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13
제112화
자식들에 대한 노기를 분출한 강운이 진천을 노려보았다.
“그 아이들이 너더러 나를 찾아가 복수하라고 이르더냐? 그래서 전날 본가에서 난동을 부린 것이더냐?”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아닙니다. 어머니는 할아버님을 뵙고 강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간청하도록 제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예전에 할아버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바가 있으시다 면서.”
강운의 노안에 아련한 감정이 묻어났다. 오래 전 가문의 비전을 익히지 못해 낙담한 여식을 위로한답시고 건넸던 말을 상기한 듯했다.
강운이 진천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진천은 외조부가 자신이 내걸었던 ‘두 가지 조건’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딸의 아들이 강가에 들어오려면 첫째, 부계의 입김이 없어야 했고 둘째, 그녀만큼이나 무공의 재능이 출중해야 했다. 진천은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결과물이었다.
뜸을 들이던 강운이 말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진천은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너는 민이의 진전을 이었다. 그 아이가 강호에 남긴 오명이 본가에 누를 끼치도록 할 수는 없음이야. 나를 탓하지는 말거라. 이것은 전적으로 네가 혀를 가볍게 놀린 대가니라. 어째서 서벌주의 손자에게 그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더냐? 설령 서벌주가 민이의 출신까지는 모른다 해도 무림에서의 별호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본가로서는 너를 받아들이기 부담스럽다. 천하십대악인에 꼽힌 자들의 후예를 품는다면 온 세상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할 터. 연이에게 한 약속은 사사로운 것이지만 너를 들이고 말고는 가문 전체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라.”
진천은 씁쓸했다.
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외조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해결하고도 남을 문제이기도 했다. 더욱이 강가에는 손실보다 이득이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컸다. 욕을 먹는 거야 잠깐이지만 미래의 최강자가 될 여지가 충분한 잠룡을 거두는 것은 수십 년의 성세와 영광을 보장하는 선택이었다.
진천은 그럼에도 외조부가 미적지근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강민의 존재 때문이었다. 만약 젊은 날의 그를 능가하는 친손자가 없었더라면 외조부는 설사 일사부가 강가 태생이라는 치부가 드러나더라도 어떻게든 외손자를 가문의 일원으로 삼았을 터였다.
진천의 무응답을 불만의 표시로 간주했는지 강운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잔귀쌍마(殘鬼雙魔)의 제자라는 소문이 떠다니고 있음을 아느냐? 서벌에서 새어나온 게 아니다. 상운의 일각에서 그 정보를 알아낸 모양이다. 어쩌자고 여기저기에 흘리고 다녔단 말이더냐? 지난번 이곳에서 선이에게 저지른 패륜도 그렇고 네 처신에는 문제가 상당하다. 오늘도 그 아이에게 사과부터 할 일이지 어째서 바득바득 대들었느냐? 외숙더러 당신이라 칭하면서.”
외조부의 꾸짖음에도 진천은 담담했다.
기실 사문에 관한 극비사항을 강가에 전한 이는 그였다. 진천은 북운상단의 오재승에게 부탁해 그 내용이 유월 중에 강가에 흘러가도록 조치해 두었다. 강가를 필두로 오대세가에 순차적으로 퍼지도록 해두었으니 지금쯤 마령 문가를 포함한 다른 사가(四家)에서도 그의 내력을 알고 있을 터였다. 외조부는 기왕에 퍼진 소문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강호에 잔살광마로 알려진 일사부가 자신의 장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그를 부른 것이었다.
진천이 신상의 비밀을 정파 무림에 노출시킨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외조부를 자극해 그와 독대할 자리를 만들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창인의 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뿌리를 알게 된 사패는 더 이상 창원에 첩인(諜人)들을 파견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노덕을 비롯한 삼보장의 인사들이 납치당할 우려가 적어진 것은 덤이었다.
엎드린 채로 외조부를 올려다보며 진천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차라리 큰 외숙의 일을 강호에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게 어떨는지요? 비난이 쏟아지겠지만…….”
강운은 외손자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노화를 터뜨렸다.
“닥쳐라, 이놈. 행여나 혀를 함부로 놀려 본가에 누를 끼친다면 네놈을 용서치 않겠다.”
진천을 쏘아보는 강운의 눈에서 화염이 일었다.
“설마 벌써 그것마저 나불대고 다닌 건 아닐 테지?”
어투와 분위기가 험악해진 외조부를 직시하며 진천이 솔직히 대답했다.
“한 분에겐 말했습니다.”
“뭐라? 한 분? 그게 누구더냐?”
“권왕 어르신입니다.”
“뭣이?”
강운은 분노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충격을 추스른 강운이 방금 들은 내용을 확인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권왕이라니? 그가 왜 여기서 나오는 게냐?”
“일전에 권왕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거짓말을 극히 싫어하시는 성미이신지라 제 개인사를 말씀드리는 도중에 하는 수 없이…….”
“그만!”
진천의 말을 끊은 강운이 무시무시한 압기를 뿜어냈다. 진천은 그의 노여움의 대상이 자신인지 권왕인지 아리송했다.
정파 무림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일컬어지는 권왕과 북천도왕은 사마(邪魔) 무림에 대항하는 협력자이면서도 소문난 앙숙이었다.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는 권왕은 정맹의 주인인 북천도왕과 기질이 맞지 않아 사사건건 충돌했다. 마령 문가가 절대지경의 무존을 보유한 원주 강가와의 분쟁에서 이십 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두 거물의 알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나마 최근 십여 년 간은 권왕이 정맹 출입을 삼가고 강호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통에 북천도왕과 대립하는 광경은 보기 어려웠다. 권왕은 북천도왕 대신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을 붙잡아 시비를 걸곤 했다. 근래 들어서는 그에게 노망기가 있다는 풍문도 나도는 실정이었다.
“하필이면 그 늙은이에게.”
외조부의 무지막지한 압기에 눌려 등판이 찌그러지고 폐가 터질 지경이면서도 진천은 그가 권왕의 면전에서 ‘늙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그럴 수 있을 터였다. 권왕에 따르면 외조부의 무위는 이미 수 년 전에 그를 넘어섰다고 했다. 정파에 한정하는 한 외조부는 문자 그대로 지존이었다.
그러나 진천으로는 아쉽게도 외조부는 천지간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무력에 걸맞은 풍모를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정파의 무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대적불가의 절대강자일 뿐이었다.
강운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진천에게 눈을 부라렸다.
“너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네 어미처럼 나를 원망할 테지만 자업자득임을 알아라. 네 경망스러운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진천은 외조부의 사나운 안광에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수그렸다.
“소손, 할아버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진천의 싹싹한 태도에 강운의 노기가 약간이나마 누그러졌다. 그 틈을 타 진천이 이마를 땅에 댄 채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할아버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 행위는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하겠습니다. 저는 차후 세상의 삿된 무리와 싸우고자 합니다. 선업을 짓는 의인들을 돕고 악행을 범하는 자들을 처단해 큰 외숙이 세상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습니다.”
외손자의 포부에 흐뭇해하기는커녕 강운이 허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사파의 종자와 놀아나는 아이가 할 소리는 아닌 듯싶다만. 네가 무슨 일을 하건 상관 않겠다. 하지만 본가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선이에게 저지른 패악만 해도 용서하기 어려우나 너를 내게 보내려 했던 연이를 봐서 한 번만 눈감아 줄 터이니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외숙과의 사투와 그의 부상은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항변하려던 진천은 생각을 바꿔 잠자코 있었다. 외조부 같은 성정을 가진 이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 비단 외조부만의 폐단이 아니었다. 권력을 쥐었거나 위세를 누리는 이들은 크든 작든 독단적인 심성을 내재하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심장이 무욕과 정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찬사를 받는 권왕에게도 그러한 면모가 약여했다. 진천은 외조부와 의형을 반면교사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라. 연이의 자식이니 그 아이의 반골기질도 물려받았을 터. 내 경고를 무시하고 네 멋대로 굴다가는 경을 치르게 될 것이다.”
외조부의 과한 언사에 진천은 모친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법을 어기고 내공심결을 익혔다는 이유로 외조부는 어린 딸의 단전을 손수 파괴했다. 어떤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만행이었다.
진천은 고개를 들고 외조부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은 없으신지요?”
진천의 질문에 강운의 눈빛이 찰나지간 흔들렸다. 그러나 금방 그의 입에서 호통이 떨어졌다.
“허튼 소리! 연이가 네게 무슨 얘기를 했을지 모르나 그 아이에게 일어난 불행은 전부 그 아이의 잘못에서 기인한 일이다. 그나마 나의 딸이기에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던 터. 내가 미안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더냐?”
진천은 한줌도 남지 않았던 기대마저 깨끗이 버렸다. 여든 살이 넘었으나 외조부는 자기만 아는 여덟 살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점에서도 모친과 판박이였다.
진천에게서 대꾸가 없자 강운은 일방적인 종결을 선언했다.
“여기까지다. 방금 전 네 스스로 했던 약속을 잊지 마라. 나와 본가에 누가 되는 행동을 했을 시 따를 모든 결과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 될 것임을 명심하도록.”
“…….”
“어째서 대답이 없느냐?”
“알겠습니다.”
고개를 들지 않는 진천을 노려보던 강운이 공중으로 비약했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든 야공(夜空)으로 빨려 들어갔다.
외조부의 기운이 사라지자 진천은 몸을 일으켰다. 텅 빈 공간을 응시하며 진천은 석상처럼 서 있었다. 겉은 미동도 없었으나 그의 심중에는 침울함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외조부와의 만남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서가 아니었다. 진천은 다만 모친이 가여울 따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넋을 조금도 달래주지 못했다. 진천은 구천을 떠돌고 있을 모친의 원령에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진천은 모친과 일사부에게 들었던 외조부의 완고함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친이 그녀의 부친을 대하며 느꼈을 절망감을 생각하니 그의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기실 진천은 외조부와의 면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강가의 후원을 얻지 못하더라도 척만 지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길 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예상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마무리 된 셈이었다.
하지만 외조부가 그의 무공을 확인하지도 않고 가버린 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외조부가 그를 통해 일사부가 이룬 무학의 성취를 알아보려 하리라 확신하고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던 진천은 맥이 빠졌다.
외조부는 의도적으로 그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그를 강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을 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건 진천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서운한 감정마저 일었다.
외조부가 남긴 단상들을 털어낸 진천은 낭떠러지를 내려갔다. 그러고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번 위기 때 도주 경로로 염두에 두었던 도화강을 타고 서행(西行)할 참이었다. 이틀에서 많으면 사나흘가량 더 소요되겠지만 삼보장으로의 귀환이 시급을 다투는 사안은 아니기에 약간의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터였다. 그래도 엿새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리를 익히고 몇몇 시진의 풍물을 감상하느라 지체한 탓에 진천은 절벽을 떠난 지 여드레 후에야 주안에 당도했다. 황혼녘에 삼보장에 이르니 두 가지 소식과 한 명의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