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30
제29화
일백 초가 흐른 시점에서 진천은 변화를 주었다. 지난번 비무 때와 같았지만 철구로 암습을 가했던 그때와는 달리 권풍을 일으켜 대웅의 두부(頭部)를 공략한 것이었다.
약속 대련처럼 첫 번째 대결 때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공방을 주고받던 진천이 수순을 비틀자 대웅은 크게 당황했다. 허겁지겁 자세를 낮추며 진천의 권풍을 빗겨 낸 대웅이 소리를 질렀다.
“야!”
대웅의 외침에 실린 항의를 묵살하고 진천은 중심을 잡지 못한 그를 더욱 거세게 압박했다. 손발이 어지러워진 대웅은 결국 진천의 손칼을 명치에 허용하고 말았다. 진천이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일격이었다.
결정타를 먹인 진천은 대웅에게서 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신형을 추스른 대웅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진천을 노려보았다.
진천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방금 연무장에 도착한 사람이 보았다면 그와 대웅 중에서 누가 패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굳은 얼굴이었다.
비무를 시작하며 진천은 먼젓번과 동일한 수법으로 선공을 가했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대웅이 신이 나서 보조를 맞추었다. 복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웅의 대처는 극미한 차이나마 조금씩 늦어졌다.
진천은 그가 관전하는 노덕과 고량을 의식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얼핏 보면 대등하게 겨루는 것 같았으나 신경이 분산된 대웅은 끊임없이 빈틈을 노출시켰다. 실전적 상황이라면 승패는 물론이고 생사까지 가름할 수 있는 약점이었다.
진천은 대웅의 울렁증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나무꾼 오(吳) 아저씨처럼 목숨이 걸린 순간을 맞으면 박약한 의지가 아니라 생존의 본능에 따라 대처하는 유형의 무인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심약한 탓에 비무만 했다 하면 연전연패를 당하지만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에서는 창인 칠인방 중에 최강자인 대왕객잔의 장초조차도 오씨(吳氏)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대웅은 어쩌면 그와 같은 부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천이 품었던 일말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투로(鬪路)에서 벗어나자 허둥대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치명적인 일수가 급소를 찔러 옴에도 무기력하게 얼어붙었다는 것은 대웅의 병증이 엄중하다는 방증이었다.
그의 무력을 감안하면 반격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의 방어는 했어야 마땅했다. 투기가 강하고 노련한 상대에게 걸리면 대웅은 무위와 무관하게 속절없이 패퇴할 게 뻔했다. 그 결과가 죽음일 수도 있었기에 진천은 마음이 무거웠다.
양패구상한 사람들처럼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진천과 대웅의 면면을 살피며 노덕이 조심스럽게 감상을 밝혔다.
“내가 평가할 수준이 아님을 아네만 둘 다 대단하구먼.”
고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대웅의 강미를 확인한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진천이 백도방주를 잡아 주기만 하면 오인결에서 승리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진천이 대웅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노덕과 고량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고칠 수 있다, 대웅. 내가 도와주마.”
“…….”
말 많은 대웅이 말이 없자 진천이 말을 이었다.
“내 고향에 너하고 비슷한 증세를 가졌던 지인이 있다. 그도 친구들의 도움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다. 너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진짜?”
“그래. 하지만 너도 노력해야 한다. 온전한 극복은 오롯이 네 몫이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럴 거지?”
진천이 무엇을 요구할지를 예감한 대웅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천이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때를 놓치면 다시는 껍질을 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 중에 의술의 대가가 있는데 그분 말씀이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두려움에 자주 노출되고 적응하는 것이라더라. 두려운 대상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거나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실제로 그 방법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을 여럿 봤다.”
“하지만 나는…….”
대웅에게서 뒷말이 나오지 않자 가만히 기다리던 진천이 설득을 계속했다.
“쉽지 않은 거 안다. 하지만 네가 간절히 원한다면 도전해야 한다, 대웅. 그러기 위해 집까지 떠나온 게 아니었나?”
“그렇지 않아. 내가 벽력도문(霹靂刀門)을 나온 이유는…….”
말하자마자 실언을 인지한 대웅의 낯빛이 파래졌다. 진천이 그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대웅. 사파칠문 중 도(刀)를 주병기로 삼은 곳은 그곳뿐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으냐?”
“…….”
“네가 어떤 이유로 가문에서 뛰쳐나왔건 네 과제를 방치한 채 강호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나? 세상에 무명(武名)을 떨치려면 강자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할 터인데 이대로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
“내가 도와주마. 나를 믿어라, 대웅.”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려는 건데?”
“몰랐나? 우리는 특별한 인연이잖아. 서로가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니. 그리고 너는 내가 아주 잘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그래서 더더욱 남 같지 않다.”
노덕은 진천이 말한 ‘누군가’가 누군지를 대웅이 물어보길 바랐지만 그는 하나밖에 없는 벗이 선사한 감동에 빠져 있었다.
“정말 내 병을 고치도록 도와줄 거지, 천?”
“물론이다, 대웅. 우린 친구 아니냐?”
대웅이 양손을 뻗어 진천의 어깨를 맞잡았다. 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고 형과 붙어 봐라. 멋진 출발이 될 거다.”
밝아졌던 대웅의 안색이 대번에 흙빛으로 돌아갔다.
대화를 들으며 전후 사정을 짐작했지만 막상 대웅과 손을 섞자 고량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진천의 주문은 ‘부상을 입히지 않도록 조심하되 최선을 다해 압박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강조점이 뒷부분에 있음은 불문가지였다. 그러한 청이 없었더라도 대웅은 거칠게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진천과의 비무에서 드러난 대웅의 무위는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사벌의 지존을 배출한 벽력도문의 후예가 약자일 리 없었다. 기실 고량은 진천과 대웅 사이에 오간 기이한 대화를 듣기 전만 해도 대웅을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강자로 자리매김해 두었다.
그러나 직접 부딪쳐 보니 어째서 진천이 그를 ‘겁쟁이’ 취급했는지 납득이 가고도 남았다. 앞선 비무를 보건대 공력이든 초식이든 전혀 밀릴 게 없음에도 대웅은 그의 주먹들에 초반부터 위축되더니 무기를 든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했다.
고량은 암담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들 생사투도 아닌 약식 비무에서 고양이 앞의 생쥐인 양 움츠러드는 자라면 오인결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었다. 장담은커녕 일방적인 패배가 확실시되었다. 백도방의 이리 떼가 대웅의 심약함을 간파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이십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연무장 바깥까지 밀려나 진천이 말려 주기만을 바라는 대웅을 노려보며 고량은 필살기 중 하나인 와선(渦旋)을 그의 오른쪽 늑골에 꽂아 넣었다. 헉, 다급한 비명성을 토해 내며 권기가 실린 주먹을 피해 대웅이 옆으로 굴렀다.
“그만! 다칠 뻔했잖아.”
대웅이 소리를 질렀다. 고량은 그의 허리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비책이 있다고 했지?”
벌떡 일어서는 대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진천에게로 눈을 돌린 고량이 물었다.
“그렇소.”
진천의 즉답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고량이 구체적으로 물었다.
“어떤 건가?”
대웅이 자기도 궁금하다는 듯 진천을 주시했다.
“비밀이오.”
진천의 대답에 고량의 고리눈이 일그러졌다.
“이번 승부는 단순한 승패 놀음이 아니다. 그녀의 목숨과 내 인생이 걸려 있다.”
“알고 있소.”
진천의 담담한 표정과 단단한 음성에 눈빛을 누그러뜨린 고량이 신음하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만 믿으마.”
* * *
와옥으로 되돌아온 사 인은 부수적인 사항들에 관해 의논했다.
노덕과 대웅은 거의 끼어들지 않고 진천과 고량 둘이서 대화를 주도하고 결론을 정했다. 이윽고 진천과 대략적인 합의에 이른 고량이 백도방과 담판을 짓기 위해 삼보장을 떠났다. 그가 방을 나서고 반 각이 지나서야 대웅이 참았던 숨을 마음껏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를 겨냥해 노골적으로 압기를 발하던 고량에게 눌려 오금도 못 펴고 있었던 게 자못 억울했던 듯 대뜸 큰소리를 쳤다.
“흥,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주제에 센 척하는 꼴이라니. 그렇게 까불다 뒈지는 수가 있어.”
“허어, 의질이 있을 때 혼내 주지 그랬는가?”
노덕의 핀잔에 대웅이 유순하게 둥근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나더러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가 되란 말이오? 나는 감정에 치우쳐 대사를 그르치는 소인배가 아니오. 그가 내 쇠몽둥이에 다리몽둥이라도 부러지면 노인네가 책임질 거요?”
“아무렴, 어련하겠는가?”
만만하고 애꿎은 노덕에게 분풀이를 할 태세인 대웅을 보고 있자니 진천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웅은 전형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성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밉지 않은 것은 약자에게 강한 척 굴지만 실제로 그들을 해할 의사는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출을 감행하며 대웅은 험난한 강호에서 거친 자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할지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 두었음에 틀림없었다. 일단 세게 나간 후 상대의 반응에 따라서 대응하기로 했을 터였다.
그는 이 방법으로 그동안 톡톡히 재미를 보았을 게 분명했다. 양자호의 정자에서 시비를 걸었다가 그의 무공을 보고 혼비백산한 한량들처럼 절대다수가 그가 흘린 무기(武氣)에 놀라 양보하거나 굴복했을 것이었다.
진천은 자신에 대해서는 대웅이 일생일대의 용기를 쥐어짰으리라고 추측했다. 만약 근자에 위명을 알린 하남신룡을 기운으로써 물러서게 만들 수 있다면 자기의 강호행이 탄탄대로일 거라 판단했을 확률이 십중팔구였다.
그렇더라도 진천이 강렬한 투기(鬪氣)를 일으켰다면 대웅은 고량에게 그랬던 것처럼 꼬리를 말고 움츠렸을 공산이 컸다. 위협적인 느낌이라곤 솜털만큼도 없는 진천의 순후한 기운에 현혹되어 대웅은 그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나 다름없는 비무에 나섰을 것이었다. 진천은 비무가 개시되자마자 그에게 상해의 의지가 있는지부터 확인하던 대웅의 간보기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런데 정말 비책이 있는 거야, 진천?”
노덕에게 기세등등하게 굴던 대웅이 갑자기 풀이 죽어서는 진천에게 물었다.
“물론이다, 대웅. 나를 믿고 너를 믿어라.”
진천의 격려에도 대웅은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노덕이 자리에 없는 고량의 불안을 대변했다.
“아까 의질의 말마따나 이번 오인결에는 그의 남은 인생이 달려 있네. 자네가 허언을 일삼는 이가 아님을 아네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먼. 황금 백 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큰 실익만이 아니라 중립 지대에서는 대적 불가의 강호로 행세해 왔던 체면 때문에라도 백도방의 고수들은 전력을 다할 걸세. 얼마나 살벌하게 달려들지 안 봐도 훤하네. 필경 죽자 사자…….”
노덕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에 따라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던 대웅이 벌벌 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노덕은 차마 대웅에게 심리 고문을 가할 수 없었다.
“대웅의 울렁증은 완치되리라 확신합니다, 대인. 다만 이번의 경우는 시간이 촉박하기에 임시방편으로 응급 처방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진천이 수전증을 앓는 환자처럼 덜덜거리는 대웅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대웅. 너는 다치지도 않을 거고 지지도 않을 거다.”
대웅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잠시 친우의 꼬챙이 같은 팔뚝을 토닥거리던 진천이 노덕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탁이 있습니다, 대인.”
노덕의 백미가 가운데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