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3
제82화
구양은 십오 세 생일을 맞이하기 열흘 전 강진과 함께 천수원이 있는 배우곡(培禹谷)으로 떠났다.
그가 중원삼대의문(中原三大醫門) 중 하나로 꼽히는 천수원에 들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강진이 지닌 금패 덕분이었다. 그의 정확한 신분은 알지 못했지만 천수원의 원로들은 정파제일가인 원주 강가에서도 소수에게만 주어진다는 금패를 가진 소년을 무시하지 못했다.
강진은 금패의 권능을 빌어 구양에게 최고의 교육과 독립적인 처소 및 연실(硏室)을 제공하도록 천수원에 요구했다. 천수원의 수의(首醫)들은 심사숙고 끝에 강진의 청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기껏해야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강진이 진품임에 확실한 금패를 들고 있다는 건 그가 오 년 전 마흔 살의 나이에 정맹의 주인 자리에 오른 북천도군(北天刀君) 강운의 친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었다. 삼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의가(醫家)라 하나 정맹까지 갈 것도 없이 원주 강가의 말 한마디면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하는 천수원의 처지에서는 용의 자식이라 할 강진의 요구를 거부할 힘과 용기가 없었다.
친형제나 다름없는 구양과 헤어지며 강진은 마치 연인과 작별하듯 하염없이 울었다. 구양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결의를 다졌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심약한 주군의 병을 고쳐 강인한 무인으로 탈바꿈시킬 참이었다.
진득하게 듣지 못하고 권왕이 또 끼어들었다.
“전날 귀도마의는 정맹 추포조(追捕組)를 따돌리는 과정에서 현묘한 신법뿐만이 아니라 상승의 표창술(標槍術)까지 선보였던 걸로 알고 있다. 그건 어찌 된 일이더냐?”
“천수원에 가기 전 일사부가 이사부에게 알려준 유성우(流星雨)입니다.”
“칠지객(七指客)이 구사했다는 암기공 말이더냐?”
진천은 권왕의 식견에 감탄했다. 칠지객은 이백여 년 전 일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만 활동하다 잠적한 인물이었다.
“그렇습니다. 강가의 만무서고(萬武書庫)에서 잡술로 분류되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칠지객의 비급을 건진 일사부는 그것을 익혀 호신의 방편으로 사용하라고 이사부에게 건네주었답니다. 막대한 내공을 요하지 않는 무공이었으니까요.”
기가 찬지 권왕이 오므라진 입술을 벌렸다.
“허어, 전반적인 무력 수준이 형편없는 시절이긴 했다만 그래도 강호일절로 인정받았던 기객(奇客)의 절기를 그렇게 푸대접하다니. 강가가 배가 불렀구나.”
“제목이 뜯겨져나간 데다 중후반까지는 시중의 일반무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초식들만 적혀 있는지라 아무도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었나 봅니다. 만무서고에서 소일하며 거의 모든 서적을 탐독한 덕분에 일사부는 뜻밖의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더군요.”
“이제 보니 제법 대담한 구석이 있는 종자였도다. 칠지객의 비술을 몸종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정 맹주가 알았다면 경을 쳤을 텐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 고지식한 위인이 용서해주었을 성싶지 않구나.”
진천은 권왕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기실 강진은 구양을 천수원에 보내며 목숨을 걸었었다.
그가 구양에게 전한 건 유성우만이 아니었다. 구양의 연구를 돕기 위해 가문의 번천심공에다 만무서고에서 찾은 십이 종의 심법을 모조리 알려준 것이었다. 만약 들통 났으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의생이었던 귀도마의가 어떻게 정맹 고수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는지 알겠다. 유성우에 팔영보라면 어지간한 무인들은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었을 테지.”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권왕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반만 맞았다.
십오 년 가까이 유성우를 연마하고 십 년가량 팔영보를 익혔다지만 이사부가 체포를 면할 수 있었던 건 추포조의 경솔함 탓이 더 컸다. 당시 그가 처분한 보석들을 역으로 추적해 그의 덜미를 잡았던 추포대 삼조는 왜소하고 병약한 용모의 그를 얕잡아보고는 용호가 포함된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덮치는 우를 범했다.
실전경험이 전무했지만 늘 비상사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이사부는 당황하지 않고 도주에 나섰다. 그를 쫓던 추포조는 한 순간에 네 명이나 표창에 당하자 추격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사부가 현시한 신법을 목도한 후 그를 진실한 무위를 감춘 고수라 오인하고는 더럭 겁을 먹었던 탓도 상당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그 악종을 잡았어야 했다. 그놈은 단순한 도둑이 아니었거늘. 그때 체포에 성공했더라면 이만 명이 넘는 생목숨이 사라지지 않았을 터인데, 하아.”
권왕의 한탄에 진천은 자신이 죄를 지은 듯 몸 둘 바를 몰랐다.
일사부의 지병을 치료하기 위한 비약(秘藥)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이사부는 모야평의 천민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극약의 부작용으로 폐인이나 광인이 되는 이들이 속출했지만 이사부의 냉혹한 행보는 계속되었다.
가슴 아픈 사실은 천민들이 그를 병을 퍼뜨리는 악귀가 아니라 성자로 떠받들었다는 점이었다. 천민들을 순종적인 양으로 길들이려고 이사부가 주기적으로 식량을 나눠준 탓이었다. 나중에 기괴한 ‘전염병’의 확산을 우려한 정맹이 모야평을 통째로 불태울 때까지도 천민들은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진정한 원흉을 알지 못했다.
구양이 주군을 위해 천리조차 거슬러가며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 강진도 자기 몫의 최선을 다했다.
가문의 번천백팔도공을 능가하는 신공을 창안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강진은 구양의 역천기결로 얻게 될 심후한 공력에 걸맞은 절학을 갖출 참이었다. 그러면 부모형제를 포함해 그를 괄시했던 친족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할 수 있을 터였다.
만무서고에 틀어박힌 강진은 불철주야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제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학문적 보완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궁극의 무학을 구상하려면 보다 깊은 문리의 이해가 필수였다.
몇 년 만에 만무서고를 벗어난 강진은 학림의 본산 중에 하나인 무량서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 진서(秦瑞)라는 이름의 젊은 학사였다.
강진과 동년배였던 진서는 학림에서는 꽤나 유명한 인사였다. 이제 약관의 청년이었으나 무량서원의 내로라하는 대학들마저도 그에게 가르침을 청할 정도였다. 다른 세계의 걸출한 인재에게 호기심이 생긴 강진과 그와 친해지려 애썼다. 무가 출신답지 않게 겸손하고 순유한 인품의 강진에게 호감을 느낀 진서는 기꺼이 그와 교분을 맺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격의 없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친우가 되고 얼마 후 강진은 진서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그가 현현서각의 고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는 낡은 양피지 다발은 고대 환문의 비기인 팔영보가 기록되어 있는 비급이었다. 진서가 해독해 준 암문을 몇 날 며칠 꼼꼼히 살펴 본 강진은 소스라쳤다. 팔영보가 번천신법을 발아래 두는 희대의 비학임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초야를 치르는 숫총각처럼 흥분한 강진은 진서에게 아무에게도 팔영보에 대해 알리지 않도록 신신당부한 후 비급을 태워버렸다. 팔영보의 내용은 이미 완벽하게 암기한 후였다.
무량서원에서 일곱 달을 머문 강진은 예정했던 것보다 이 년 반이나 일찍 원주로 돌아갔다. 본격적으로 팔영보를 수련하고자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시간낭비임을 절감해서였다. 학림에서 배우는 경서(經書)나 고학(古學)은 지나치게 난해하기도 하거니와 한줌의 흥미도 일지 않았다. 무학의 창안에 도움이 되는 수준까지 이르려면 족히 삼십 년은 매진해야 할 거라고 판단한 강진은 학문에의 미련을 깨끗이 접었다.
귀향 도중 천수원에 들른 강진은 구양에게 팔영보의 구결을 알려주었다. 구양은 주군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읍했다. 어쨌거나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공히 환문의 후예가 되었다.
“천수원에 똬리를 튼 구양이란 놈이 제 주인을 위해 심약한 본성을 개조하는 마약과 역천기결이라는 마공을 만들려고 했다는 건 알겠다. 헌데 대관절 도적질은 뭣 때문에 벌인 게냐?”
순서를 건너 띄는 질문이었으나 진천은 순순히 답변했다.
“원정의 완성에는 원통하게 죽어가는 이들이 내뿜는 원혈만이 아니라 천왕삼(天王蔘)처럼 값을 매기기 어려운 진귀한 약재들도 필요했습니다. 천수원에 있는 재료들로는 턱없이 부족하거니와 손을 대면 금방 분실을 알아차릴 게 빤한지라 이사부는 거부들의 보석을 훔쳐 재원을 충당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도둑으로 변신한 구양은 한 달 새 스무 곳의 부가(富家)를 털었다. 무사들이 이중삼중으로 깔린 삼엄한 경비망도 십 년 간의 꾸준한 수련으로 팔영보의 이 단계에 진입한 구양에겐 듬성듬성 기둥만 박혀있는 허술한 울타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위기 한 번 없이 모든 도행에 성공한 구양은 의기양양했다.
그 때문인지 출행 시엔 항상 스스로 제작한 인피면구를 착용할 만큼 주도면밀했던 구양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암시장에서 시험 삼아 야명주와 자옥반지를 처분하는 과정에서 눈썰미 좋은 자에게 그의 손목에 새긴 문신의 일부를 노출한 것이었다.
본의와 상관없이 천수원 입문 시 받아야 했던 그 문신은 정맹의 추포대가 그를 추적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흩어져버린 연기도 잡아온다는 명성을 가진 추포들은 단 보름 만에 그의 꼬리를 잡고 천수원으로 향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기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두(小頭)에 오 척을 겨우 넘는 단구였다는 점이 구양의 운명을 갈랐다. 천수원에 잠입해 은밀히 의원들을 살피던 추포들은 그를 보자마자 용의자로 특정했다. 그들이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구양은 꼼짝없이 올가미에 걸렸을 터였다. 하지만 공을 세울 욕심이 앞선 추포들은 지원군의 당도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그를 덮쳤다. 그리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잔챙이 도둑 하나를 놓친 정도의 과실이 아니었음이 곧 드러났다. 구양의 처소 지하비고에서 발견된 각종 약물들의 성분을 조사한 천수원의 수의(首醫)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배우곡 인근의 모야평에 돌고 있던 괴질을 일으킨 원임임을 밝혀낸 천수원은 즉각 정맹에 그 사실을 알렸다. 그들이 단기간에 치료제를 만들기는 어렵다는 보고를 보태는 바람에 그 일은 이만여 명의 천민을 산 채로 화장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실로 작은 불씨 하나가 온 광야를 불태운 격이었다.
“어째서 귀도마의는 제 주인에게 약재를 구하는 데 소요되는 자금을 청하지 않았더냐? 정파제일가란 정파제일부(正派第一富)와 동의어거늘. 강가의 곳간마다 재물이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일 터인데.”
“이사부는 일사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답니다. 당시 삼 년 가까이 잔살광마 노릇을 하면서 일사부는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떻게든 스스로 처리하기로 결심했다더군요.”
“나는 도무지 이해난망이구나. 우연찮게 잔귀쌍마의 추격전에 다 참여했던 비영문의 아이가 둘의 경신이 동일함을 알아보았기에 그 악귀들이 한통속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더냐. 양구란 놈의 배경을 캐 들어가면 당연히 강진이란 종자가 걸렸을 터인데 어찌 하여…….”
말끝을 흐리던 권왕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설마…….”
권왕은 이번에도 말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하지만 진천은 그의 뒷말을 짐작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