자기가 빼면서 해야지, 안 그럼 병나.”
“아, 네. 감사합니다.”
방진 마스크 위로 순진한 눈망울이 다가왔다.
***
‘진작 농땡이 칠걸.’
뜨끈한 녹차를 손에 들고 윤채희는 잠시 후회했다.
이놈의 습관이 문제였다.
뭐 하나 시작하면 1등이 될 때까지 멈추질 않으니까.
일정량만 채우면 되지, 포대 많이 쌓는다고 테트리스처럼 점수 주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가벼워서 그래.’
이건 나도 좀 놀랐다.
전체적인 등급이 올라서 그런가.
등치 큰 사람들도 끙끙대며 드는 포대가 그냥 한 권의 책처럼 느껴졌다.
번쩍번쩍 들어대면 등급 높은 각성자인 거 티 날까 봐(E급이라고 뻥쳤다) 일부러 천천히 걸어 다녔다.
참내.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학생은 맞고?”
자신을 김 씨 아저씨로 소개한 중년 남성이 스몰 톡을 시도했다.
여기 사람들은 내가 마스크를 벗어 재껴도 이모아인지 뭔지 관심도 없고,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옆에 앉은 홍도필은 나를 영 고까워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네, 학생이에요.”
나는 심심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척 봐도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어쩌다 힘쓰는 일로 왔어. 다른 몸 편한 일도 좀 있을 텐데.”
“형님, 뭘 그런 걸 물어. 연말에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 보면 몰라?”
쩐 때문이지.
그의 엄지와 검지가 동그랗게 맞붙었다.
촉새처럼 입을 놀리는 홍도필을 보며 코밑을 훔쳤다.
이해는 갔다.
아무리 E급, D급 각성자라도 비각성자와 유의미한 능력 차이는 존재하는 세상.
이 일을 업으로 삼는 그들에게는 나의 존재가 아니꼬울 것이다.
근데 어쩌겠냐. 나도 처지가 다른 사람이 아닌 것을.
“맞아요. 돈 때문에.”
근데 그 동그란 건 아니고.
‘벌어야 할 다이아가 있다고요.’
【MISSION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90,000 원을 얻으셨습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고귀한 땀의 값)】
【1,0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너네 집? 다 내가 지었어)】
【추가보상 1,5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
‘좋았쓰.’
몸과 마음이 돌돌 말린 개고생 일일 서브는 이제 끝이로구나!
힘차게 주먹을 쥐었다.
생각보다 많이 들어온 다이아 덕에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흰 봉투에 담긴 일당을 대충 인벤토리에 구겨 넣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래도 업적을 따려면 이틀에서 사흘은 더 걸리지 않겠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빨랐다.
얼른 집에 가서 맘 편히 남은 계획을 체크 해보고 싶었다.
그때.
“학생, 고생 많았어.”
김 씨 아저씨가 허둥지둥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원체 다정한 성격인지, 내가 어려 보여서 그런 건지, 말을 튼 뒤에는 요 며칠 내내 나를 살뜰하게 챙겼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를 졸졸 쫓아다니던 홍도필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감사했어요.”
“내가 뭘 한 게 있어. 이 근방에 전봇대가 많이 없어서 위험하니까, 역까지만 같이 가자구.”
그거 때문에 다급하게 달려왔나. 따지고 들자면 나보다 아저씨가 더 위험에 처할 일이 많을 거 같은데.
하지만 군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저씨의 말 그대로 골목은 침침했다.
“내일 새해인데 가족들이랑 보내나?”
스몰 톡의 달인답게 툭, 그가 물었다.
“아뇨. 아마 다들 일 때문에 바쁠 것 같고, 저도 할 게 좀 있어서요.”
“그래도 뭐라도 계획이 있어 다행이네.”
김 씨 아저씨는 안심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고는 역에 다다를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심히 가게.”
그는 입구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지하철 타고 가시는 거 아니고요?”
“응? 아냐, 아냐. 홍 씨랑 한잔하기로 해서 얼른 가봐야 해. 화장실 다녀온다고 거짓말하고 나왔거든.”
아저씨는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가봐야 한다고 내뱉는 말과 다르게, 발걸음이 망설이듯 움찔거렸다.
왜 저러지? 잠자코 기다려주자 목덜미를 벅벅 쓸어내린 그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홍 씨가 좀 무례하게 굴었지. 내가 대신 사과하네.”
그 말이 뭐라고.
김 씨 아저씨는 횡설수설 덧붙였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인데, 알잖나. 뭐라도 원망하지 않으면 살아갈 힘이 없는 사람들이…….”
아이고, 내가 학생한테 무슨 소리를.
내 얼뜬 반응에 책망하는 목소리가 꼬리에 이어졌다.
새해 잘 보내고.
서둘러 떠나려는 팔목을 무의식적으로 붙잡은 건 그다음이었다.
그가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뒤돌았다.
“왜 그러는가?”
그러게. 내가 왜.
마주치는 시선이 흔들렸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손을 뻗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안 싫어해요. 그런 사람들.”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변명하듯 재채기처럼 튀어나왔다.
랭킹 1위. 어디의 대표.
하루가 다르게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움직임 하나도 주목받는 것과는 달리, 가장 평범하고 보통인 삶.
다이아를 벌기 위해 서브 미션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느낌이었다.
거창하진 않아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약삭빠른 방법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살기 위해 용을 쓰면서도 자신들의 손으로 일궈낸 올바름을 믿는 사람들.
그런 모습들은 ‘진짜’ 윤채희의 삶을 겹쳐 보이게 만들었다.
울컥 분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멍청하고 갑갑했다.
이딴 세상에 정직한 게 뭐가 좋다고.
남들처럼 적당히 지름길로 가는 게 뭐가 그렇게 나쁘다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결코 미워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내 문제였다.
인벤토리를 뒤져 낡은 전단지 한 장을 꺼내 찢었다.
버리기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던 건데 잘 된 셈이었다.
뒷장의 하얀 쪽에다 11자짜리 전화번호를 휘갈겨 건넸다.
“나중에 무슨 일 생기시면 연락 주세요.”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달리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한숨이 입김이 되어 피어올랐다.
“세상에 왜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많은 거냐…….”
바보처럼.
자꾸만 돌아보게 되게.
“아주 일을 벌이는구나, 윤채희.”
자조하기도 했으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열두 달의 마지막 인연이 지나가고 있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