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4
제133화
“무슨 짓이냐?”
질문이라기보다는 당혹감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기상길은 노성을 지르기 전에 이미 화염장으로 그를 덮쳐오는 소중걸의 혈뢰장에 맞불을 놓고 있었다. 시뻘건 두 개의 장공이 부딪치며 어두운 지하연무장을 환희 밝혔다.
격돌의 승자는 기상길이었다. 그는 오륙 보 물러선 반면 기습을 가한 소중걸은 그 두 배 이상 밀려났다. 일합에 기선을 제압한 기상길은 다 잡았던 먹잇감들을 내버려두고 소중걸을 쫓았다.
눈엣가시인 소중걸이 혼을 내달라고 자청했으니 기꺼이 들어줄 참이었다. 그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맹장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거늘 대가리에 피도 덜 마른 애송이가 장마류를 대표하는 마인에게만 허용되는 장마(掌魔)라는 별호를 달고 다니는 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장왕의 비호와 편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선배의 무서움을 뼈에 새겨줄 작정이었다.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만 하다가 다 잡은 고기를 가로채려는 심보를 어찌 봐 줄 수 있겠는가. 장왕도 전후사정을 알고 나면 그를 질책하지는 못할 터였다.
기상길이 기세등등하게 달려들고 있음에도 소중걸은 달아나지 않고 장공을 발출했다. 기상길도 지체 없이 불벼락을 날렸다. 이번에도 결과는 기상길의 확연한 우세였다. 선공을 했음에도 소중걸은 소뿔에 받힌 사람처럼 튕겨나갔다. 무력의 차이를 과시한 기상길이 여유를 주지 않고 소중걸을 따라붙었다.
소중걸의 하체를 겨냥해 참화장(慘火掌)을 쏘려는 찰나 기상길은 섬뜩한 느낌에 발장(發掌)을 자제하고 주위를 살폈다. 철곤귀의 파도천망을 감지했을 때보다 강렬한 경고신호가 그의 뇌리에 요란하게 울렸다.
쉬잇!
뱀의 혓바닥소리 같은 기음이 들린 순간 기상길은 기다란 몸을 배배 꼬았다. 두 줄기 하얀 빛이 그의 겨드랑이와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상길은 간담이 서늘했다. 백광은 그의 호신강기를 찢어버리고 날아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육신에 꽂혔을 거라는 뜻이었다.
기상길은 그에게 치명상을 안길 뻔한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좀 전에 붕괴된 동굴의 토벽에서 쑥 튀어나온 머리통의 주인공은 장왕이 최우선적으로 잡아야한다고 강조했던 하남신룡임에 틀림없었다.
기상길은 혼란스러웠다. 설마 장왕이 한낱 폭약에 당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가 아니라 하남신룡이 빠져나왔단 말인가. 대체 그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겨를도 없이 기상길은 지하연무장의 출입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머리통과 함께 나온 하남신룡의 손끝에서 하얀 기운이 번득였기 때문이었다.
기실 기상길로서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적은 하남신룡만이 아니었다. 쓰러뜨렸던 태극마선과 인면요괴가 어느새 몸을 추스르고는 그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소중걸이 합세한다면 또 모르지만 그는 원군이 아니라 적이라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기상길은 무엇보다 하남신룡이 껄끄러웠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나 장왕을 감감무소식으로 만든 건 보통 수완이 아니었다. 방금 전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던 탄강의 위력과 흉험함도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창천도군에게 거둔 승리를 두고 말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그 한 수로 기상길은 하남신룡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명확한 세 불리에다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운 자와 얽히느니 도주가 상책이었다.
진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웠으나 매우 위급한 순간이었음에는 분명했다. 흙벽에서 몸을 빼내며 진천은 시야에 들어온 장면을 분석했다.
그의 절멸비에 놀라 달아나는 자는 화염장 기상길일 터였다. 칠 척의 장신이면서 대웅처럼 삐쩍 마른 체구를 가진 장마류의 마인이라면 그 외에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알려진 바로는 기상길은 장마류를 통틀어 무력 서열 일이 위를 다투는 강자였다. 그는 마련의 상징과도 같은 십대마군(十大魔君)의 일인이기도 했다. 화염장 기상길의 이름값은 마령 문가의 최고수로 꼽히는 창천도군 문찬경에 비해서도 아래가 아니었다.
진천은 사실 장왕이 데리고 올 방수 중 화염장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친인들로 하여금 철문 방어벽을 설치한 동굴에 들어가 있도록 당부했던 것이었다. 화염장은 여상구와 가린이 협공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렇더라도 목전의 광경은 이해난망이었다. 쏜살같이 달아난 기상길의 모습이 지하연무장에서 사라지자마자 여상구와 가린이 기다렸다는 듯 허물어졌다. 일견에도 그들이 상당한 중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한 부상이 없어 보이던 기상길의 상태를 감안하면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기상길이 초절정의 상으로 평가받는 강호라 하나 여상구와 가린의 합이라면 일방적으로 밀리는 전력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뿐더러 합공의 묘를 살리면 우위를 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였다.
바닥에 쓰러진 대웅과 파도천망의 흔적으로 보이는 파편들, 그리고 석벽에서 머리를 내밀자마자 눈에 들어왔던 장면의 의미를 헤아린 진천은 그가 없는 동안 지하연무장에서 진행되었을 수순을 읽어냈다. 소중걸이 기상길과 대치하는 정도를 넘어 충돌하고 있던 기이한 형국이 뜻하는 바를 간파한 것이었다.
첫째, 장왕의 부름에 따라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을 소중걸과 기상길이 지하연무장으로 내려왔다.
둘째, 그들이 장왕을 유인한 동굴로 접근했을 때 동굴이 붕괴했다.
셋째, 놀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추이를 지켜보던 여상구가 은신한 동굴에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진로를 막고 있는 기상길에게 달려들었다. 그 결과 여상구는 부상을 입었다.
넷째, 가린이 참전했다. 아마도 여상구가 위급지경에 처했을 터이고 가린은 그를 두고만 볼 수가 없었으리라.
다섯째, 여상구를 구했으나 가린은 그 대가로 기상길의 장공에 직격 당했다. 철갑보다 단단한 가린의 갑피지만 쇠를 녹이는 화염을 견디기는 어려웠다.
여섯째, 이번에는 대웅이 나섰다. 가린과 똑같은 이유로. 즉, 위기로부터 친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가 쓰러진 곳과 대도의 파편이 떨어진 위치를 보건대 대웅은 꽤 멀리서 기상길에게 파도천망을 날렸음에 틀림없었다. 근거리였다면 기상길도 아주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일곱째, 여기가 결정적인 대목이었다. 목숨을 걸고 파도천망을 구사했지만 대웅의 시도는 불발로 그쳤다.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기상길은 세평회의 인사들을 일거에 처치하려 들었을 터였다. 그때 소중걸이 그의 행사를 저지했다. 살벌한 표정으로 소중걸에게 장공을 쏟아내기 직전이었던 기상길의 사나운 기세는 그것 말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단박에 상황을 재구성한 진천은 우두커니 그를 지켜보고 있는 소중걸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입을 열어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목소리 대신 핏덩이가 터져 나올 게 뻔했다.
지하연무장의 상황이 염려스러워진 진천은 환생결을 운용했었다. 수년의 수명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극약처방이었지만 어차피 땅 속을 뚫고나가려면 신속한 회복이 불가피했다. 천지문에서의 경험을 상기한 진천은 심장을 쥐어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극통이 몰아쳤지만 장왕에게 당했던 내상이 급속도로 아물며 내력도 절반 이상 돌아왔다.
아득한 곳에서 바람에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미음이 들려오자 진천은 서둘렀다. 그 소리는 세평회의 친인들과 장왕의 방수들이 싸우고 있다는 신호였다. 미친 듯이 흙벽을 파고나간 진천은 지하연무장에 머리를 내밀자마자 참았던 숨을 들이킬 겨를도 없이 장신의 괴인에게 절멸비를 쏘았다. 두 자루를 날리기는 무리였지만 위협이 되려면 그래야만 했다.
다행히 허장성세가 통해 화염장 기상길로 추정되는 마인이 일전을 꺼리고 도주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만약 기상길이 독하게 나왔다면 길보단 흉이 컸을 것이었다.
토벽에서 몸을 빼내 바닥에 내려선 진천은 소중걸을 일별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지하연무장에 서 있는 이는 이제 소중걸 뿐이었다.
소중걸이 진천에게 걸어왔다.
“그는 어떻게 됐나?”
진천은 소중걸이 말하는 ‘그’가 장왕임을 알았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을지도 모를뿐더러 입을 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상태를 이해했음에도 소중걸이 질문을 이었다.
“죽었나?”
진천은 소중걸의 음성에 담긴 복잡한 심사를 감지했다. 장왕과는 어떤 관계일까.
“권왕이 그 동굴 안에 있었을 테지? 장왕은 죽었나?”
소중걸이 집요하게 물었다.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소중걸의 굵은 눈썹이 이마 가운데로 붙었다. 두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에 대한 답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장왕은 죽었나?”
진천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소중걸의 안면에 안도의 기색이 나타나더니 바로 지워졌다.
소중걸이 붕괴된 동굴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천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저 안에…….”
말을 하다 말고 멈춘 소중걸이 진천을 바라보더니 스스로 답을 냈다.
“그럴 리가 없지.”
잠시 진천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소중걸이 등을 돌렸다. 진천은 그를 잡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입구에 이른 소중걸이 문득 말했다.
“아까 그자는 화염장이다. 최근에 벽을 넘어서 최절정에 이르렀다. 다음엔 조심해라.”
진천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중걸이 지하연무장을 나갔다.
권왕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지하연무장으로 들어오던 권왕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세평회 인사들을 보고는 일자 눈을 부릅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더냐?”
단숨에 진천에게 이른 권왕이 물었다. 마침 운공을 마쳤던 진천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장왕이 방수를 데려왔습니다. 화염장과 장마였습니다.”
권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두 놈에게 저렇게 깨졌단 말이냐?”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권왕에게야 일초지적에 불과할 터이지만 화염장과 장마 모두 ‘고작’이란 표현을 쓰기엔 터무니없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나마도 운이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장마가 저들을 도운 듯싶습니다.”
진천은 새삼스레 소중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면 천추의 한을 남겼을 터였다.
소중걸에 대한 신뢰감도 강해졌다. 전날 진천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만 하고는 그를 보내주었다. 만약 그가 권왕이 세평회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장왕에게 일러바친다면 함정이 자동적으로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지만 진천은 그를 믿었다. 장왕의 방문은 소중걸이 권왕에 대해 함구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놈이 왜? 흠, 잠깐 기다리려무나. 내가 맞춰보마. 옳거니. 빚을 갚으려던 게지.”
권왕이 자문자답했다. 과히 틀린 해석은 아니기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옮겨야겠습니다, 큰 형님. 도와주십시오.”
진천의 청에 응한 권왕이 끔찍한 화상을 입고는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가린을 들어 그가 거주하는 동굴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진천이 여상구에게 이르기도 전에 나오더니 대웅을 어깨에 들춰 멨다. 진천은 정신을 차린 여상구와 서로의 생존에 안도하는 눈빛을 교환하고는 그를 안았다.
대웅과 여상구를 청와옥에 데려다놓은 노소는 죽림으로 향했다. 애용하는 바위로 폴짝 뛰어오른 권왕이 장왕 추격의 결과를 알렸다.
“막가를 놓쳤다.”
“…….”
“수백 리를 뒤쫓았지만 차이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벌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막가가 몸뚱이는 돼지마냥 뚱뚱해도 몸놀림은 표범처럼 날래다. 나중에는 수백 장이나 멀어져 그 커다란 몸이 콩알 만해지더라. 네가 보았어야 했는데. 어찌나 죽기 살기로 달아나는지 쫓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
진천의 침묵에 권왕이 언짢은 기색을 드리웠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아우야.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오늘의 실패가 전적으로 내 잘못임을 인정한다. 어떻게 책임지면 되겠느냐?”
진천은 묵묵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