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7
18화
“아저씨?”
“여기요! 여기!”
분명 날 뜯어말리던 사냥꾼 중 하나의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가 닿자 마지막 희망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더더욱 절박한 비명이 이어졌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비탈길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계속 위치 알려주세요!”
아슬아슬한 경사에 서서 겨우 나무뿌리를 붙잡고 버텼다.
오로지 청각과 육감을 의지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치고 다가가야 했다.
내 외침에 그는 반복적으로 ‘여기입니다. 이쪽이에요.’ 신호를 보냈다.
구슬프게 우는 목소리가 이제 코앞까지 가까워져 왔다.
창대를 들어 작게 속삭였다.
“정화.”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닿는 공기 주변이 흐릿하게 밝아졌다.
그래봤자 겨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은 정도였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발밑을 비추며 나무 틈바구니로 몸을 기울였다.
“아이고, 드디어…….”
우는 소리가 답했다.
목청 터져라 소리치지 않아도 답이 돌아온다는 게 방증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 중얼대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아저씨 혼자예요? 아님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스산한 바람이 부는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곧장 서러운 목소리가 받아쳤다.
“예, 예에. 저 혼잡니다. 범이랑 싸우던 도중에 낭떠러지로 굴렀지 뭡니까.”
“저런. 어디 많이 다치셨어요? 다리 정도는 부러지셨겠는데.”
“그것뿐이겠습니까. 몸 곳곳은 조각난 것 같지, 어디 연락할 부싯돌도 없지. 이러다 산짐승한테 물려 죽는 거 아닌가 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마침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아가씨가 부르는 소리 듣고 어찌나 안도가 되던지.”
콰득.
연약한 잔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오호라.”
그러셨단 말이지.
반쯤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덤불을 가르는 발길을 빨리했다.
목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나뭇가지나 돌덩이처럼 자연의 형태같이 보이지 않는, 어스름한 그림자가 오뚜기처럼 휘청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인근까지 다가가 창을 붙잡은 손을 한 번 들척였다.
긴장감에 뻣뻣이 굳은 어깨도 한 번 돌려주고.
“저 이제 대충 보이시죠?”
“어어. 보이네, 그려. 여기예요, 여기.”
친절히 팔까지 흔들어주는 인영에 위치를 잡기가 더 쉬웠다.
그럼, 준비하시고.
‘그레이스.’
쏘세요.
콰아아아아앙!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먼 곳에 터트린 폭발 덕분에 몰아친 폭풍의 여파도 썩 견딜 만했다.
지지직.
지면에 박힌 창 위로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봤다.
‘괴물 같은 형체를.’
섬광 속에 파묻힌 그림자는 꼭 머리카락이 발끝까지 덮여 있는 사람의 머리통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이라기엔 분명한 짐승의 골격.
살갗을 뚫고 존재하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들.
으르르릉.
그제야 이를 가는 호랑이 요괴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아챘지?”
말하는 목소리는 여성의 것도, 남성의 것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여러 목소리가 겹쳐 서너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말을 내 귀에 대고 중얼거리는 기분.
오싹할 정도로 괴이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뭔 아가씨야. 여기 아저씨들은 싹 다 고정관념에 틀어박혀서 얘 얼굴 마주 보고도 도련님이라 그랬거든?”
나에게는 호환보다 두려운 게 있다.
느릿한 손길로 창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인간의 등 사이즈로 구겨져 있던 호랑이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부푸는 게 보였다.
나무와 맞먹는 덩치가 짙은 어둠을 만들어냈다.
아.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한 가지 더.
“그 목소리들은 잡아먹었나?”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아하! 아하하하!”
내 질문에 요괴 놈은 웃기 시작했다.
장산범의 목젖이 떨릴 때마다 어디선가 축축이 젖은 바람이 불어왔다.
웃음소리는 밝은 여자 같다가도 중저음의 중년 남성 소리.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로 둔갑했다.
놈은 나긋이 답했다.
“어찌나 비명만 지르던지 목소리를 흉내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지.”
그것으로 사태파악은 끝이었다.
뒤이어 쉰 목소리가 저주하듯 울부짖었다.
“네 그 멍청한 선택 덕분에 다음은 너의 소중한 사람들이 목표가 될 것이다.”
둥근 창살 끝을 매만지던 나는 그것만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글쎄.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일단 여기서 네가 빠져나갈 수 있다면 생각해볼 문제지만 말이야.
채앵!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어떤 딱딱한 외피와 창이 부딪쳤다.
창대가 붙잡혀 딸려간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았다.
평소 같았으면 무기고 뭐고 일단 내팽개쳤을 텐데.
‘얘는 도저히 주먹으로 안 될 거 같다고!’
생명줄처럼 붙잡은 덕분에 함께 지표면에 처박혔다.
땅에서 튕겨 오른 등이 돌 파편에 찧이길 몇 번.
빠드드득.
장산범이 짓밟은 어깨에서 뼈가 탈구되는 소리가 났다.
컥. 물리적인 고통에 숨이 틀어 막혔다.
불타오르는 안광이 코앞에서 번들거렸다.
그 얼굴은 마치 피카소의 그림처럼 여러 조각의 이목구비를 기워놓은 것 같았다.
한마디로.
‘×나 징그럽다.’
“큰소리 친 것 치고는 별것 없는 인간이구나.”
송곳니밖에 존재하지 않는 아가리가 쩌억 벌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조준도 잘 못 할 거.
‘근딜로 직종 변경이다.’
아직!
손아귀로 가냘픈 창대를 부러뜨렸다.
붙잡힌 어깨 쪽으로 굴러 순식간에 이제는 더 이상 창도 아니게 된 무기를 쥐었다.
꺾인 부분의 파편이 손바닥을 긁었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달려드는 장산범의 대가리를 피해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뒤질 만큼 아파봐라.”
놈의 눈알에 창을 박아 넣었다.
파아앗!
세상을 새하얗게 날릴 만큼 눈부신 섬광이 터지고, 이내.
철퍽.
빛을 잃은 유리체가 끈적이는 젤리처럼 쏟아졌다.
그레이스의 피격을 고스란히 삼킨 장산범의 살갗 아래가 불룩,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놈이 고통을 곱씹으며 잠시 반경을 벌리는 사이.
‘단발 된 거 아니야, 이거?’
나는 뜯겨나간 포니테일 끝을 매만졌다.
장산범이 내 머리통을 날리는 대신 조준을 실패해 찢긴 머리카락이 까슬거렸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물물교환이었다.
“네놈……!”
한쪽 안광밖에 남지 않은 장산범이 포효했다.
요괴의 눈가에서는 피가 눈물 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야, 이거 되는 거 맞음?”
중얼거리며 이제는 그냥 막대기가 된 나머지 반쪽.
부러진 창대를 휘둘렀다.
다행히 흰빛이 감싸지는 걸 보니 아직까지는 마력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 어떻게 써먹어야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기가 범벅돼 아까의 기세보다 위압적인 안광을 마주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았다.
어석. 어석.
놈이 나를 짓이기는 것처럼 꿰뚫어 보며 물어 뜯어간 머리칼을 씹어 삼켰다.
뭐 하는 거지? 생각하기도 전에.
“호오.”
흥미롭다는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그리고는.
“모아야.”
부드러운 이겸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순간 등골을 탄 소름이 머리끝까지 끼쳤다.
‘머리카락밖에 안 먹었는데 저게 가능하다고?’
신체 일부의 기억을 읽기라도 하는 건가.
바싹 마른 목 뒤로 침을 삼켰다.
마수의 입에서 내가 아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건 가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특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캄캄한 공간에서는 더더욱.
“우리 돌아가자.”
이겸의 목소리가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는 곳으로 가자. 내가 도와줄게. 이리와…… 이리와, 모아야.”
속이 메슥거렸다.
오감이라는 건 이렇게 속기 쉽게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감각이 혼재되는 불쾌한 기분.
“개소리 그만하고 덤비지?”
주위를 경계하며 소리쳤다.
집중하면 홀린다.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산범은 나를 농락하다 죽이기로 작전을 바꿨는지, 계속 빙글빙글 주위를 맴돌며 지껄여댔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에는 주서윤의 목소리였다.
“혼자서 무리할 필요 없어. 언제나 네 곁에는 우리가 있다는 걸 잊지 마, 모아야. 그러니까 같이 가자.”
“아가씨, 제가 지켜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넌 너무 고민이 많아서 문제라니까. 다 여기 있어. 이리와, 얼른.”
구서복과 권해이의 목소리 역시 이모아를 부르고 있다.
콰앙! 콰아아아앙!
난사한 스킬들이 나무 사이로 솟구쳤다.
날뛰는 그림자와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은 여전히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모아야. 모아야.
머리 꼭대기에서 맴돌며 모두가 그 이름을 불러댔다.
“노이로제 걸리겠네, 콱씨.”
나는 어둠 속으로 달려들었다.
숨길 수 없는 노란 안광만이 유일한 지표였다.
내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치켜든 놈의 손톱이 옆구리를 북 찢고 지나갔다.
불에 덴 것 같은 작열감이 몸을 꿰뚫었지만 이 정도는 각오한 바였다.
집히는 게 있다면 모조리 놓지 말아야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장산범의 털을 뜯어낼 듯이 붙잡고 안면을 향해 조준했다.
“그레이스!!”
빠아아악!
가격한 스킬이 놈의 얼굴을 깨트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나 역시 후폭풍에 떠밀렸지만, 전처럼 허둥대는 꼴은 보이지 않았다.
츠츠측. 똑바로 균형을 잡은 뒷발에 의해 흙이 밀려났다.
그러나.
‘쉴 틈은 없다.’
이로 뚜껑 딴 체력 물약을 옆구리에 부으며 달렸다.
더 이상 놈이 날 가지고 놀게 둘 수 없었다.
차오르는 살갗이 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뜨겁다. 아팠다.
하지만 움직여야만 한다.
장산범 역시 꽤나 데미지를 입었는지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안광 쪽으로 다시 몸을 날리던 순간.
“채희야.”
‘내’ 이름이 불렸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그 찰나의 망설임을 눈치챈 장산범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지만 뒤따라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아아아.
습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채희야.”
아스라이 들리는 목소리.
그건.
‘……엄마.’
엄마의 목소리였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