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02
제201화
곽경은 정방형의 자단목(紫檀木)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얀 면사가 눈 아래를 가리고 있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필설로 형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 미모였다. 사내에게 원초적인 정복욕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곽경의 뱃속엔 한 줌의 음심도 고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역사(力士)들이 양쪽 끝을 잡고 힘껏 잡아당긴 밧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올라왔다. 독후 연진진을 처음 보았던 사십팔 년 전 이후 그녀를 대면할 때마다 반복되었던 일이었다.
곽경이 시비가 내온 차(茶)를 권했다.
“마음껏 드시구려. 모처럼 오셨으니 특별히 아끼고 아끼는 용연(龍涎)을 아낌없이 대접하겠소.”
한 방울이 금 한 덩이 값과 맞먹는다는 명성을 지닌 귀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독후를 힐끔 쳐다보며 곽경은 내심 분기가 일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공손한 표정을 유지했다. 독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권왕이 그랬듯 그녀 역시 이제 절정기에서 내려오고 있을 터였다. 지금 그녀와 일대일로 겨룬다면 우위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
독후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하는 까닭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국 때문이었다. 사벌과 마련이 정맹 하나를 상대하는 꼴이니 확실히 유리한 국면이지만, 장왕이 열락궁에 틀어박혀 협조를 거부하고 있는 탓에 압도적이라 할 만한 형세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에겐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마련과 달리 월교라는 우환거리가 있었다. 검후는 만만치 않은 적이었다. 정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힘을 소진하게 되면 그 암호랑이는 십중팔구 이빨을 드러낼 것이었다. 월교에 어부지리를 안기는 우를 범할 순 없었다.
독후를 한 편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모든 걱정거리가 일시에 해소될 터였다. 검왕이 주안 삼보장에 똬리를 튼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지만, 그의 성정이나 지난 행적을 돌이켜보건대 그가 세평회를 거들어 난전에 참전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그는 틀림없이 권왕의 권유에 응해 아무 생각 없이 거처를 옮겼을 것이었다. 검왕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난장판에 뛰어들지 않을 위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후가 이 편에 가담한다면 단숨에 십 할의 승산을 굳힐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가세는 비단 승리만이 아니라 전력 손실의 최소화를 의미했다. 그리되면 눈엣가시 같은 월교의 발호에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었다. 사패(四覇)란 이름으로 묶여 있으나 전체적인 세력을 따지면 월교는 사벌의 삼분지이(三分之二)에도 미치지 못했다.
어쨌거나 최단시간 내에 정맹을 쓸어버리는 것이 작금의 관건이었다. 사납고 거칠지만 우둔하기 짝이 없는 마인들을 앞세우면 사벌은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다대한 전리품을 챙길 수 있을 터였다. 마련을 독촉하고 생색을 내기 위해서라도 독후를 포섭해야 했다. 곽경은 간과 쓸개를 내주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독문(毒門)의 여왕을 구워삶을 작심이었다.
곽경의 입술에서 평소의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귀를 의심케 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오셨소이다. 삼 년하고도 두 달이 넘은 듯 하오만.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셨소?”
독후는 곽경의 질문을 묵살하고 제 할 말만 했다.
“오면서 들으니 꽤나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야?”
독후의 반말에 곽경은 욕지기가 치밀었다. 당장 칼을 뽑아 그녀에게 사파 무림의 지존을 대하는 자가 지켜야 할 예의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물론 그러한 욕구를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근자에 세평회라는 미꾸라지가 나타나 잔잔하던 강호에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소.”
“그자들에 대해 자세히 읊어봐.”
“……그럽시다. 그놈들이 처음 등장한 건 사월 초하루에 고흥 만수보에서 벌어졌던 마령 문가와의 구인결에서였소. 당시 창천도군과 화월도군을 포함한 최정예들이 총 출동했음에도 문가가 주안 삼보장의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몇몇 괴인들과의 대결에서 패하는 대이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동안 온 무림이 떠들썩했소. 괴인들의 수장은 진천이라고, 하남 무림 출신의 어린놈인데 이십 년 전쯤 정맹이 공적으로 선포했던 잔귀쌍마(殘鬼雙魔)의 제자요. 그놈을 중심으로…….”
곽경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무심함을 유지하던 독후의 눈빛이 어느 대목에 이르자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그가 월교를 떠나 삼보장에 들었다고?”
“그렇소.”
“확실해?”
“그런 것 같소.”
“…….”
“멀리서나마 그를 본 자들이 있소. 권왕이나 장왕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범상한 외관의 소유자는 아니잖소. 여러 경로로 확인해 본 결과 신빙성이 상당한 정보일 듯싶소.”
“어째서?”
“무슨 말이오?”
“어째서 그가 삼보장에 갔느냐고.”
“나도 모르오. 아마 권왕이 꼬드기지 않았겠소? 방금 말했듯 그는 하남신룡이라는 애송이와 붙어서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고 있소. 새파랗게 어린놈하고 형제결의까지 맺었다니 노망이 난 게지. 아무튼 검왕을 삼보장에 초치한 것도 필시 그 어린놈이 사주했을 거외다. 보통 영악한 놈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하오. 하지만 검왕이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을 것임은 장담할 수 있소. 독후도 그를 잘 알잖소? 그는 대륙의 지배권을 보장하거나 대호(大湖)를 채울 금은보화를 준대도 세간의 잡사에 끼어들어 손을 더럽힐 인물이 아니오.”
“…….”
“단순한 추측이 아니외다. 천하의 아무도 모르는 극비사항이오만 알려드리리다. 지난 반백 년 동안 우리 사벌과 동고동락하며 한 식구로 지낸 독후에게 무엇을 감추겠소? 보름 전 양자호에서 네 무왕이 부딪치는 일이 발생했소. 나와 마왕, 그리고 권왕과 북천도왕이오. 만약 검왕이 그들의 꼬임에 넘어갔다면 그도 그날 그 자리에 나왔을 게요. 하지만 그들로서는 매우 중요했을 대사에 검왕은 참여하지 않았소. 그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가 정파 나부랭이들과 손을 잡지 않았음이 명백하다고 장담할 수 있소.”
기실 근거가 빈약한 추정에 불과했지만 곽경은 독후가 세세한 부분을 따지고 들지는 않으리라 보았다. 구(舊) 사왕은 하나같이 그런 방면으로는 취향도 재주도 없는 작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독후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전후사정을 알려고 들었다.
“양자호엔 왜 모였지?”
독후의 질문에 곽경은 머리를 굴렸다. 어디까지 밝혀야 할까.
“발단은 사소한 것이었소. 실은 그날 내 손자가 하남신룡이란 놈과 당금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를 가리기 위한 비무를 치를 참이었소. 그런데 권왕과 북천도왕이 아이들 싸움을 빌미로 나를 잡겠다고 작당하고 나섰지 뭐요. 다행히 하남신룡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마왕이 양자호에 나타나는 바람에 그들이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독후가 곽경의 말을 끊었다.
“네 손자는 어떻게 됐지?”
곽경은 어리둥절했다.
사내보기를 버러지 보듯 하는 독후가 왜 자신의 손자에게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눈만 멀뚱거리는 아이 말고 너처럼 뱀눈을 한 아이겠지? 하남신룡에게 이겼나?”
독후가 연이어 묻자 곽경은 침통한 음성을 뱉어내었다. 이번만큼은 위장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승부에선 우세했으나 결과에선 막대한 손해를 보았소.”
“무슨 소리야?”
“내 손자는 그놈을 막바지로 몰아붙였소. 하지만 비겁하게 권왕과 북천도왕이 승기를 잡은 내 손자에게 암기(暗氣)를 쏘아…….”
“진광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곽경은 뜨끔했다. 하지만 심중의 동요를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받았다.
“경황이 없었기에 둘 중 누가 암수를 부렸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소. 권왕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독후 말대로 그보다는 북천도왕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오. 아무튼 내 손자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변을 당해야 했소.”
충격을 받은 듯 독후의 면사가 파르르 떨렸다. 곽경은 그녀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손자가 죽었다는 건가?”
청아하지만 무미건조하던 독후의 목소리에 인간의 감정이 묻어났다.
“내가 다급히 그 아이를 안고 도피한 덕분에 명줄은 붙어있으나 죽은 것이나 진배없소. 단전이 깨져 내공을 모조리 잃은 무인은 생불여사가 아니겠소. 칼을 휘둘러야 할 오른팔도 근골이 심하게 상해 거의 불구가 되어버렸소.”
독후가 진심으로 비통해하는 곽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서 그 아이를 데려와.”
곽경이 찢어진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소리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독후의 이어진 말에 곽경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혹시 알아? 내가 그 아이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줄지.”
정심원의 원로들이 단상에서 내려갔다. 진천과 북천도왕에게 비무를 치를 공간을 내주기 위해서였다.
진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가로와 세로의 폭이 각각 십여 장과 칠팔 장에 달하는 단상이 비무대로서 충분할 터이지만 그와 외조부 같은 이들에겐 너무 좁았다.
백룡포를 벗고 태사의 뒤에 두었던 쌍도를 허공섭물로 끌어오는 외조부를 보며 진천이 요청했다.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북천도왕이 외손의 청에 응했다.
“밖으로 나가자.”
북천도왕의 신형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고는 태평전 상공을 지나 멀어져갔다. 군중이 웅성거리며 대문으로 몰려갔다. 진천은 외조부처럼 육지비행술을 펼치지 않고 단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명에게 이른 진천이 그녀와 함께 걸어가자 사람들이 부랴부랴 길을 터주었다.
태평전 바깥은 광장이었다. 북천도왕은 그를 쫓아 나온 군중이 비워둔 수백 평 넓이의 원형 공간 안에 홀로 서있었다. 진천은 원의 테두리를 뒤로 물렸다. 일만여 군중은 그의 지시에 따라 계속 뒷걸음질 쳐야 했다. 지름이 이십여 장에 달하고서야 진천이 원의 확장을 멈췄다.
그는 준비를 마쳤으나 아직 비무를 시작하기엔 일렀다. 자리를 재배치하느라 소란이 이어진 탓이었다. 잽싼 움직임으로 명당을 선점했던 하급의 무인들은 지위가 높은 이들과 연이어 위치를 바꿔줘야만 했다.
이 각 후 주위가 정돈되자 진천은 외조부와 오륙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섰다. 일만 개가 넘는 입들이 있었지만 광장은 죽은 쥐처럼 조용했다. 바야흐로 무림의 신구를 대표하는 초인들의 대결이 펼쳐질 참이었다.
진천이 북천도왕을 향해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손, 천이 할아버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북천도왕은 허리춤에 걸어둔 두 자루의 칼을 빼드는 것으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진천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폐에 공기를 채운 진천의 좌수에서 하얀 고드름이 돋아났다. 절멸도를 뽑아든 진천은 공중으로 도약하며 선공에 나섰다. 북천도왕은 그의 접근을 제지하지 않고 목전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위에서 떨어지며 진천이 북천도왕의 정수리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북천도왕의 우수에 들린 협도가 진천의 절멸참을 막았다.
캉!
쇳덩이가 부딪칠 때 나는 굉음과 함께 해일 같은 경력이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원 둘레에 있던 이들이 대경실색하며 분분히 기막을 펼쳤다. 경악성과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도 부기지수였다.
일합부터 군중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남신룡이 터무니없이 큰 비무 공간을 요구한 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얼마나 내공이 심후하기에 십이삼 장이나 떨어진 이들에게 충돌의 영향이 전해진단 말인가.
하지만 첫 격돌은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다. 이어진 양인의 공방전에 일만여 관전자들은 넋이 나갔다. 절대다수는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현실이 아니라 몽중지사(夢中之事)라고 여겼다. 저것이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낸 장면일 수 있단 말인가. 상상으로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대장관이었다.
이제는 절대천룡이라 불리게 된 하남신룡이 검마를 물리쳤다는 소문을 반신반의했던 정맹의 무인들은 그 소문이 세평회 측에 의해 과장스럽게 부풀려진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과장은커녕 오히려 절대천룡의 진정한 무위를 축소해 전달한 측면이 더 강했다. 절대천룡은 검마 따위가 아니라 팔대무왕과 비교해야 하는 절대무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