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41
131화
녹색 숫자는 내가 확인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제 남은 것은 피처럼 붉은 하늘과 새까맣게 탄 검붉은 땅.
곳곳에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샛노란 용암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가끔 들썩이는 갈라진 지면뿐.
머리 위로 탄내 나는 구름이 회오리쳤다.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바짝 마른 땅 위는 황폐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호흡하는 것만으로 목구멍을 후려치는 뜨겁고 매캐한 연기에 몇 번 잔기침을 뱉었다.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드넓은 용암 지대.
광포한 불길들이 창공마저 집어삼키는 광경은 한 폭의 지옥도처럼 보였다.
평범한 인식으로는 그럴 리가 없는데도, 나는 틀림없이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게나.’
이곳은 윤산영이 윤산영이기 이전의 세계.
그러니까, 리오의 세계였다.
종종 오프닝에서나 그의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짤막하게 비치던 공간.
남들이 본다면 건질 것 하나 없는 불모지지만, 리오에게 만큼은 끝내 죽어도 지키고 싶었던 차원.
‘그럼 지금 리오의 과거 기억 속으로 들어온 건가?’
생각하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생채기들이 흉처럼 남아 있지만, 여전히 고운 손.
잡히는 얼굴의 윤곽이나 어깨로 흘러내리는 칠흑같은 머리칼까지.
나는 여전히 이모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잖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몇 번 앉았다, 일어나고 팔을 털어댔다.
이모아의 기억을 들여다 볼 때에도, 이겸 때도, 한미래 때에도 그랬듯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들어가는 건 단순히 그 과거의 편린을 ‘관람’하는 것.
이미 지나간.
정해져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가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과거의 이모아가 이렇게 가면 이렇게 가는 거고.
누구한테 맞으면 고스란히 4D로 고통까지 즐기는 거고.
그 순간에 이입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체험에 불과했다.
따져보자면, 내가 방금 전까지 있던 상영실에서 보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자의로 움직일 수 있다니.’
원하는 곳으로 향하고, 말도 할 수 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이글거리는 열기에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점점 후텁지근하게 목을 졸라오는 열기에 옷 끄트머리를 잡고 펄럭였다.
어쨌든 꿈이라면 깨야 했고, 최종 보스 놈이 부린 환상이라면 깨부숴야 했다.
그리고 만약, 이게 진짜 리오의 기억 속이라면…….
‘만날 수도 있으니까.’
겹겹이 쌓인 암석 위로 발을 내디뎠다.
울퉁불퉁한 돌들 위로 얼마나 걸었을까.
맺힌 땀들이 턱 가를 따라 똑. 똑. 떨어지고, 걸치고 있던 웃옷들은 죄다 팔에 걸려 있었다.
가도 가도 보이는 건 붉고 검은 용암들뿐.
가끔 꽈앙! 울리는 폭음과 함께 흩날리는 분출물들만이 이 대지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인간이 쉽게 살아남지 못하는 환경이라는 건 이해가 가는데, 알겠는데, 근데…….
‘마수조차 없다.’
이 새빨간 세계에는 생명을 가진 실재 자체가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이곳이 진짜 게나인지 조차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별반 아는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리오의 세계에는 분명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구멍 난 돌들 사이에 숨어 살았고, 배가 고프면 기어 나와 유황을 갉아먹고 살았다.
가끔 죽은 마수의 시체를 구워 먹는 게 그들의 특식이었다.
시뻘건 용암이 머리 꼭대기부터 흘러 내려와도.
흉측한 마수의 손길에 팔다리를 잃어도, 그들은 밤만 되면 살아남은 살들을 붙여 끌어안고 보듬었다.
서로의 얼굴에 묻은 검댕이를 닦아주며 웃었다.
그게 게나 주민들의 숨 쉬는 방식이었다.
리오가 구하고 싶은 세계였다.
그런데, 이곳은…….
“없잖아, 아무것도.”
공허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문득 되돌아오는 답 대신 부글거리는 용암 소리가.
끼익, 끼기긱…….
움직이는 지면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니 온몸이 오싹해져 왔다.
드넓은 검은 땅은 끝나지 않을 무한처럼 느껴지고, 붉은 하늘이 점점 낮아져 곧 머리를 짓누를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 내가 아직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황급히 미션 창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눈부셔.’
발밑의 암석이 반짝거렸다.
그건 마치 애카에서 중요한 미션 증거물이 주변에 있음을 알릴 때, 반짝이는 효과와도 같았다.
나를 놀리는 것처럼 뻔했다.
나는 네게 이런 짓까지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 옮겨 바싹 말라 죽을 때까지 감상만 할 수도 있다, 창조자의 권위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또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를 없게 만드네, 자꾸.”
다른 방법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뚫린 길에 휘둘리는 기분이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목숨이 아홉 개쯤 있다면 용암에 콱 빠져보기라도 했을 텐데, 목숨은커녕 1분 1초도 아까운 윤채희는 결국 돌 위로 손을 얹었다.
만나기만 해봐라, 이 새끼야.
작은 읊조림은 되삼킨 채로.
화아아악!
강한 바람이 불며 공간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아니, 녹아내렸다기보단, 어쩌면 불에 던진 사진처럼 곳곳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새빨간 하늘에 페이지가 찢긴 것처럼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타들어 간 배경 뒤에도 검붉은 하늘은 여전했다.
메마른 땅, 용암, 유황.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단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창조자.’
녀석이 피칠갑한 하늘 중앙에 떠 있었다.
창공에 박힌 거대한 눈알은 세계 이곳저곳을 바라보듯 도륵대며 굴러갔다.
창조자의 눈 주위로 푸른 오오라가 넘실거렸고, 하늘을 찢어낸 균열은 더 넓은 지배를 받아들이듯 점점 더 범위를 넓혀갔다.
그건 태초부터 붉은 하늘밖에 모르던 게나의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 공포를 미처 되새김질하기도 전에.
툭.
투둑.
잘린 머리들이 용암 위로 떨어져 순식간에 형체를 감췄다.
창조자를 따라 열린 세계의 금에서 마수들이 운석처럼 떨어졌다.
혜성처럼 하늘에 빛나는 꼬리를 남긴 괴물들은 리오의 세계를 단숨에 무너트리기엔 충분했다.
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도륙하고, 삼켜댔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광경 한가운데에 리오가 서 있었다.
귀가 잘리고, 발가락을 잃고, 서로를 보듬은 손마저 잃은 가족들을 등 뒤에 숨기고, 눈물에 흠뻑 젖은 어린 리오는 비명을 질렀다.
「“구해줘요!!”」
이게, 내가 알고 있던 리오의 과거 전부.
「“어떻게 죽여도 좋으니까 우리 가족들은 살려줘요. 나를 죽여요. 나만 죽이라고요! 살려줘요, 우리를!!”」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악으로 바들거리는 어린 등이 노란 눈동자에게 소리쳤다.
이 죄악을 불러들인 자에게 살려 달라, 구해 달라 빌었다.
그러나 마수들은 소란이 나는 리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의 마수들이 한 사람을 향해 반구의 형태로 몰려들었다.
리오는 후들거리는 다리로도 가족들을 지키고 선 등을 물리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보이지 않게 된 눈으로 더듬더듬 자신의 발목을 붙잡아도.
하반신을 잃은 그의 아버지가 너라도 도망쳐라, 도망쳐라, 울부짖어도.
들리지 않는 동생이 뻐끔뻐끔 ‘형’ 그를 불러도, 리오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핏발 선 눈으로 창조자를 노려보았다.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얇고 긴 동공으로 사그라지는 세계를 둘러보는 창조자의 눈알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쏘아보았다.
마수들은 점점 리오에게 가까워졌다.
달리는 발자국에 지면이 흔들리고, 무언가 녹는 소리.
죽는 자의 비명.
비릿함과 탄내가 섞인 기이한 향들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온다.’
리오의 턱 끝으로 마수의 송곳 같은 침이 맞닿았을 때.
도로로록.
굴러가던 창조자의 동공이 한 곳에 멈추었다.
『“나와 계약 하겠느냐?”』
단 한 번의 눈 깜빡임은 접근하는 마수들을 잿가루로 날렸다.
먼지처럼 흩날리는 위협들 사이로, 저 밖 존재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힘이 풀린 리오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족들을 끌어안았다.
그 위로 창조자의 오오라와 닮은 푸른빛이 맞닿았다.
그러나, 오로지 리오만을 비추는 그 조명은 다른 자비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의 뺨을 한 번씩 쓰다듬은 아이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으로 웃었다.
「“네.”」
파아아앗!
세상을 뒤덮는 밝은 빛이 시야를 멀게 함과 동시에, 창조자와 리오는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내가 아는 리오의 과거는 이게 전부였다.
이 다음은 지구에 도착한 리오가 포탈 채널을 연결시키고, 광화문 참사가 일어난 시점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는다.’
남겨진 리오의 가족들과 나는 아직도 이곳에 서 있었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평소와 같은 붉은 하늘만 존재했을 뿐.
게나를 덮친 노란 눈의 재앙도, 태어나 처음 보는 푸른색의 빛도, 리오도 없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리오가 서 있던 자리를 더듬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땅을 긁어내 파보기도, 팔로 기어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아이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아아아아.
목을 긁어대며 우는 소리가 서럽게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의 우는 소리와도 같았다.
아무것도 깎이지 않은 고통.
그 자체를 토해내며 리오의 가족들은 부르짖고 있었다.
그건 나조차도 듣기 힘든 울음소리였다.
너무 끔찍하고 괴로워서, 차라리 감각을 차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순간.
파악!
무언가가 내리꽂히는 폭음과 함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보글보글.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용암이 끓는 소리만 들리는 사위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번쩍. 두려움에 눈을 떴을 때에는.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푸른 기둥이 지표면에 세 개 서 있었다.
그건 리오 가족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살아남은 모든 것들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황폐한 게나의 땅 위로 푸른 가시들이 돋아나는 순간.
쿠구구구궁.
땅이 갈라지며 부글대는 용암들이 그들의 시체를 삼켜냈다.
이제 다시 게나에는 어떤 특이한 색도 남지 않았다.
샛노란 용암과 검붉은 하늘, 새까만 땅 빼고는.
열기 섞인 훈풍이 불었다.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