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68
제67화
“유사한 일이라면,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진천은 오재승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알았다. 진천이 즉답하지 않고 침묵하자 오재승이 좀 더 긁었다.
“근간에 강호 어디에서도 천지문에서와 같은 학살극은 없었소이다만.”
진천은 에둘러 가지 않기로 했다.
“소중걸이란 자의 만행으로 마련은 단박에 천지문을 차지했습니다. 천지문은 중립 지대의 중앙이라 할 오양에 위치한 문파입니다. 오양은 사패(四覇) 모두와 등거리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불과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니 다른 삼패의 반응이 나오려면 시일이 걸리겠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마련의 처사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정사(正邪) 무림은 물론이고 월교(月敎)까지 자극하는 도발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마련이 호전적인 집단이라고 하나 자신들과 힘이 비등한 맹수 세 마리를 건드려 싸우려 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또한, 앞서 ‘삼패의 반응’이라고 했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암묵적인 규약을 깬 마련을 상대로 응징에 나서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하더라도 시늉만 하겠지요. 왜냐하면 마련의 행보는 사전에 양해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양해라기보다는 협의가 맞겠네요. 즉, 사패는 각자 중립 지대에 있는 먹이를 하나씩 먹어 치우기로 한 것입니다. 정맹은 백도방을, 마련은 천지문을.
사벌은 어디일까요? 얼마 전에 제 의형인 도화각주로부터 농막(農幕)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농막은 백도방이나 천지문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그렇다면 사벌의 몫으로 정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월교의 목표물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예상되는 곳은 서너 군데밖에 없을 듯싶습니다.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니까요. 첫째, 앞선 세 방파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둘째, 월교의 영토에서 멀지 않아야 합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그렇습니다. 애당초 마령 문가가 백도방을 노릴 때부터 뭔가 석연치 않았는데, 금번 천지문 사태로 인해 의구심이 더 커졌습니다.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단주님을 찾아뵌 것입니다. 농막 등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고, 만약 없다면 앞으로 한두 달 정도는 유심히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요.”
오재승을 강퍅한 뺨에 경련이 일었다. 찻잔을 집어 드는 손도 떨렸다. 오재승은 차를 마시지 않고 입을 열었다.
“노부는 단지 천하에 오가는 정보를 주워듣는 문통에 불과하오. 진 공자처럼 큰 그림을 볼 안목이 없는 사람이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진 공자의 분석이 억측은 아닌 듯하오.”
오재승은 자료를 가져오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진천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구술했다.
“농막은 진즉 사벌의 수중에 든 것 같소.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농막은 육파(六派)가 번갈아 가며 막주(幕主)를 맡는 체계를 가지고 있소. 그런데 보름 전 당금 막주인 지한승(池翰昇)의 임기가 절반도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네 파벌에서 그를 끌어내리고 구창수(具昌秀)를 막주로 옹위했다는구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다음이 문제였소. 사파(四派)는 육파 연석회의에서 구창수에게 종신 막주의 지위를 주기로 결의했소. 지한승이 속한 전파(田派)와 그들과 한통속이라 할 종파(種派)가 격렬히 반대했지만, 사파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법규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의결을 선언했소.
내분은 필연이었지만 유혈극은 벌어지지 않았소. 장괴(杖怪) 석중(石重)을 비롯한 사벌의 사령(邪令)들이 여섯 명이나 농막에 와있었기 때문이오. 그들은 노골적으로 구창수를 편들며 회의의 결정에 따르도록 지한승 등을 압박했다고 하오. 초절정 고수인 장괴와 맞서다간 목이 떨어질 판이니 지한승파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소.
사흘 전 주평(朱坪)에서 날아온 전서구에 따르면 지한승과 그의 심복들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오. 그들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소. 사벌 측에서 제거한 건지 아니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들이 마련으로 달아난 건지 아무도 모르오. 여하간 신임 막주인 구창수가 사벌의 꼭두각시임은 분명한 듯하오. 인사와 재정권도 사실상 사벌이 파견한 자들의 손에 넘어간 모양이오. 물론 외부적으로는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았소. 다들 농막 내부의 소란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오.”
진천이 물었다.
“월교는 어떻습니까? 그들도 한 곳을 차지했을 것 같은데.”
오재승이 대답에 뜸을 들였다.
“농막처럼 확 드러나는 사태는 없소. 다만 진 공자의 추측을 듣고 보니 여구(麗邱) 만금장(萬金莊)이 유력하지 않을까 싶소. 진 공자가 제시한 두 가지 조건에 해당되는 데다 최근 기이한 동향이 포착되었기 때문이오. 이레 전쯤 월교의 금수위(金袖衛)들이 만금장에서 나가는 마차들에 탑승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소.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네 명은 확인되었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나 범상한 일은 더더욱 아니라오. 그렇지 않소?”
진천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소매에 금빛 띠를 두른 여인들은 정맹의 용호나 사벌의 사령들 못지않은 무력의 소유자들로 유명했다. 그런 이들이 네 명 이상 만금장에 출현했다면 결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오재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실은 노부도 농막과 백도방의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고심 중이었소. 특히 그제 천지문에서 일어난 참극을 듣고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오.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긴 했지만 노부는 구슬만 여기저기서 긁어모을 뿐 꿰맞추는 데는 영 서툰 위인이오. 주위의 친인들과 의논하고 싶어도 방금 진 공자에게 알린 내용들이 거의 전부 일급에 속하는 기밀들인지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소.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고 있던 차에 이렇게 진 공자와 대면하고 대화를 나누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구려.”
진천은 오재승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진천에게서 대꾸가 없자 오재승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진 공자는 어찌 보오? 이 일련의 사태를 사패가 벌일 대전란의 전조로 받아들이는 게 옳겠소?”
잠시 숙고한 진천이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 * *
진천이 오재승과 밀담을 나누고 있을 때 삼보장에는 오인(五人)의 불청객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을 처음 발견한 이는 등을 걸러 나왔던 노미현이었다. 대문을 지나 그녀가 선 곳으로 다가오는 다섯 개의 그림자를 우두커니 보고 있던 노미현의 서늘한 눈매가 둥글게 떠졌다.
모두 사내였고 전원이 허리에 갈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연령대는 제각각이었다. 두 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고, 다른 두 명은 사십 대의 중년이었다. 무리의 가운데를 차지한 이는 약관 어림으로 보이는 흑색 무복의 청년이었다.
전부 일면식도 없었지만 노미현은 이들이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알 것 같았다. 흑의 청년, 정확히는 청년의 눈 덕분이었다. 얼마 전 보았던 이의 뱀눈을 빼다 박은 눈. 청년은 남천도왕의 직계 후손임에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벽력도문에서 온 도객(刀客)들일 터였다.
다섯 명의 칼잡이는 노미현의 칠팔 보 앞에서 멈췄다. 청년의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노미현은 소름이 돋았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익히 아는 눈빛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남들과의 경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전리품쯤으로 여기던 성주 성가 후기지수들의 동공에 서려 있던 눈빛이었다.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노미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청년이 현시하는 오만함의 강도는 성주 성가 애송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험상 몹시 위험한 부류였다. 약간만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도 포악해지는 족속이기 때문이었다.
노미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청년의 입에서 느물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주안일화군. 듣던 것보다 훨씬 반반한데. 몸매도 제법이고.”
시정잡배의 말투였다.
반말과 품평에 대한 불쾌함을 내색하지 않고 노미현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로 본 장을 찾아왔나요?”
흑의 청년의 뱀눈이 실그러졌다. 노미현은 그것이 언짢다는 표정이 아니라 같잖다는 비소(誹笑)임을 알아차렸다.
“용건을 묻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안 그래?”
“…….”
“내가 물을 때는 즉시 대답해야 한다, 계집. 다시 주제넘은 결례를 범한다면 그 예쁜 주둥이를 찢어 주마.”
노미현의 뱃속에서 분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청년이 주는 공포감이 노화의 표출을 막았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계집이니 특별히 내 신분과 용건을 가르쳐 주마. 나는 벽력도문에서 온 곽건(郭建)이다. 여기엔 가출한 겁쟁이를 찾으러 왔다. 누군지 알지? 당장 불러와라.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뛰지 않으면 그 늘씬한 다리를 분질러 버릴 테다.”
발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노미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비릿하게 웃는 곽건을 보고서야 그가 자신을 압기로 옭아매어 희롱하고 있음을 깨달은 노미현이 온 힘을 다해 비명을 내질렀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하수린이었다.
청와옥을 나와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이천 평의 마당을 가로질러 노미현에게 달려온 하수린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곽건의 압기가 풀리자 노미현이 풀썩 쓰러졌다.
곽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하수린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노미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백와옥에서 고량과 차소영이 뛰쳐나왔다. 아직 신법을 펼치기엔 무리였기에 고량은 차소영에게 안기다시피 달려왔다. 그들에 이어 청와옥에서도 사람들이 연달아 빠져나왔다. 노덕, 대웅, 여상구, 그리고 가린의 순이었다. 가장 늦게 나왔지만 가린이 제일 먼저 하수린과 노미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해 난망의 상황에 가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으르렁댔다. 가린에 이어 당도한 대웅이 쓰러진 노미현을 일으킬 생각도 못 하고 석상처럼 굳었다. 아니, 석상이란 말은 어폐가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석상은 없는 법이니.
뒤늦게 합류한 여상구가 버둥거리며 일어서는 노미현을 부축했다.
“괜찮으냐?”
“괜찮아요, 청로.”
노미현이 무사함을 확인한 여상구가 그녀를 뒤로 물리고 하수린 옆에 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질문을 뱉자마자 여상구는 외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벽력도문의 칼잡이들이군. 그런데 너는 혹시…….”
곽건을 응시하던 여상구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하수린은 그의 뒷말이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음험한 기운을 발산하는 흑색 무복의 청년은 남천도왕과 판박이였다.
고개를 살짝 돌린 하수린은 가린 뒤에 숨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대웅을 흘깃거렸다. 그렇다면 저 사내는 뭐란 말인가. 남천도왕이 제 입으로 손자라고 했으니 그의 핏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어쩌면 저리도 딴판이란 말인가. 목전의 뱀눈과는 형제거나 사촌지간일 터인데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쪽이 원숭이라면 저쪽은 승냥이었다.
고량과 차소영에 이어 무릎이 시원치 않은 노덕이 마지막으로 현장에 이르렀다. 노덕이 한 달 넘도록 인사조차 건너지 못했던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니, 현아?”
노미현이 비틀거리자 노덕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노미현이 대답했다.
“좀 놀랐을 뿐이에요. 걱정 마세요.”
기대치 않았던 반응에 노덕의 눈가에 물기가 찼다.
사정을 아는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이 그들 부녀에게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감동적인 장면을 감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몰려나왔는데 정작 튀어나와야 할 놈이 빠졌군. 버러지들의 후예 말이야. 게으른 건가, 아니면 둔한 건가?”
곽건의 말에 여상구의 안구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