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8
5. 외전 사랑받는 여주랍니다
환한 빛 속에 싸인 아기를 향해 어머니가 처음 내뱉은 말은 ‘아아, 성녀님!’이었다.
에스텔은 태어난 순간부터 ‘성녀’였다.
몇 년 후, 몸이 약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어린 에스텔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
“에스텔, 너는 신께 선택을 받은 성녀란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렴.”
어린 에스텔은 엉엉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은 죽은 어머니의 말을 잘 따랐다.
사람들에게 늘 웃어 주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는 신의 힘으로 치료해 주었다.
마음이 아파 힘들어하는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독여 주기도 했다.
에스텔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웃었다.
“정말이지 외양도 내면도 아름다우신 분이에요.”
“그럼요. 신께 선택받은 분인걸요.”
에스텔은 그 말을 듣고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칭찬이 좋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지.’
에스텔은 몰랐다.
그들의 칭찬은 사실 어린 에스텔에게 그 어떤 말보다 잔혹한 족쇄가 되고 있음을.
그녀가 처음 그 칭찬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것은 14살이 되었을 때였다.
* * *
“연회장에 꼭 가야 하나요?”
에스텔의 말에 그녀를 보살피는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님께서 늘 말씀하셨잖아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황족과 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요.”
“하지만…….”
에스텔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제는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누군가는 빵 한 조각이 없어 굶고 있는 이 시기에 화려한 연회장에 가시는 게 불편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들도 에스텔 님의 가호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랍니다. 너무 편견을 가지지 말고 대해 주세요.”
“…….”
에스텔은 사제에게 연회장에 가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속세에 관여하지 않는 사제는 귀족들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신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제가 아닌 에스텔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몰랐다.
연회장에서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를.
초라한 드레스를 입은 에스텔이 등장하는 순간 많은 이들이 부채 뒤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또 저런 복장으로 왔네.”
“화려한 것은 죄악으로 치부하는 이들이 준비해 줬으니 뻔하지.”
아무리 성녀라 해도, 평민에 보호자도 없는 어린 소녀는 귀족들이 무시하기 딱 좋은 존재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못 들은 척하고 웃어.’
에스텔은 필사적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숨겼다.
물론 14살의 소녀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 앞에서도 꿋꿋이 버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환하게 맞아 주는 이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봉사하러 다니시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인 백작 부부가 환한 얼굴로 에스텔을 맞이했다. 그들은 독실한 신자로 교단에 매해 엄청난 돈을 기부하는 이들이었다.
동시에 에스텔의 엄청난 팬이기도 했다.
“저야말로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줍게 인사를 한 에스텔의 시선이 백작 부부 사이에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나탈리.
에스텔보다 두 살 어린 백작 부부의 딸이었다.
몸이 약한 나탈리는 몇 해 전 심한 폐렴에 걸려 죽을 뻔했는데 에스텔의 힘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 후 나탈리는 에스텔을 친동생처럼 따랐다.
“성녀님이 제 생일 파티에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친구들에게도 성녀님이 온다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몰라요.”
나탈리의 말에 에스텔은 심장이 몽글몽글 간지러워졌다.
평민이면서 성녀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에스텔은 귀족 영애들과의 사이가 영 어색했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는 에스텔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탈리는 늘 에스텔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나탈리는 에스텔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정원에 새로 만든 연못은 보셨나요?”
“아직 보지 못했어요.”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생일을 맞이해서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만들어 주신 건데, 연못을 꾸민 새하얀 돌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서 정말 예쁘답니다.”
주저 없이 팔짱을 끼는 나탈리의 행동에 에스텔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기분 좋다.’
나탈리가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댈 뿐이었는데, 에스텔은 다른 연회 때와 달리 오늘이 무척 즐겁다고 생각했다.
“이 드레스는 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거예요.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루이뷔롱 숍에서 맞춘 드레스랍니다. 리본이 무려 300개나 달려 있어요. 어때요?”
“정말 예뻐요.”
“성녀님의 드레스는 어느 숍에서 맞추신 건가요?”
드레스에 관한 질문에 어깨가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에스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초라한 드레스를 부끄러워하기엔 이미 철이 들어 있었다.
“따로 맞춘 것은 아니고, 사제님께서 선물해 주신 드레스랍니다.”
“아, 그렇구나.”
나탈리는 몰랐던 사실을 안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참새처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참,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선물로 토란토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과자를 보내 주셨어요. 벌꿀이 듬뿍 들어간 과자랍니다. 친한 친구들과 모여 제 방에서 같이 먹으려고 하셨는데, 성녀님도 함께 드시겠어요?”
에스텔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정식 사제는 아니었으나 교단의 교리를 따르는 신자였다. 교단에서는 설탕이 듬뿍 들어간 달콤한 과자 같은 사치스러운 음식을 금했다.
그래서 그런 달콤한 음식을 먹은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꿀이 듬뿍 든 과자…….’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침이 차올랐다.
한껏 기대감에 부푼 나탈리의 얼굴을 보니 오늘만큼은 엄격한 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따스한 햇볕 아래 그녀와 수다를 떨며 과자를 먹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잠시 후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에스텔의 답에 나탈리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성녀님과 같이 가면 친구들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다들 성녀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 말에 에스텔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두 눈을 반짝이는 나탈리의 얼굴은 조금도 거짓말 같지 않았다.
‘그래. 성인들과 달리 어린 영애들은 나에 대해 호의적인 이들도 많으니까.’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걷던 에스텔의 걸음은 금세 저지당했다.
그녀를 보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성녀님.”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보이시지 않아 한참 찾았답니다.”
귀족 중에 신앙이 깊은 이들은 에스텔만 보면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려고 애썼다.
평소라면 차분히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을 테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에스텔을 향해 나탈리가 속삭였다.
“천천히 인사하고 오세요. 저는 방에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요. 친구들에게 성녀님이 온다는 말도 전해 놓고요.”
눈치 빠른 나탈리의 배려가 고마웠다.
에스텔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탈리가 사라진 후 에스텔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었다.
“성녀님, 축복의 인사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용건은 그런 것들이었다.
두 손을 모은 에스텔은 눈을 감은 그들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평소라면 그들에게 집중했을 텐데 자꾸 정신이 흐트러졌다.
‘어서 나탈리 님에게 가고 싶어.’
에스텔은 몇 번이나 힐끗힐끗 나탈리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결국 몰려든 인파를 빠져나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어 실례하겠습니다.”
몰려든 이들을 느긋하게 상대했을 때보다는 훨씬 빨리 끝내긴 했으나,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나탈리의 방으로 향하는 에스텔의 발걸음이 초조해졌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마음이 상하셨으면 어떡하지.’
어쩌면 시간이 너무 지나 버려서, 나탈리와 친구들은 과자를 다 먹고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좀 많이 속상할 것 같았다.
에스텔은 금세 나탈리의 방을 찾았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까르르거리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에스텔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들 아직 있구나.’
에스텔은 방문을 열기 전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탈리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딱히 정돈할 것도 없는 소박한 드레스였지만 목깃에 달린 리본을 한 번 더 여몄다.
작은 숨을 내쉬며 문을 두들기려던 순간이었다.
“나탈리, 진짜 성녀가 오는 것 맞아?”
“분명 온다고 했다니까. 좀 더 기다려 봐.”
“그 여자는 이런 자리에는 절대 안 온다던데? 귀족들을 싫어한다며.”
“그것도 사람을 봐 가면서 그러는 거지. 자기 좋다고 그렇게 쫄쫄 따라다니는데 싫을 턱이 있어?”
자신만만한 나탈리의 말에 한 소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게. 아까 보니까 너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더라. 꼭 친한 자매 사이 같더라고. 너도 그래?”
나탈리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표가 났다 싶어 에스텔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에스텔의 콩닥이는 가슴을 얼음처럼 싸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미쳤어?”
나탈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그 여자한테 잘해 주는 건 엄마 아빠가 시켜서 그런 것뿐이야. 내가 언제 또 아파서 성녀의 힘이 필요할지 모르니 친하게 지내 두라고 하잖아.”
“그런 것치고는 성녀에게 꽤 즐거운 얼굴로 조잘대던걸?”
“내가 좀 잘해 준다고 해서 제 주제를 잊어버릴까 봐 몇 마디 해 준 거야. 그런데 진짜 눈치가 없더라. 드레스 얘기를 꺼내도 안색 하나 안 변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봐.”
“역시 사치를 싫어하고 가난을 사랑하는 성녀님답네.”
소녀들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나탈리, 너 그런 얘길 이렇게 함부로 해도 돼? 혹시 성녀가 문 앞에라도 와 있으면 어쩌려고.”
“설마. 왔다면 안내한 하녀가 진작 표를 냈겠지. 뭐, 설사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 여자는 이런 말을 들어도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할걸.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성녀니까.”
명백한 비아냥거림이며, 조롱이며, 배신이었다.
에스텔은 이런 식으로 귀족들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에스텔은 마음을 다독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남 위에서 군림했던 사람들이니 평민인 자신이 고깝게 보일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그래서 괜찮았었는데…….
‘오늘은 왜 진정이 되질 않는 거야.’
가슴속에 있던 뜨거운 불구덩이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불쾌한 감정이 뜨거운 실타래가 되어 뒤엉키는 것 같았다.
에스텔은 이 느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없는 줄 알았던 감정, 분노였다.
아니. 그녀도 인간이다.
그런 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그저 꾹 눌러서, 잊은 척했을 뿐이다.
달칵.
에스텔은 힘껏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까르르거리며 웃던 소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스텔은 치켜뜬 눈으로 그들을 지나쳐 나탈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 성녀님…….”
에스텔은 차마 변명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떠는 나탈리의 뺨을 휘갈겼다.
쫘악.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반대쪽 뺨을 한 번 더 휘갈겼다.
쫘악.
눈물을 머금은 나탈리를 향해 에스텔은 소리쳤다.
“사람을 가지고 노니까 재밌니? 넌 진짜 못된 계집애야!”
……그러나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에스텔은 이 모든 것이 지나간 상상임을 알았다.
여전히 그녀는 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고, 소녀들은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짧은 순간 터뜨렸던 분노는 결코 허구의 것이 아니었다.
‘당장 들어가서 할 말을 하자.’
자신을 기만하고 비웃은 저쪽이 잘못이다. 뺨을 때리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저들을 향해 화를 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가능했다.
……분명 가능해야 하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노로 쿵쾅거리는 심장과 달리 이성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네가 화를 낸다고 뭐가 달라져? 귀족 영애들과 사이가 더 나빠질 뿐이야. 괜한 소문이라도 나면 귀족들 사이에서 더 심한 말이 나돌 테고.’
‘사제들도 내게 실망할걸? 고작 그런 이유로 어린 소녀에게 화를 냈냐고. 성녀가 그런 일에 휘둘리면 어쩔 셈이야?’
‘그만둬, 에스텔.’
분노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성녀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다.
에스텔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에스텔의 모습에 나탈리와 소녀들의 얼굴이 경악에 찼다.
나탈리가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어, 어서 오세요, 성녀님. 그런데 왜 혼자세요. 하녀가 방까지 안내해 주지 않았나요?”
“네. 손님들 때문에 다들 바빠 보이기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요. 나탈리 영애의 방은 몇 번 와 본 적이 있어 잘 알고 있기도 하고요.”
에스텔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미소에 나탈리의 얼굴이 풀어졌다.
에스텔은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다른 영애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 에스텔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속 안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끔찍한 감정을 힘겹게 눌러 담으며.
* * *
그 후로 에스텔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고쳤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따스한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많은 것을 가졌지만 마음이 고독한 이들을 다독여 주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에스텔의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은 보람차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차마 내뱉을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났다.
‘지금은 고마워해도 다음에 병을 고쳐 주지 않으면 날 원망할 거잖아.’
‘당신은 얼마 전까지 나보고 천한 신분이라며 비아냥거렸지.’
그럼에도 에스텔은 그들을 향해 웃어야만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아야 하는 성녀였으니까.
치졸하고 조악한 감정은 마음 깊숙이 숨기고, 그 위에 미소와 헌신을 덧바르고 또 덧발랐다.
제 안의 새까만 마음이 빠져나오려고 할 때마다 더 고통스러운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도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에스텔은 제 속에 그런 감정을 숨겼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루시안의 약혼녀라는 페르니아. 그녀에게 한마디 말을 듣기 전까지.
“가시 돋친 말은 매일 듣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좀 잘 참게 되는 거지.”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참지 말고 짜증 나는 것들은 다 조져 버려요.”
그 말은 매일 아침 빠뜨지지 않고 수백 번 읽었던 어떤 교리보다 에스텔의 가슴에 와닿았다.
그 순간 에스텔의 속에 겹겹이 쌓아 왔던 무언가가 깨졌다.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고양이를 닮은 아름다운 여인이 제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더는 참지 않아도 돼.’
‘더는 사랑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에스텔.’
신의 계시를 받는 순간, 사람의 운명은 바뀐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에스텔에게는 페르니아의 말이 신의 계시였다.
‘칭찬을 가장한 족쇄는 이제 필요 없어. 나는 그냥, 에스텔이 될 거야.’
에스텔은, 변하기로 결심했다.
난생처음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 * *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리는 날. 에스텔이 입은 드레스를 보고 사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연회장에 정말 그 드레스를 입고 가시려는 겁니까?”
에스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기 위해 맞춘 드레스인걸요.”
사제는 찌푸려진 얼굴로 에스텔을 향해 설득하듯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드레스는 신을 섬기는 성녀님이 입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습니다. 분명 이곳저곳에서 말이 나올 거예요.”
그러나 여느 때 같으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에스텔은 그러지 않았다.
이 드레스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페르니아와 함께 간 허름한 드레스 숍. 대뜸 무료로 드레스를 제작해 주겠다고 한 말부터 뭔가 이상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완성된 드레스였다.
작은 숍에서 무료로 제작한 것이라고 하기에, 드레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드레스에 대해 일가견이 없는 에스텔조차 급이 다른 것이 느껴질 만큼.
샤넬르에게 묻고 물어, 이 드레스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알았다.
페르니아가 얼마나 자신에게 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히고 싶어 하는지도.
물론 지금의 에스텔은 어린 시절과 달리 드레스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입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애써 준비해 준 옷이니까.’
에스텔은 사제를 향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난받을 건 감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성녀님…….”
“쉿.”
에스텔은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사제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스텔의 파란 눈동자에 깃든 결연한 의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럴 때의 에스텔은 무슨 말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결국 사제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에스텔은 걸음을 내디뎠다.
드레스에 달린 수십 개의 보석과 풍성한 레이스가, 그녀가 평소에 입었던 옷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묵직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짓눌렀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외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