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84
제83화
귀도(鬼盜)의 추포에 동원되었던 세 명의 용호들 중에는 원주 강가의 신성 강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강선은 추포대 삼조가 기다리던 무력지원군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들이 구양을 놓친 후 뒤늦게 천수원에 당도한 강선은 수의(首醫)들과 면담하고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들로부터 십삼 년 전 구양을 데려왔던 미지의 소년이 원주 강가의 금패를 내미는 바람에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말을 들은 강선은 대번에 어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그 소년이 형인 강진이었음은 불문가지였다.
구양이라는 자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래 전 형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원숭이처럼 생긴 아이였다. 눈빛이 어딘지 기분 나빠 혼을 내주려다 참았던 기억도 났다.
강선은 사소한 사안이 아님을 지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가문이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힌 도적의 배후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판이었다. 강선은 우선 천수원 수의들에게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다. 젊다하나 추포대에 소속된 정맹의 고수들도 감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용호인지라 수의들은 그의 함구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선은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전후사정을 알리는 서신을 본가에 보냈다. 강가는 즉각 최고의 정예들을 천수원에 파견했다. 정맹의 이름을 앞에 내새웠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전부 강가의 통제 하에 진행되었다.
모야평의 참사를 주도한 것도 강가였다. 그 사건으로 귀도마의는 강호십대악인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희대의 마인으로 떠올랐지만 ‘원주 강가의 금패를 지닌 소년’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천수원에서 새어나오지 않았다. 정파 무림의 지존을 보유한 가문의 막강한 권력 덕분이었다.
권왕이 백미를 이마로 추켜올렸다.
“치부를 힘으로 덮다니. 사파 나부랭이들이나 할 짓이다.”
진천은 뒷부분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정파이기에 은폐를 한 것이었다. 사파였다면 진위를 조작하고 천수원의 의원들을 영원히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비밀을 유지하려 들었을 터였다. 위선자라고 욕을 먹기는 하나 그래도 사파나 마도보단 정파가 나았다.
“그건 그렇고 강진이란 종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잔살광마가 귀도마의와 동일한 신법을 구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강가에서도 그놈의 행각을 알아차렸을 테지? 설마 그놈을 몰래 빼돌려 창인으로 달아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더냐? 강 맹주도 어쩔 수 없는 위인이군. 제 아들이라고 천하의 악종을 놔 주다니.”
중간에 권왕의 말을 자르고 들어갈 수는 없었던지라 끝까지 들었던 진천은 얼른 부인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외조부께서는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고는 바로 일사부를 잡아오도록 명했답니다.”
“흥, 시늉만 했을지 누가 아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사부는 강가의 도호들에 의해 청송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진천은 마음이 무거웠다. 일사부의 은신처를 알려준 이는 모친이었다. 모친은 가문 내에서 유일한 친인이었던 자신의 큰 오라버니가 강호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잔살광마임을 꿈에도 몰랐고 그녀를 구슬려 그의 소재를 알아내려는 가문 원로들의 진정한 의도도 알지 못했다.
원주와 천수원의 중간 지점에 있는 청송의 한 장원에서 구양을 만난 강진은 곧 정체가 발각될 것임을 인지하고는 향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둘의 결론은 ‘도망자들의 땅’인 창인으로의 도주였다. 창인이라면 강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도피처를 정하자마자 두 사람은 바로 출발했다. 하지만 강가의 조치가 워낙 빨랐기에 장원을 나서다 걸리고 말았다. 앞서 문을 나갔던 강진은 장원으로 쇄도하고 있던 친족들을 발견하고는 일부러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린 구양은 함께 옥쇄를 택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돌아서서 달아났다. 곧이어 강가의 도호들이 들이닥쳤지만 구양은 간발의 차이로 창고로 들어가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구양이 무사히 대피했음을 확인한 강진은 저항을 포기하고 점혈에 응했다. 장원을 샅샅이 뒤진 강가의 무인들은 일각도 지나지 않아 창고 안에서 동혈의 입구를 찾아냈지만 구양이 통로를 허물어뜨려 추적은 불가능했다.
극비리에 본가로 호송된 강진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가주의 장자임을 감안해 고문을 가하진 않았지만 강가는 그를 먹이지도 재우지도 않고 토설을 강요했다.
강진은 끝까지 버텼다. 그는 어떻게든 목숨은 보전하겠지만 구양은 잡히는 순간 명줄을 잘리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권왕이 별안간 무릎을 탁 쳤다.
“오호라, 이제야 알겠다. 그놈이 악착같이 불지 않으니까 강가는 일부러 그놈을 놓아주었구나. 꼬리를 밟아 귀도마의를 낚으려고.”
진천은 난감했다. 어째서 매번 틀린단 말인가.
“송구하오나 일사부를 탈출시킨 이는 제 어머니였습니다.”
짐작이 빗나가자 민망한지 권왕이 흰 눈썹을 씰룩거렸다.
“뭐라? 강가의 여인이었으니 네 어미는 무공이 보잘것없었을 터인데. 무슨 능력으로 뇌옥에서 그놈을 꺼낼 수 있었단 말이냐?”
“일사부는 뇌옥에 갇힌 게 아니라 종가의 심처에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점혈된 상태였기에 따로 경비도 두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강가의 점혈공을 알고 있던 제 어머니는 일사부를 해혈 한 후 내원의 비밀통로로 피신시켰답니다. 강가는 한 시진 후에야 변고를 알아차렸습니다. 일사부가 이미 원주를 벗어난 뒤였지요.”
“강가의 행사가 그렇게 허술하다니 믿기 어렵다. 천하의 악종을 그런 식으로 방관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
“필시 강가의 술수였을 게야. 네 어미를 앞세워 그놈을 놔 준 거지. 그러고는 뒤를 쫓다 도중에 놓쳐버렸음이 틀림없다.”
사실이 아니었으나 진천은 권왕의 비위를 맞췄다.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권왕이 눈을 찡그렸다.
“거짓말에 능숙한 놈이 아니로구나, 너는.”
“죄송합니다.”
진천의 싹싹한 사과에 권왕이 표정을 풀었다.
“여하간 강가는 그 악종의 추적을 단념했단 말이더냐? 강가의 권능을 총 동원해 천라지망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저도 그 부분은 알지 못합니다. 추측컨대 일사부를 쫓기는 했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요란스럽게 진행하기엔 부담스러운 데다 일사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서벌의 영역으로 들어갔기에 결국엔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가면서 이런저런 위기를 겪었지만 일사부는 강가를 탈출한 지 반 년 만에 창인에서 이사부와 재회할 수 있었답니다.”
“참으로 질긴 운이로구나.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이십 년 가까이 호의호식하다 제자이자 조카인 아이의 품에서 편안한 종말을 맞이했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호의호식’이란 표현엔 어폐가 있었으나 진천은 잠자코 있었다.
진천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이야기의 흐름 상 이제 부모의 과거사를 끄집어내야 할 차례였다. 과연 권왕이 화제를 그리로 옮겼다.
“네가 잔귀쌍마의 전인이 되었던 건 우연이 아닐 테지? 네 어미는 처음부터 그놈들의 마공을 얻을 요량으로 창인으로 향했던 게야. 그렇지 않으냐?”
모처럼 권왕의 짐작이 들어맞았으나 진천은 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
“맞습니다, 어르신.”
진천의 심사도 모르고 권왕이 쾌재를 불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나저나 네 어미는 대체 무슨 속셈이었더냐? 네 녀석이 그놈들 같은 악귀가 되면 어쩌려고.”
권왕의 말이 송곳이 되어 진천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이야말로 모친이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진천이 묵묵부답하자 권왕이 대답을 재촉했다.
“어서 말해 보거라. 네 어미는 어이하여 배 속의 너를 창인까지 데려갔더냐? 그 전에 네 애비와는 어떻게 연분을 맺었고? 강 맹주도 저간의 일들을…….”
권왕이 말끝을 흐렸다. 암울함으로 물드는 진천의 안색을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파리들이 오고 있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권왕이 중얼거렸다. 그를 따라 기립한 진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는 강가의 무인들이 아니라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을 맞아 잎사귀들을 흔드는 수목들만이 잡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권왕의 기감이 틀렸을 리 없었다. 외숙은 강가로 돌아가자마자 기민하게 추살대(追殺隊)를 보낸 것이었다.
“어떻게 한다. 네 녀석과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까?”
권왕이 눙치자 진천은 실소했다.
“아니다. 그놈들이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테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에이, 귀찮아.”
투덜거린 권왕이 진천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진천은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발아래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숲을 내려다보며 진천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권왕은 한 번도 착지하지 않고 수백 장을 날아가고 있었다. 오륙 갑자의 공력이 있어야 시전이 가능하다는 육지비행술이었다. 전날 만수보에서 남천도왕이 선보인 바가 있었지만 견식과 체험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절대지경의 위엄을 실감한 진천은 아득해졌다. 언제야 팔대무왕의 무위에 이를 수 있을까.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던 권왕이 찬란한 햇살을 받아 은빛 비단처럼 흐르는 강줄기를 보고는 떨어져 내렸다. 진천은 그 강이 도주로로 삼으려 했던 도화강임을 알았다.
도화강에 이른 권왕이 까닭모를 미소를 짓더니 도강(渡江)을 하지 않고 방향을 반대로 틀어 왔던 경로로 되돌아갔다. 진천이 그의 의중을 간파했음을 모르는 권왕이 친절히 설명했다.
“당황하지 말거라. 강가의 아이들 중 코가 밝은 놈이 끼어있으면 성가시지 않겠느냐. 천리응(千里鷹)이나 흑미백서 같은 영물을 부릴지도 모르고. 이럴 때는 등잔 밑에 들어가는 게 상책이니라.”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권왕은 서너 번의 호흡 만에 출발했던 지점에 도달했다. 진천은 일군의 무인들이 서서히 접근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권왕은 진천이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절벽으로 갔다. 그러고는 수직으로 비상했다.
진천은 낭떠러지 위에서 수풀을 헤치고 나온 강가의 추적대를 바라보았다.
스무 개 남짓한 머리통이 개미 떼 같았다. 진천과 권왕이 머물러있던 장소 주변에 흩어져 부산하게 조사하던 무인들이 다시 모이더니 도화강 쪽으로 이동했다.
“어떠냐? 저놈들을 따돌린 내 솜씨가.”
권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에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진천에게서 기대했던 응답이 나오지 않자 권왕의 오므라진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네 녀석이야 나에게 안겨 있었으니 쉬워 보일 테지만 결코 간단한 조치가 아니었느니라. 저놈들의 속도를 면밀히 계산해 얼른 강에서 돌아와야 했으니까. 촌각만 늦었어도 저놈들에게 여기로 날아오르는 걸 들켰을 지도 모른다. 하긴 보았더라도 그냥 천공을 비행하는 거조(巨鳥)라고 착각했을 테지만. 아무튼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솜씨라 아니 할 수 없다.”
너무 노골적이었지만 반박이 불가능한 자랑이었다. 흉내는커녕 애당초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였다.
“저로서는 감히 감상을 드러내기도 황송할 지경입니다. 어르신의 신위를 가까이서 목도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려 감읍할 따름입니다.”
옆구리를 찔러 절을 받은 권왕이 만족스러운지 껄껄 웃었다.
“내 솜씨가 가히 훌륭하긴 하다만 뭘 감읍까지야. 자, 이제 방해할 놈들이 없으니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꾸나.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 끊겼더라?”
진천은 상기시키기 싫었으나 마지못해 말해주었다.
“제 어머니가 창인을 찾은 연유를 물으시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선친과의…….”
권왕이 진천의 말을 잘랐다.
“맞아, 맞아. 흠, 어쩐다.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면 이해난망이 될 수도 있는데.”
하늘을 올려다 본 권왕이 진천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까짓 것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려면 아직 멀었으니 느긋하게 듣자꾸나. 네 어미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 삼보장주의 전언으로는 사……, 그러니까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던데.”
진천은 권왕이 표현을 순화시켜서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란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