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3
14화
녹진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힘쓰는 일 좀 했다고 뻐근한 척하는 어깨를 두드리며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달칵.
문이 열리고, 그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어둡다.’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는 캄캄한 집안이 잠시 낯설게 느껴졌다.
어느새 불 켜진 집과 마중 나오는 온기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처럼.
“뭔 청승이냐…….”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묘한 한기를 떨치기 위해 씩씩하게 걸어가 사방팔방 불을 켰지만, 오늘따라 이 집이 유독 크고 썰렁해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적막함에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손은 자연스레 TV 리모컨으로 향했다.
『…… 제 곧 새로운 해가 밝아올 시간이 삼십 분도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예상치 못한, 가슴 아픈 일들로 마지막까지 국민 여러분들의 상심이 크셨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렇지만 다음 해에는 올해보다 더 안전하고 행복한…….』
턱을 괴고 무심하게 화면을 쳐다봤다.
TV 속에는 나도 익히 잘 아는 제야의 종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상설 무대 앞에 파도처럼 끝도 없이 앉아 있는 참석자들은 꼭 레고처럼 보였다.
그중에는 이겸과 주서윤, 기타 화랑 간부진들도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같이 갈 거냐 묻던 이겸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에엥? 내가 거길 왜 가?’」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추운 데서 몇 시간씩 리액션 로봇 취급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요.’」
원래 이모아는 따라갔었나?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다이아를 얻기 위해 뛰어다닐 계획 때문임도 있었고, 그냥 추운 게 싫은 이유도 있었다.
이겸은 몸까지 떨며 질색하는 날 보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평소 때보다 조금 더 늦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고.
“아.”
그 순간 이겸이 카메라에 잡혔다.
무어라 말하고 있는 사회자를 진득하게 응시하는 무표정의 얼굴.
웃지 않는 그의 모습은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겸은 거의 저런 모습이었다.
“……카메라빨 쥑이게 잘 받네.”
이목구비의 선을 따라 그리다 무의식적으로 감탄했다.
누가 그랬는데. 카메라로 찍으면 완전 빵떡 같이 나온다고. TV보다 실물로 보는 게 몇백 배는 낫다고.
근데 이겸은.
‘잘생겼어.’
내 최애캐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다.
진짜다.
같이 지낸 지가 꽤 돼서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불쑥불쑥 얼굴이 가까워지면 놀랄 때가 있었다.
아. 화면이 넘어갔다.
한 명도 빠짐없이 검은 정장을 빼입은 무리들이 바글바글했다.
사이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몇 더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나의 시선을 잡아끈 건.
‘……꽃.’
모두의 앞주머니에 작게 꽂힌 국화였다.
이번 연말의 마지막 행사는 추모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고 했다.
너도 가냐고 묻는 내게.
「‘원래는 해봤자 길드 마스터, 부마스터지 간부진들까지 다 부르는 경우는 없는 데…….’」
하고 구서복이 설명을 흐린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추모식.
엄숙하고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체감이 확 되네.’
정말 이상하게 그랬다.
사실, 연말이고 뭐고 크게 실감이 나질 않았었다.
요즘 내 정신은 모조리 업적과 다이아로 쏠려 있어서 요일을 세는 단위마저 바뀌어 있었다.
월요일은 신문, 화요일에는 음료수, 수요일은 공사장 미션.
이런 식으로.
근데 연말 행사랍시고.
이번 년도를 정리한답시고 정장 입고 앉은 사람들을 보자니 갑자기 진짜 한 해가 끝나는 구나가 확 느껴졌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명치께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계절을 느낄 새도 없이, 이곳에서 지냈던 몇 달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로 지나가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의 하루가 정말 내 세계에서도 하루라면.
거기서도 나 없는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만하자. 정신 차리자, 윤채희!”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생각의 굴레를 끊기 위해 볼을 따갑게 짝짝 때렸다.
최근에 흔들리는 마음이 아주 난리였다.
답이 없는 상황을 내내 떠올리는 건 지금의 나에게 독이었다.
한창 의식적으로 잊고 살려고 노력할 때는 좀 괜찮았는데, 또 감춰둔 마음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항상 달력에 표시된 빨간 날이 문제였다.
꼭 행복해야 될 것 같은 날들.
특별한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은 날들이.
이놈의 기념일이란 것 때문에.
“야식이나 배 터지게 먹어 보자고.”
괜히 그런 핑계를 대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곧 새해를 앞둔 거리는 인적 없이 한산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앉은 편의점 알바생은 내가 들어가도 관심이 없었다.
입만 기계적으로 인사할 뿐 시선은 세워놓은 작은 패드에 꽂혀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아까 내가 켜놓고 왔던 그 제야의 종 방송이었다.
‘새해라.’
컵라면 매대 앞에서 잠깐 떠올렸다.
나의 새해 시작은 대부분 게임 이벤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끔 ‘저도 해돋이 봤슴다ㅋ’하는 장난으로 동트는 그래픽 배경을 찍어 올리는 게 다였다.
그러다 일어나서 엄마 집으로 떡국 한 그릇 얻어먹으러 간다던가.
‘그러고 보면 애카에서도 이벤트 많이 했었는데.’
여타 게임들처럼 새해맞이 NPC들한테 덕담을 전해주면 아이템을 얻는다거나.
마수들 때려잡고 떡국 재료를 가져오는 식이었다.
형식은 대충 비슷해도, 매해 조금씩 달라지는 이벤트 내용이 꽤 쏠쏠했었다.
근데 뭐.
‘그건 말 그대로 이벤트지 시스템상에 있는 게 아니니까.’
현실처럼 별일 없이 지나가지 않겠나,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컵라면과 삼각 김밥.
먹고 싶은 주전부리를 한가득 품에 안고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바코드 찍히는 소리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동안 시선은 알바생의 패드로 쏠렸다.
여전히 코끝이 빨간 사회자가 말하고 있었다.
『네, 이제 더 나은 세상. 눈부신 새해가 다가올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이 분 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이해운 총장님의 축사도 들어봤으니,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 랭킹 1등의 주인공, 이겸 씨도 한 번 인터뷰를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괜찮으실까요?』
『…… 예.』
“봉투 필요하세요?”
“아, 네.”
『화랑 길드의 마스터 이겸입니다. 여러분들이 전해주시는 응원과 걱정, 전부 마음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안전하고 평안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저희 모두 노력하겠습니다.』
『네. 또 국민 여러분들을 향한 존경을 담아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 해주셨는데요.』
“2만 5800원이요.”
“잠시만요.”
『아, 이제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모든 여러분, 올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10! 9! 8! 7!』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감사…….”
합니다.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귀 옆으로 퍼버벙, 폭죽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라도 할까 했던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휘황찬란한 문구가 눈 앞을 가렸다.
후두둑.
끌어안았던 검은 비닐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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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 HAPPY NEW YEAR!
― 분류 : 이벤트
― 남은 시간 : 1시간 59분 59초
근원 장소를 찾아 포탈의 폭주를 막으세요.
올해도 살아남은 여러분께, 행운을 전하며.
#수신 ― 조건에 해당되는 모든 각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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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 첫 번째 힌트
― 분류 : 이벤트
*지역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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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세요?”
알바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얼빠진 나를 대신해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 담으려 하기에 재빨리 손을 내젓고 쭈그려 앉았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싹싹 담은 물건들을 챙겨 헐레벌떡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새까만 하늘 정중앙에는 누가 어디에 있든, 고개만 들면 모두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파란 오오라의 차원이 열려 있었다.
마치 달이 두 개 뜬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귓가로 사회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지금 막 새해 이벤트 차원이 열렸습니다. 마스터 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신데요.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집에서 가족분들과 안전하게 몸을 지키시고. 또 이벤트에 참여하시는 각성자분들 께서는 특히나 몸을 조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포탈 폭주를 막으라는 미션은 역시나 전에 없었던 케이스로…….』
“허.”
헛숨을 내뱉었다.
잠시나마 싱숭생숭한 감상에 빠져 있던 나를 시스템이 비웃는 느낌이었다.
여기는 그래.
네가 보통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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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 새해 이벤트에서 공적치 차지하기.
― 분류 : 돌발
80% 이상 – 30,000 다이아
50% 이상 – 10,000 다이아
10% 이상 – 1,000 다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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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죽을힘을 다해 굴러보라고.
“쉽지가 않아.”
허공에 속삭였다.
‘3만 다이아.’
그게 있으면 계림사를 갈 비용도 모두 충족되고, 약 열흘 이상을 허비해야 할 서브 미션 시간도 축약시킬 수 있었다.
내가 바라던 대로 큰 거.
타이밍 좋게 큰 게 하나 떨어져서 감사하긴 한데…….
‘영 놀아나는 기분이어야지.’
새해 이벤트로 다이아를 준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건 마치 랭선전처럼 나의 참여를 꾀어내는 시스템의 수작과도 같았다.
재빨리 검색해보니 이 세계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새해 이벤트는 매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굳이 힘을 얹지 않아도 모여 있던 길드장들이 잘 처리할 그림.
근데.
‘먹으라고 냅둔 떡을 보고만 있을 일이 있나.’
주전부리를 대충 편의점 옆, 구석탱이에 숨겼다.
이따가 데리러 올게.
사람 대하듯이 볼록 튀어나온 옆구리를 툭툭 두들겨줬다.
헐거워진 신발끈을 한 번 꽉 묶었다.
대체 시스템이 아직 날 뭘로 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99%.
“가볍게 찍어준다, 내가.”
뎅―. 뎅―.
묵직한 제야의 종소리가 세상을 은은하게 울렸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