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54
제53화
강찬의 개시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량이 문상제에게 쇄도했다.
단숨에 사 장의 거리를 지운 고량은 문상제의 면전에 이르렀다. 문상제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그의 별호이기도 한 묵월도를 검처럼 쭉 뻗었다. 주먹보다 칼이 더 길기에 내쳐 달려들 수 없었던 고량이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면서 반대쪽 주먹으로 문상제의 얼굴을 공략했다.
타격을 허용하지 않더라도 권기(拳氣)에 눈을 상할 우려가 있었기에 문상제는 측보를 밟으며 칼을 휘둘렀다. 거무칙칙한 빛을 뿜어내는 도신이 목을 베어 왔지만 고량은 과감하게 더욱 바짝 붙었다.
내심 고량을 경시했던 문상제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권술을 장기로 삼은 자에게 근접전은 금물이었다.
원래 맨손은 무기를 이기기 힘든 법이었다. 하지만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권사들의 위험도는 증가했다. 아무리 도검을 능숙하게 다룬다고 해도 제 손처럼 부리기는 어려웠다. 권기는 검사(劍絲)나 도풍(刀風)보다 정교하고 예리하다. 따라서 훨씬 조심해야 했다.
권왕(拳王) 태진광(泰鎭光)이 팔대무왕 중 상위권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강기를 구사하는 권객은 당대의 최강자 군에 속했다.
금강권 고량을 얕잡아 봤던 문상제는 오판이었음을 인정하고 심기일전했다. 평수는 아니나, 두 수까지 차이가 벌어지는 약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문상제의 품까지 파고든 고량은 팔꿈치를 수직으로 쳐올렸다. 문상제는 왼 손바닥으로 방어함으로써 턱이 박살 나는 참사를 모면했다. 그의 사타구니를 노리고 가했던 고량의 슬격(膝擊)도 무산되었다. 문상제가 엉덩이를 뒤로 뺀 탓이었다.
문상제는 도객이었지만 적수공권의 육박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기실 상승 무인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주특기 외에도 다방면의 무공을 익힌 팔방미인이었다. 고량도 각종 병장기를 다룰 줄 알았다. 그러므로 초일류의 권각술에 능숙하게 대응하는 문상제의 솜씨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주먹싸움으로는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일격을 허용할 공산이 크기에 문상제는 급한 불을 끄자마자 칼을 앞세웠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이 차 공격을 예방한 문상제가 묵월도를 횡으로 휘두르자, 고량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위로 뛰어오르거나 밑으로 피하는 수단으로는 문상제의 덫에 걸려들 터이기 때문이었다.
노림수는 빗겨 냈지만 고량은 기껏 잡았던 거리의 우위를 내주어야 했다. 그러고는 곧장 고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량은 암울했다.
실로 절호의 기회였으나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개전과 동시에 문상제에게 일직선으로 돌격한 것은 그의 방심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주먹질 말고는 승산이 희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력의 격차가 있기에 장기전은 불리했다. 어떻게든 초반에 승부를 보아야 했다.
팔 하나쯤 내줄 각오로 달려들었는데, 뜻밖에도 아무런 부상 없이 그의 일보 앞에 도달했다. 그때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일거에 승기를 잡았을지도 몰랐다. 십이 성의 공력이 실린 그의 주먹을 막았던 문상제의 왼손은 뼈가 부러졌지만 전투 불능의 중상은 아니었다. 투기가 달아오른 문상제는 고통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독 오른 뱀처럼 사납게 몰아치는 문상제의 칼바람에 속절없이 밀리면서도 고량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 * *
차소영은 발을 동동 굴렀다.
연인의 선전을 바랐지만, 그보단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열 배는 더 컸다. 하지만 그녀는 고량이 쉽게 단념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문상제의 흉포한 칼이 고량의 몸에 도흔을 새길 때마다 차소영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비무를 중단시키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를 감싸며 대신 등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건 고량의 싸움이었다. 그의 일생이 담긴 일전이었다.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성전이었다.
차소영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굵어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그녀의 눈물을 가려 주었다.
옆에서 노미현이 소리를 질렀다.
“힘내요, 오라버니!”
차소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미현이 옳았다. 지금은 간을 졸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을 증명하려는 그녀의 정인을 전심(全心)으로 응원해야 할 때였다.
‘힘내요, 고랑(高良).’
차소영이 속으로 내지른 고함이 고량의 마음에 닿았다.
* * *
혈전이었다.
문상제의 도기(刀氣)에 쓸린 고량의 몸 곳곳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혈인(血人)이 되었지만 고량은 끈질기게 승부를 이어 나갔다.
명백한 고전이었으나 놀라운 분전이었다. 고량이 보여 주는 투혼에 만수보 경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피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고, 연신 위태롭게 비틀거렸으나 고량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날카로운 반격을 터뜨리며 상대인 문상제는 물론이고 관전하는 마령 문가 도호들의 간담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문상제의 상태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초반의 격돌에서 입은 부상으로 그의 왼팔은 빨랫줄에 걸린 기저귀처럼 너덜거렸다. 고량의 발차기에 당한 오른쪽 무릎도 온전치 못했다. 고량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도 매번 마무리에 실패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문상제는 노련하면서도 냉혹한 무인이었다. 양패구상을 노리는 고량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도, 착실하게 그의 전신에 칼자국을 새겼다. 도기가 아니라 도신이 그의 몸에 닿는 순간 승부는 종결될 터였다. 문상제는 고량의 팔 하나를 잘라 버릴 작심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을 벨 수도 있었다.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심하게 절뚝거리며 고량에게 짓쳐 드는 문상제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살기는 파국을 예고했다. 내버려 둔다면 고량은 참변을 면치 못할 터였다.
진천은 승패를 정하는 비무에 살의를 드러내는 문상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패배를 선언하지 않는 고량의 고집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백도방주가 배신했으니 구인결은 의미가 없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고량은 이미 그가 용호가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목숨을 걸 까닭이 무엇인가.
강맹한 도풍에 휘말려 낙엽처럼 쓸려 나가던 고량이 기어이 넘어지자 진천은 결심을 굳혔다. 무방비 상태가 된 고량에게 가차 없이 칼을 내리치려는 문상제의 손목을 겨냥해 진천이 철구를 날리려는 순간, 판정관 강찬의 대성(大聲)이 터져 나왔다.
“멈춰라. 제이전(第二戰) 역시 마령 문가의 승리다.”
찰나지간 망설였던 진천은 문상제의 묵월도가 속도를 늦추자 암습을 보류했다.
문상제가 천천히 칼을 내려 바닥에 널브러진 고량의 목에 겨누었다. 일백여 초의 격전을 치렀던 두 무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칼을 거둔 문상제가 마령 문가 진영으로 걸어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차소영이 연인에게 달려갔다.
고량을 안아 든 그녀가 돌아오자 삼보장 일행이 둘러쌌다. 전력을 쏟아부어 완전히 탈진한 데다 출혈이 심해 혼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고량이 진천과 시선을 맞추었다.
“미안하다. 뒤를 부탁하마.”
진천의 응답이 나오기도 전에 고량은 정신을 잃었다. 차소영과 노미현이 부랴부랴 그를 전각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두 여인은 서둘러 붉은색으로 물든 고량의 옷을 벗겼다. 나신이 된 고량에게 준비해 온 금창약을 바르고 지혈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진천은 눈을 돌렸다. 고량의 일전에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두 젊은 남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대웅은 술만 취하면 개가 되는 지아비에게 붙들린 아낙처럼 벌벌 떨었다. 반면 하수린은 고량의 투혼에 자극을 받아 한껏 흥분한 기색이었다.
“금강권이 그렇게 멋진 사내인 줄 몰랐어요.”
하수린이 뱉어 낸 감상에 진천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고량과 같은 부류였다.
“내가 그를 잇게 해 줘요.”
하수린의 까만 동공에 투지가 이글거렸다. 멀리 떨어져 남의 일인 양 지켜보는 오재현을 일별한 진천이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 대결이 생사투가 아님을 명심하기 바라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비무를 지속할 필요는 없소.”
하수린이 아미를 추켜올렸다.
“전장에 나가면 장수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한다는 걸 모르나요?”
하수린은 진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비무장으로 나갔다.
강찬에게 포권을 취하며 하수린이 출전을 알렸다.
“저는 하남 무림 팔정파의 하수린이에요. 제가 이편의 삼장(三將)이에요.”
* * *
마령 문가 진영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진천은 뒷줄 좌측 두 번째에 선 점박이 노인이 출전자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마령 문가의 두뇌 역할을 하는 인물일 터였다. 그가 하수린의 상대를 정하기 전에 세 청년 중 한 명이 나서서 출전을 자청했다. 진천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풍뢰도 문상현.
마령 문가의 미래로 불리는 신성이었다. 문상현은 다섯 명밖에 없다는 이십 대 용호(龍虎)의 일인이기도 했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용호단에는 삼 년 전에 들었다. 현재 마령 문가 최강의 도호로 자타가 공인하는 창천도군 문찬경보다 이 년이나 빠른 기록이었다.
진천은 문상현이 나오면 하수린이 우세하리라 전망했다. 문상현의 무위가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강하거나, 그가 근래 도약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수린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작년에 하수린에게 패퇴함으로써 그녀의 무명(武名)을 하늘로 띄웠던 흑창(黑槍) 동이승은 무조건 문상현보다 이름값이 높았다.
마령 문가 노인도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노인이 일언지하에 문상현의 청을 물리치자, 마령 문가의 도객들이 웅성거렸다. 노인은 불만으로 가득 찬 어린 후예의 얼굴을 외면하고 사십 대의 도호를 불러냈다. 마령 문가 무력 서열 칠 위로 평가받는 적운도(赤雲刀) 문상진(文尙眞)이었다.
상대가 결정되자 하수린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포권과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하수린이 예를 차렸다.
“팔정파의 수린이 적운도의 가르침을 받겠어요.”
하수린의 정중한 인사에 화답하지 않고 문상진이 등 뒤의 도갑에서 반월도를 꺼냈다. 내공을 주입하면 붉은 구름이 솟아난다는 애병을 손에 쥔 문상진은 하수린이 아니라 강찬을 보았다. 비무 개시를 촉구하는 그 눈길에 기분이 상한 강찬이 딴청을 부렸다.
상대가 발도하자 하수린도 허리춤의 청사편을 꺼내 들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기다란 채찍이 허공에서 둥글둥글 춤을 추었다. 채찍이 그려내는 현란한 동선(動線)에 현혹되지 않고 문상진이 하수린의 눈을 직시했다.
우우웅.
문상진의 칼이 도명(刀鳴)을 토해 내었다. 나지막한 칼 울음은 우중의 분위기를 한층 음산하게 만들었다.
출전자들은 결전에 돌입할 준비를 마쳤으나, 강찬은 자신의 권능을 만끽했다. 그에게서 시작하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문가의 건방진 칼잡이와 팔정파의 당돌한 계집은 출수하지 못할 것이었다.
다섯 번의 호흡이 지나도록 강찬의 입이 떨어지지 않자 맥이 풀린 하수린이 팔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채찍도 힘을 잃고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하수린의 시선이 문상진에게서 강찬에게로 옮겨 갔다. 얇은 회색 무복이 비에 젖어 늘씬한 몸매를 훤히 드러낸 남방의 어린 미녀를 훔쳐보고 있던 강찬이 고양이처럼 앙칼진 그녀의 눈초리에 움찔했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시작하라!”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찬 문상진이 하수린에게 돌진했다.
차악!
진창이 된 바닥을 때린 하수린의 청사편이 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