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53
제252화
노을 아래 평화롭게 누워있던 고도(古都)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지상 일이 장 상공을 낮게 비행하며 곽건은 닥치는 대로 회색 연무(煙霧)를 뿜어냈다. 그의 입에서 발출된 안개는 건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녹여버렸다. 원주 백성들은 처음엔 기이한 화마(火魔)가 그들을 덮쳤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비명을 내지를 겨를도 없이 절명한 탓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설명 불가의 재앙이 닥쳤음을 알아차렸다.
도시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절규로 뒤덮였다.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모두들 무작정 뛰었다. 운 나쁘게 즉사하지 못하고 신체의 일부가 신무에 닿아서 서서히 녹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더 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냈다.
혼돈의 거리 위를 저공비행하며 곽건은 자신이 만든 목불인견의 참상을 즐겼다. 살인이 주는 쾌감은 야들야들한 계집을 품는 맛에 맞먹었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학살보다는 심기를 거스르는 자의 심신 양면을 고문한 후 살해하는 섬세한 작업이 보다 흥취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다. 해가 지면 이 멋진 몸을 무황에게 양보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곽건은 분발했다. 원치 않는 수마에 빠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염왕에게 보낼 참이었다. 원주에 든 버러지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리면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한 잠에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의 신무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곽건은 소스라쳤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찌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신(神)이 된 것이었다.
다만 이 무적불멸의 신체를 무황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은 심히 불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영원히 쫓아내고 싶었다.
흐뭇했던 기분이 무황으로 인해 망쳐지자 곽건은 광포해졌다. 신무 분사를 멈추고 땅으로 내려온 그는 직접 사람들의 두부를 부수고 다녔다. 손에 전해지는 촉감은 단지 눈으로 감상하는 것보다 확실히 짜릿했다.
미친 듯이 도락에 빠져있던 곽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를 깨운 것은 독후의 음성이었다.
“당신도 그 아이처럼 벌레잡이에 맛을 들인 건가요?”
곽건은 위화감을 느꼈다. 독후의 바뀐 말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곽건이 독후를 응시했다. 그의 강렬한 시선에 독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고개를 쳐들고 암흑으로 물든 천공을 올려다보며 곽건이 일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드디어 이 몸이 내 몸의 온전한 주인이 되었도다.”
다시 눈을 독후에게로 돌린 곽건이 목소리를 깔았다.
“기쁘지 않소, 독후? 진정한 신마가 탄생했으니 말이오.”
독후의 녹안에 깃든 당혹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곽건이 뱀눈을 찌푸렸다.
“그 늙은이가 그리운 건 아니겠지, 독후?”
독후가 쏘아붙일 겨를을 주지 않고 곽건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독후는 곽건을 뿌리치려 했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힘이었다.
“이거 놔!”
독후의 뾰족한 음성이 그녀의 코앞에 선 곽건의 면상을 찔렀다. 곽건이 비릿하게 웃었다.
“혹시 밤마다 그 늙은이하고 옛정을 떠올리며 운우지락을 나눈 거 아뇨? 그렇다면 내 몸에 익숙해졌을 텐데. 어떻소? 내가 진정한…….”
분노로 불타오르던 독후의 녹색 동공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면사 안에서 눈빛 못지않게 냉랭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당장 놔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시체를 상대해야 할 거야.”
독후의 녹안을 들여다본 곽건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협박에 굴복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곽건이 등을 돌려 폐허가 된 마을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남아있는 숨소리들을 찾아 정욕을 살육으로 달랬다. 그의 광기는 이슥한 밤까지 지속되었다.
“여긴 어딘가, 진진?”
익숙한 호칭에 자기도 모르게 울컥한 독후는 얼른 안구에 고인 습기를 수습했다.
“대체 어찌 된 거죠?”
독후의 반문에 무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후는 괜히 안도했다. 곽건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동작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무황의 안색이 변했다.
“저 난장은 이 물건의 솜씨로군. 강가만이 아니라 원주의 민초들에게도 손을 댄 건가. 츳츳, 고약한 악취미로세.”
혀를 차는 무황을 노려보며 독후가 주의를 상기시켰다.
“그보다 뭐 느끼는 것 없나요?”
무황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할 참이었다, 진진. 달의 위치를 보아하니 이미 해시(亥時)가 넘었겠구나. 허어, 이런 일이.”
독후가 처음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대체 어찌 된 거죠?”
“나도 잘 모른다. 추측컨대 신령이 내가 아니라 이 물건을 선택한 것 같구나. 너도 알다시피 신령은 수많은 원혼들의 집합체다. 이 물건이 저지른 살겁이 세상에 앙갚음하기를 바라는 신령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을 게야.”
“이렇게 될 줄 몰랐나요?”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왜 내게 언질을 주지 않았죠?”
“확실하지도 않거니와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물건이 강가로 간다기에 나 역시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독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 셈인가요?”
“글쎄. 어떻게 할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당신이 벌려놓은 판이니 당신이 책임져야죠.”
“허허, 네 말이 맞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아마도 나는 점차 이 물건에게 밀려날 게다. 조만간 완전히 쫓겨날지도 모르겠구나. 그 전에 이승으로 이끈 내 혼백과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신령을 와해시키마. 내가 소멸되고 신령이 해체되면 이 물건도 힘을 잃을 게야. 어떠냐?”
“정확히 언제 그럴 건데요?”
“진광을 만나 후로 하자. 그 친구와 회포를 풀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게야.”
“그가 당신을 반기리라 기대하지는 말아요. 그러기는커녕 이 아이가 이곳에서 저지른 일로 당신에게 원성을 쏟아낼 게 틀림없어요.”
“허허, 심술은. 구태여 일깨워주지 않아도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으냐? 허니, 어쩌겠느냐? 감내할 밖에.”
“…….”
“이 물건의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는 알고 있는가?”
“일신이라고 하더군요. 정파 무림의 결맹체인 정맹이 자리한 인구 일백만의 대도(大都)예요.”
무황의 낯빛이 변했다.
낯익은 지형이 나오자 진천은 반색했다.
‘치아라의 숲’이었다. 창인에서는 정남으로 사백 리가량 떨어진 밀림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천은 시각을 가늠했다. 대략 신시(申時)쯤 되었을 터였다. 늦어도 자시 전에는 창인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결 여유가 생긴 진천은 가린에게 휴식을 권했다. 가린은 기다렸다는 듯 진천을 내려놓고 대자로 뻗었다. 그가 활력을 되찾는 동안 진천은 무영의 진전을 점검했다. 바위에 이어 거목을 통과한 진천은 성과에 만족했다. 속도가 사뭇 빨라졌다. 이틀 전만 해도 아주 천천히 지나가야 했지만 지금은 평상시 보행의 속도로 장애물들을 지날 수 있었다.
고개만 모로 돌린 채 진천이 펼쳐 보이는 신기를 구경하던 가린이 그가 부르자 신이 나서 달려왔다. 진천이 자신의 왼 어깨를 가리켰다.
“여기를 쳐 봐, 가린. 어제보다 조금만 더 빨리. 이 정도로.”
진천이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고개를 끄덕인 가린이 진천의 시범과 동일한 속도로 손을 내뻗었다. 맹수의 발톱 같은 길쭉한 손톱이 달린 가린의 큼직한 손이 진천의 좌견에 닿았다. 그러고는 쑥 지나갔다. 마치 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진천의 몸에 들어갔다 멀쩡히 빠져나온 제 손을 들여다보며 가린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가린은, 무섭다. 너는, 요괴다.”
가린의 감상과 명명에 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좀 특이한 비술을 익혔을 뿐이야, 가린.”
말을 하면서도 진천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린지 알고 있었다. 그의 무영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몇 번만 더 해 보자, 가린.”
가린은 기꺼이 진천의 청에 응했다.
후우족의 숲에서 진천은 방향을 틀었다.
어둠이 내려온 지 오래였으나 워낙 익숙한 땅이었기에 길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진천은 창인이 아니라 오란(五欄)으로 갈 참이었다. 오란에는 작으나마 흑문 분타가 있을 터였다. 진천은 우선 그곳에 들러 그가 떠난 후의 강호 사정을 파악하고자 했다. 허 노야를 비롯한 창인 지인들과의 만남은 하루쯤 늦춰도 상관없을 터였다.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심중의 불안감을 씻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가린은 진천이 지시하는 쪽으로 열심히 달렸다. 남해에서부터 열흘 가까이 지속된 강행군에 탈진지경에 이른 가린은 연신 헐떡거렸다. 그럼에도 군소리 한 번 없이 꿋꿋하게 내달렸다.
밀림이 끝나고 황무지가 나오자 가린도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족히 이백 리는 달려야 했기에 오란에 당도했을 때는 완전히 뻗어버렸다. 진천은 그를 두고 혼자 흑문 분타를 찾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가린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가린의 동행은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줄여줄 터였다.
일 각의 휴식을 취한 가린이 거구를 일으켰다. 진천은 좀 더 쉬어도 된다고 했으나 그의 급한 마음을 알고 있던 가린이 불문곡직 우람한 팔로 그를 안아들고는 오란에 들어섰다. 자시를 넘은 이슥한 시간이라 거리엔 인적이 끊겨있었다. 좌우를 훑으며 흑문의 표식을 찾던 진천이 처진 눈을 치떴다.
“저기로 가자, 가린.”
진천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린 가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을 몰랐지만 창인에서 자주 보았던 것과 똑같은 글자가 새겨진 현판을 알아보아서였다.
의 문은 열려있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천은 큰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아저씨!”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무뚝뚝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이 야밤에 웬 놈들이냐?”
진천은 고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창인의 털보 장초였다.
“저, 천이에요, 아저씨. 가린도 같이 왔어요.”
“뭣이?”
식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초가 한달음에 진천에게 달려왔다. 너무 어두워서 진천의 얼굴을 식별하지 못한 장초가 그에게 붙자마자 떨어졌다.
“감히 천이를 사칭하다니, 넌 누구냐?”
쓴웃음을 지은 진천이 식도를 도로 주우려고 달려가는 장초에게 소리쳤다.
“몸이 말랐지만 천이 맞아요, 아저씨.”
우뚝 멈춰선 장초가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주춤거리며 진천에게 다가왔다.
“정말 천이냐?”
“네.”
“비처에서 폐관수련에 들었다는 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
장초의 어투에 도사린 거리감에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진천은 안도했다. 세상은 무탈한 모양이었다.
“아저씨 소식이 궁금해서 왔죠. 우란 아줌마하곤 여전히 깨가 쏟아지나요?”
진천의 농담에 긴장이 풀린 장초가 껄껄 웃었다.
“그녀는 나무족의 숲으로 돌아갔다. 오해하지는 마라. 헤어진 건 아니니까. 창인이나 이곳을 너무 싫어해서 어쩔 수 없이 보낸 게다. 두 달에 한 번 그녀를 찾아가 사흘간 함께 지낸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더구나. 모처럼 보니까 더욱 애틋하거니와 그녀도 나를 살갑게 대해주니까. 그런데 진짜 여긴 어쩐 일이냐? 내 시시한 근황 따위를 알고 싶어서 귀한 발걸음을 하진 않았을 텐데.”
진천은 단도직입했다.
“중원엔 별일 없죠?”
장초가 즉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둠 속에서 진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